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이야기 32회
페체네그 족
앞에서 본 대로 마자르족을 그 원주거지에서 밀어내어 판노니아 평원으로 이주하게 만든 것은 페체네그인들이었다. 비잔틴인들의 기록에는 ‘파치나코이’ 혹은 ‘파치나키타이’로 표기되어 있는데 ‘페체네그’라는 말은 동슬라브인들이 부른 이름이다. 콘스탄티노스 포르뤼로게네토스 황제는 그의 《제국통치론》에서 페체네그인들의 원주거지를 아틸 강(볼가 강)과 ‘게에크 강’ 사이라고 하였다. 게에크는 아틸 강과 마찬가지로 카스피 해로 흘러들어가는 우랄 강을 말한다. 9세기 말 페체네그인들과 같은 투르크 계통의 족속인 카자르 인들과 우즈(오구즈) 인들이 페체네그인들과 싸워 이겨 페체네그인들을 서쪽으로 쫓아내었다. 물론 이주하지 않은 일부도 있지만 서쪽으로 이주한 페체네그인들은 마자르족을 내쫓고 드네프르 강을 중심으로 한 흑해 연안에 정착하였다.
페체네그인들의 나라 즉 ‘파치나키아’는 드네프르 강을 경계로 동서에 네 개씩 즉 모두 여덟 개의 주로 나뉘어 있었다. 또 주 밑에는 다섯 개씩의 군을 두어 모두 40개의 군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지방조직은 중앙집권적 국가조직보다는 유목민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부족연합의 성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페체네그인들의 뛰어난 전투력은 이들을 유력한 용병으로 만들었다. 이이제이 정책을 통해 북방의 안전을 도모했던 비잔틴 제국은 말할 것도 없고 키에프 루시와 불가리아도 페체네그인들을 용병으로 끌어들였다.
페체네그인들이 정착한 지역은 키에프 루시와 인접한 곳이었다. 페체네그인들에게 키에프 루시는 좋은 약탈원정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968년 페체네그인들은 키에프 대공 스뱌토슬라브는 불가리아를 공격하러 다뉴브 전선에 가 있는 틈을 타서 키에프를 공격하였다. 키에프 시는 페체네그인들에 의해 포위되어 거의 아사지경에 이르렀다가 간신히 곤경을 벗어났다. 물론 양측 사이의 교역도 끊이지 않았다. 루스인들은 자신들의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소와 말, 양을 유목민인 페체네그인들로부터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잔틴 제국의 입장에서는 페체네그인들과의 우호적인 관계가 제국의 안보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이는 콘스탄티노스 포르뤼로게네토스 황제가 그의 《제국통치론》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페체네그인들은 루스나 불가르, 마자르족을 견제하는 데 이용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기도 했지만 크림 반도 가까운 흑해 북안 초원지대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이들과의 관계가 악화되면 비잔틴의 중요한 도시인 케르손이 공격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케르손은 현재의 세바스토폴이다. 비잔틴 시대 케르손은 상업 뿐 아니라 북방 민족과의 외교에서 중요한 도시였는데 당시 비잔틴 사절은 이곳까지 배로 와서 북방 민족의 영토로 들어갔다.)
물론 페체네그인들을 비잔틴 제국의 용병으로 묶어두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1018년 비잔틴 제국이 불가리아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차지하자 비잔틴 제국은 다뉴브 강을 경계로 하여 페체네그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페체네그인들은 키에프 루시에 대해 하던 것처럼 비잔틴 제국으로도 빈번히 약탈원정을 감행하였다. 많은 민가들이 약탈되고 요새들이 파괴되었다. 페체네그족의 활동범위는 국경 부근을 넘어서 그리스의 주요 도시 테살로니까까지 미치기도 하였다. 비잔틴의 미카엘 4세 황제(1034-1042)는 이러한 침공을 막기 위해 국경지역에 시장을 개설하는 방안을 세웠다. 이는 페체네그인들이 약탈행각을 통해 얻는 물건을 시장에서 구입하여 약탈행각에 덜 의존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시장을 개설하는 것과 함께 국경 남쪽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지대를 만들었다. 이러한 정책은 얼마 동안 효과를 발휘했지만 페체네그인들이 1046년 오구즈 투르크인들에 의해 북방 초원에서 밀려나 서쪽으로 대거 이주하자 다시 문제가 심각해졌다. (C. Mango, p.183) 당시에 케겐, 티라크 등의 우두머리들이 알려져 있는데 두 사람은 권력투쟁을 벌여 먼저 케겐이 휘하의 페체네그인들을 이끌고 비잔틴으로 망명하였다. 비잔틴 제국은 그에게 세례를 주고 ‘파트리키오스’라는 높은 칭호와 함께 다뉴브 국경 지역 요새 세 곳의 수비를 맡겼다. 비잔틴의 장수가 된 케겐은 다뉴브 강 너머의 페체네그인들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케겐 후에도 티라크를 우두머리로 한 집단이 또 강을 건너 비잔틴에 투항하였다. 티라크 집단도 니쉬와 세르디카 사이를 지키는 수비병력으로 배치되었다. 플로린 쿠르타스에 의하면 당시 다뉴브 국경지대의 수비대원들 상당수가 페체네그 병사들이었다고 한다. (Curta, p.296)
그러나 지금과 마찬가지로 난민들을 수용하고 그들이 불만 없이 살도록 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티라크 휘하의 페체네그인들은 소아시아 지역을 침략한 또 다른 투르크족인 셀주크족을 몰아내기 위해 소아시아로 보내진다고 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1048년) 이들은 케겐 집단과 손을 잡고 제국의 군대에 대항하여 싸웠다. 페체네그족은 제국의 종교정책에 대해 불만을 가진 이단 종파인 파울리키안 파와 손을 잡았다. 이 이단세력의 우두머리들은 페체네그의 공주들과 결혼하여 초원 전사들을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두 세력이 손을 잡으면서 다뉴브 강으로부터 그 남쪽의 하에무스 산맥 일대지역이 페체네그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1087년에는 다뉴브 북방의 페체네그인들이 쿠만족 및 마자르족과 함께 비잔틴 제국을 침략하였다. 당시 황제 알렉시오스 콤네누스 황제(재위 1081-1118)는 이들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 당시 페체네그 병력은 황제가 동원할 수 있었던 군대를 압도하는 8만에 달했다. 페체네그인들은 다뉴브 국경지역을 휩쓸고 트라키아를 거쳐 콘스탄티노플 성벽 밑까지 진격하였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협공하기 위해 소아시아의 셀주크 족과 접촉하였다. 당시 소아시아의 셀주크족은 소아시아를 넘어 키오스, 미틸레네 같은 에게 해의 섬들까지도 점령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러한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로부터 제국을 구해준 것은 페체네그인들과 함께 쳐들어온 또 다른 북방 유목민 쿠만족이었다. 역사에서 ‘레부니온 전투’라고 불리는 1091년 4월 29일의 싸움에서 페체네그족은 쿠만족과 비잔틴 연합군에게 참패하였다. 여자들을 포함하여 사로잡힌 페체네그족 포로들은 대거 학살되었다. 요행히 살아남은 일부는 비잔틴 군대에 편입되어 서유럽에서 온 십자군 군사들과의 전투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Curta, p.302)
참고문헌
S. Cross et O. Sherbowitz-Wetzor (tr.) The Russian Primary Chronicle : Laurentian Text.
C. Mango (ed.), The Oxford History of Byzantium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F. Curta, Southeastern Europe in the Middle Ages 500-1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