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이야기 43회
페골로티의 《상업편람》
프란체스코 페골로티(Francesco Pegolotti, 1290-1347)는 피렌체의 무역회사이자 은행이었던 ‘바르디 상사’(Compagnia dei Bardi)의 직원이었다. 유명인사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네덜란드의 안트베르펜, 영국 런던 그리고 키프로스에서 바르디 상사의 상사원으로서 무역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토대로 쓴 무역 실무를 위한 안내서를 남겼다. 《각국의 사정과 거래에서 사용되는 도량형 및 상인들이 알아두어야 할 사정》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당시 사용되던 상업용어에 대한 해설과 더불어 주요한 무역도시와 여러 국가의 사정, 각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 및 도량형, 통화에 대한 대단히 실무적인 내용이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오랫동안 피렌체 도서관에서 원고상태로 있다가 1766년에 파그니니에 의해 《상업편람》(Pratica della Mercatura)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많은 무역도시들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이 책에는 당시 몽골 제국과의 무역에 대한 내용도 찾아 볼 수 있다. 몽골 제국과의 무역로는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타나에서 킵차크 한국을 거쳐 대칸이 다스리는 원나라의 북경으로 가는 루트이다. 다른 하나의 루트는 앞서도 소개한 소아르메니아의 항구 라이수스(이탈리아어로는 라이아초)에서 오늘날의 터키를 가로 질러 일 한국의 수도 타브리즈로 가는 길이다.
킵차크 한국을 거쳐 가는 루트의 출발지는 제노아 공화국의 무역식민지인 타나인데 타나는 오늘날 러시아에 속한 아조프 시에 해당한다. 크림 반도 옆의 아조프 해 깊숙한 곳의 돈 강 하구에 위치한 도시이다. 당시 이탈리아 인들은 흑해를 ‘큰 바다’(Mare Maggiore)라고 불렀는데 타나의 명칭도 ‘큰 바닷가의 타나’(Tana nel Mare Maggiore)였다. 여기서 육상으로 킵차크 한국의 사라이까지는 말이 끄는 수레를 타면 10일에서 12일,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가는 완행은 25일 정도 걸리는 여정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다시 아무다리야 강변의 오르간치(우르겐치)까지는 20일 정도가 걸린다. 갖가지 상품들이 모이는 오르간치에서 화폐용 은괴를 구매한다. 이제부터는 낙타가 끄는 수레를 타고 가는데 때로는 당나귀, 말 등으로 갈아타며 북경까지 간다. 도합 타나에서 270일 즉 9개월이나 걸리는 여정이었다. 원나라의 국경에 들어서면 갖고 간 은괴를 지폐로 바꾸어야 한다. 당시 원나라에서는 지폐가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지폐는 국가가 발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유통에 문제가 없었다.
페골로티는 타나로부터의 이 무역로를 이용하는 상인들에게 몇 가지 유용한 충고를 한다. 면도를 하지 말고 수염을 기를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출발지인 타나에서 타타르어 통역을 구할 때 돈을 아끼지 말고 좋은 통역을 구할 것. 유능한 통역은 돈을 더 주더라도 거래에서 그만한 값어치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즈니스를 도와줄 남자 하인이 두 명 정도 있어야 하는데 이들도 타타르어에 능숙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여자 하인도 하나 고용하면 더 없이 여행이 편하다고 저자는 귀띔해 준다. 당연히 현지어에 능숙한 여자라야 한다. 타나에는 이렇게 타타르어를 할 줄 아는 이탈리아인들이 제법 있었던 모양이다.
타나에서는 식량도 25일치 정도 준비해야 한다. 밀가루와 소금에 절인 생선을 구하면 되는데 육류는 가져갈 필요가 없다. 도중에 널린 게 육류라서 언제든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나에서 북경까지 여정은 아주 안전하기 때문에 안전에 대한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한 왕이 죽고 다른 왕이 정해지기 전까지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그러한 때에는 물론 길은 안전하지 않다. 사람들은 타나에서 사라이까지의 여정이 가장 안전하지 않은 곳이라 하지만 보통 카라반이 60 명 정도로 구성되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에서도 안전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집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만큼 안전하다.”
