■유목민 이야기 제31회
카자르 제국
6세기 중반에 세워진 돌궐 제국은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내부적 권력투쟁에 더해 중국의 분열정책이 돌궐의 운명을 재촉하였다. 초기에 돌궐 제국은 나름대로의 권력분할 제도를 마련해두었다. 앞서 본 것처럼 돌궐 제국 창건자 토문이 죽자 그를 계승한 아들 무한은 카간의 칭호를 갖고 토문의 동생 이스테미는 야브구라는 2인자 칭호를 갖고서 각기 동서 제국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서돌궐의 이스테미를 계승한 타르두(중국 사서의 ‘달두達頭’)는 야브구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카간을 칭하였다. 동돌궐의 카간과 서돌궐의 카간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중국은 수나라에 의해 통일(581)된 직후였는데 동서 돌궐의 싸움에 개입하여 타르두를 지원하였다. 타르두는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600-603) 대카간으로서 동돌궐까지도 지배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 동돌궐은 중국의 신흥 왕조 당나라에 멸망당하였다. (630)
서돌궐 역시 비슷한 시기 이식쿨 호수를 경계로 서쪽의 노실필弩失畢과 동쪽의 돌육咄陸의 두 집단으로 분열되어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두 집단은 각기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투르크어로 ‘열 개의 화살’을 뜻하는 ‘온 오크’로 불렸다. 중국 사서에는 이를 ‘십성十姓’ 혹은 ‘십성부락’이라 하였다. 당나라가 이러한 내부적 갈등을 이용하였던 것은 물론이다. 당나라가 돌육에 대항하여 노실필을 지원하자 돌육은 박트리아 쪽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소멸하였다.(651)
이러한 돌궐 제국의 내부적 갈등의 시기에 일부 서돌궐에 속한 집단이 볼가 강 하류와 코카서스 산맥 북부 지역에서 카자르를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우두머리의 칭호가 카간이었다는 것이 돌궐 제국과의 연관을 드러내준다. 카자르 제국을 세운 집단의 우두머리는 ‘아시나’ 씨족 출신이라 알려져 있는데 아시나 씨족은 돌궐 제국을 세운 토문의 씨족이다. 테오파네스의 연대기에 의하면 카자르인들은 쿠브라트의 사후 쿠브라트의 장남 바트바얀이 이끌던 불가르족을 정복하고 동쪽의 볼가 강에서 서쪽의 드네프르 강에 걸치는 남러시아 초원지대를 지배하였다. 수도는 볼가 강이 카스피 해로 들어가는 하류에 위치한 이틸(일부 기록에는 ‘아틸’로 되어 있다)이었는데 최근 아스트라한 남쪽의 사모스델카 지역의 유적지가 이틸로 판명되고 있다.
카자르가 차지한 곳은 동서남북으로 유라시아 통상로들이 지나는 곳이었다. 카자르인들은 통과하는 교역물품에 매기는 세금으로 번창하였다. 물론 앞에서 말한 바트바얀 휘하의 불가르족은 말할 것도 없고 다수의 슬라브 부족들로부터 거둬들인 공납이 또한 카자르의 중요한 수입이었을 것이다. 당시 러시아 땅에는 많은 슬라브 부족 집단들이 살고 있었지만 국가라고 할 만한 조직은 창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카자르 제국은 이러한 슬라브 부족들을 쉽게 지배할 수 있었다. 러시아의 첫 사서라 할 수 있는 《루스 초기연대기》에서 그러한 사정을 엿볼 수 있다.
당시 키에프 지역에는 숲과 언덕에서 살던 폴리안 족이라는 슬라브 부족이 있었다. 폴리안 족은 데레블리 족을 비롯한 주변의 다른 족속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카자르인들이 와서 폴리안 족에게 공납을 요구하였다. 아마 데레블리 족을 비롯한 다른 족속들로부터 지켜준다는 명목 하에서 공납을 받았을 것이다. 공납은 한 가구당 칼 한 자루씩이었다고 한다. 물론 카자르는 이 폴리안 족만이 아니라 다른 슬라브 부족들에게도 공납을 강요하였다. 《루스 초기연대기》는 세베르 족, 비아티치 족 등에게 흰다람쥐 가죽을 공납으로 거둬들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9세기 중엽 ‘바랑기’라고 불린 바이킹들이 들이닥쳤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강을 따라 키에프 지역까지 온 이들은 슬라브 부족들에 대한 또 다른 지배자가 되었다. 카자르와의 충돌은 불가피하였다. 《루스 초기연대기》에 의하면 884년 바랑기의 우두머리 올레그는 세베르 부족을 정복한 후 세베르 인들이 카자르에 바치는 공납을 금지하였다. 올레그는 또 라디미크인들에게도 카자르에 바치는 조공을 자신에게 돌리라고 명령하였다. 슬라브 족을 놓고 바이킹들과 유목민 전사들인 카자르인들이 충돌한 것이다.