세금에 대한 언급도 있다. 물품에 부과되는 관세는 무역상인에게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출발지인 타나에서는 금과 은, 진주에 대해서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았다. 그리고 제노아가 지배하던 곳이라 이탈리아 상인들에게는 약간의 혜택이 있었다. 같은 물건인데도 제노아 인들과 베네치아 인들에게는 4 퍼센트의 세금을 매기고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5퍼센트의 세금을 부과하였다. 그리고 물건을 반출할 때에는 세금을 매기지 않는다. 참고로 킵차크 한국도 3-5 퍼센트 정도의 낮은 세금을 부과하였다고 한다. 원나라에서는 그보다 높아 10 퍼센트 정도였다. (Jackson, 313) 이러한 낮은 세금은 무역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진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금과 은, 진주와 보석 그리고 실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직물, 갖가지 염료 및 향신료 등이 앞에서 말한 무역루트를 따라 동양에서 들어왔는데 이러한 물품들은 대중용 소비품이라기보다는 사치품으로서 귀족들에게 고가로 팔리는 상품들이었다. 유럽보다는 아시아에서 많이 생산되고 또 값도 상대적으로 저렴하였기 때문에 먼 거리를 건너와서도 상인들에게 상당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투입된 자본 대비 100 퍼센트의 수익률은 드물지 않았고 모험이 따르는 사업의 경우 수익률은 500 퍼센트에 치솟았다고 한다. (Jackson, 313)
피롤로티도 언급했듯이 몽골 제국은 지폐를 사용하였다. 당시 유럽인들의 눈에는 아주 생소한 일이었다. 물론 지폐는 원나라 때 처음 사용된 것은 아니다. 그 전의 송나라에서 먼저 사용되었지만 몽골 시대에 지폐는 법화로 강제 유통되었다.
원나라와 일한국에서 도합 24년(1271-1295)을 살았던 마르코 폴로는 그의 여행기에서 대칸은 종이를 돈으로 변환시키는 연금술사라고 표현하였다. 뽕나무의 껍질을 벗겨서 만든 종이에 대칸의 도장을 찍어서 만든 지폐를 누구도 받기를 거부할 수 없었다. 거부하는 경우에는 사형죄로 다스려졌다. 대칸은 금과 은, 비단 등의 값비싼 물건을 사들일 때도 이러한 종이 쪽지를 이용한다. 종이를 주고 금과 은을 손에 넣다니! 마르코 폴로에게 이는 너무나 신기한 일이었다. 이렇게 종이를 주고 원하는 값비싼 물건을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에 대칸은 세상의 어떠한 군주보다 더 부유한 군주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대칸에게 받은 지폐는 어디서나 유통되었다. 유통이 대칸의 권력으로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었고 또 상인들 스스로 그러한 지폐가 어디서나 사용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릇이나 장식품을 만들기 위해 금이나 은이 필요한 사람은 지폐를 발행하는 관청으로 가서 지폐를 금과 은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다. 마르코 폴로는 지폐가 찢어지거나 훼손되는 경우 그것이 발행된 관청으로 가서 새로운 지폐로 바꿀 수 있다고 하였다. 지폐교환에는 3 퍼센트의 수수료가 부과되었다고 한다. (Murray, Travels of Marco Polo, Part I, ch. 26)
참고문헌
Henry Yule, ‘Pegolotti’s Notices of the Land Route to Cathay’ in Cathay and the Way Thither Vol. III (The Hakluyt Society, 1914), pp. 135-174.
Peter Jackson, The Mongols and the West.
Hugh Murray (tr.) Travels of Marco Polo. (1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