결국 카자르는 ‘루스’라고 불린 이 바랑기인들에 의해 965년 정복되고 만다. 불가리아에 관해 언급할 때도 등장했던 루스의 정복군주 키에프 대공 스뱌토슬라프가 그 주인공이었다. 스뱌토슬라프가 카자르 정벌에 나서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크림 반도에 살던 고트족이 카자르 유목민들의 약탈행각에 시달리자 스뱌토슬라프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루스군은 카자르 제국의 주요 요새인 사르켈 요새를 함락한 후 볼가 하구에 있던 수도 이틸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다시 볼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 볼가 불가르족의 수도 볼가리까지 함락하였다. 카자르 제국은 키에프 루스에 의해 멸망한 후 여러 소집단으로 분리되었다가 주변의 투르크족에 의해 흡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볼가 강이 카스피 해로 빠지는 델타 지역에 있었다고 하는 수도 이틸은 놀랍게도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상업지구가 도시 내에 있었다는 사실은 카자르에게 교역이 상당히 중요한 활동이었던 것을 말해준다. 또 성문 가운데에는 초원으로 나가는 문과 강으로 나가는 문이 있었다고 하는데 강으로 통한 문은 물품들이 오가는 문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카자르는 비잔틴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소중한 세력이었다. 무엇보다 중동에서 발원한 이슬람 세력이 북방의 초원 지대로 팽창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카자르 제국의 입장에서도 이슬람 세력을 막기 위해서는 비잔틴 제국과의 동맹은 긴요하였다. 비잔틴의 콘스탄티노스 5세가 카자르 제국의 공주 치자크와 결혼한 것은 두 나라간의 동맹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 난 이들 레오 황제는 ‘카자르인 레오’라고 불려졌다. 그 다음 세기에 ‘슬라브 사도’ 콘스탄틴(성키릴)이 862년 모라비아로 파견되기 전 비잔틴 황제의 명으로 카자르에 파견된 일이 있다. 당시 카자르에는 적지 않은 수의 유대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의 영향력으로 인해 유대교가 국교로 선포되려고 하였다. 성키릴은 이를 저지하고 기독교를 확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파견된 것이라 한다. 물론 그러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당시 비잔틴 제국이 카자르의 종교정책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방증해주는 것이다.
830년대에 돈 강변에 세워졌던 사르켈 요새는 북방 유목민 페체네그 인들과 루스인들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요새로 비잔틴 기술자들이 지어준 것이다. 콘스탄티노스 7세 황제의 《제국통치론》에 따르면 당시 비잔틴 황제는 이와 동시에 크림 반도의 케르손에 총독을 파견하여 그 지역을 직접 지배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크림 반도 지역은 카자르 제국의 세력권이었는데 비잔틴 제국의 이러한 조처를 카자르측이 눈감아 준 것은 사르켈 요새 너머 북방민족들의 위협이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랍과 북방 민족에 대한 튼튼한 장벽 역할을 하던 카자르가 키에프 공국에 의해 멸망하자비잔틴 제국에게는 심각한 위협이 대두하였다. 새로운 위협은 오구즈 투르크인들이었다. 이들 역시 카자르인들과 마찬가지로 서돌궐에서 갈라져 나온 투르크인들이었지만 문명화가 덜 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이슬람의 전사로서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을 성전(聖戰, 지하드)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에게는 그냥 단순한 북방유목민의 위협에 그치지 않았다.
참고문헌
S. Cross et O. Sherbowitz-Wetzor (tr.) The Russian Primary Chronicle : Laurentian Text (Harvard University Press, 1953)
András Róna-Tas, Hungarians and Europe in the Early Middle Ages.
P. Golden, ‘The Peoples of the south Russian steppe’, in D. Sinor (ed.) The Cambridge History of Early Inner 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