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이야기 51회
칼미크의 귀향
칼미크 한국의 아유키 칸이 죽은 1724년 후 차르 정부는 칼미크 한국에 대한 간섭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였다. 예전과 같은 자율성을 더 이상 칼미크에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었다. 칼미크의 우두머리 호칭으로 사용되던 ‘칸’을 폐지하고 칼미크의 통치자를 직접 차르가 임명하겠다고 하였다. 러시아 차르와 대등한 칸 대신 그 우두머리에게 주어진 칭호는 ‘부왕副王’이었다. 이와 더불어 칼미크 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정책도 펼쳐졌다. 사제는 말할 것도 없고 군인들도 파견되었다. 강압적인 수단도 아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스텝 지역으로 농민들을 이주시키는 사민정책은 칼미크에 대한 압박을 일층 강화하였다. 러시아 농민들 뿐 아니라 독일에서 온 농민들도 볼가 강 주변에 정착하였다. 코사크 인들도 칼미크 지역으로 이주하여 자신들의 촌락을 세웠다. 외부에서 온 정착민들이 늘어나자 칼미크 인들의 유목 지역이 위축되었다. 그 결과 가축의 수도 줄게 되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러시아 차르 정부는 칼미크 인들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전방위 압박을 가한 것이다. 칼미크 인들 사이에서 러시아 정책을 놓고 다툼이 발생하고 또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러시아 도시들로 이주하는 사람들도 나왔다.
자타가 인정하던 계몽주의 군주였던 예카테리나 여제도 칼미크 인들의 고통에 대해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녀는 한걸음 더 나아가 칼미크 인들에게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1768-1774)에 2만의 기병을 파견하도록 요구하였다. 당시 부왕이었던 우바쉬 칸이 러시아의 이러한 과도한 요구에 항의하였지만 예카테리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바쉬 칸이 다스리던 10년 동안 칼미크 인들은 서른 두 번이나 전쟁에 동원되었으며 희생자만 해도 8만이나 되었다고 한다. (가오홍레이, p.703)
이러한 참담한 상황을 더 이상 감내할 수 없었던 칼미크 인들 사이에서 볼가 지역을 떠나 자신들의 고향 땅으로 돌아가자는 소리들이 터져나왔다. 강희제 때부터 청나라는 칼미크 인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일리 강이 흐르는 중가리아 초원지역으로 돌아가는 일은 물론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장정들만이 아니고 노인과 아녀자를 포함한 20만 이상의 사람들과 수백만 마리의 가축들을 데리고 만리나 되는 여정을 가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러시아 당국이 가만 놔둘 리도 없고 또 도중에는 칼미크 족과 사이가 나빴던 카자흐 족이 있었다.
그러나 칼리크의 지도자들은 러시아 땅을 떠나 자신들의 조상들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것을 결의하였다. 바로 중가리아였다. 천산 산맥 부쪽의 초원지대인 중가리아는 오이라트의 중가르 부가 세운 중가르 제국이 있던 곳이다. 그 얼마 전 청나라의 건륭제는 중가르 제국의 내분을 이용하여 중가르를 침공하였다. (1755) 청나라 군대는 중가르 유목민들이 저항하자 무자비한 학살을 감행하였다. 중가르인의 30 퍼센트가 학살되고 20 퍼센트는 인근의 카자흐로 도주하였으며 천연두로도 엄청난 수가 죽어 단 10 퍼센트의 주민만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p.208)
청나라는 풍요한 중가르 초원을 정복하였지만 그곳에는 사람이 없었다. 칼미크 인들은 이렇게 유목을 할 주민들을 필요로 하는 청나라와 접촉하였다. 건륭제는 칼미크의 제안을 환영하였다. 중국의 우호적인 입장 외에도 칼미크의 종교지도자인 라마도 이교도들의 땅을 떠나 라마교의 본산이 있는 티베트와 가까운 곳으로 이주하라고 격려하였다.
드디어 1771년 1월 5일 칼미크 족은 140여년 살아온 볼가 지방을 떠나 중가리아로 ‘민족대이동’을 감행하였다. 노약자와 아녀자를 포함 16만 8천 명이 움직였다고 한다. 칼미크 인들 모두가 길을 떠난 것은 아니다. 1만 5천 호는 남았다고 한다. 출발하는 날에 볼가 강이 얼어붙지 않아 강 서안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강을 건너 대열에 참여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하워드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토르구트 부족과 함께 볼가 지역에서 살고 있던 데르베트 부족 사람들이 중가리아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아 남았다는 것이다. (Howorth, p.575) 우바쉬 칸은 이들을 버려두고 출발하였다. 칼미크 무리는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위해 무거운 짐은 모두 버렸는데 심지어는 러시아 동전도 무더기로 버렸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볼가와 우랄 강 사이의 초원을 8일 만에 통과하였다. 뒤늦게 추격해온 러시아의 우랄 코사크 부대에 의해 1천 호 정도의 사람들이 붙잡혀 러시아로 돌아가야 하였으나 나머지는 큰 피해 없이 카자흐 초원으로 들어섰다. 추격해온 러시아 군대 그리고 카자흐 족과 싸워야만 하였다. 러시아 군대와의 싸움에서는 9천 명이 죽었다고 한다. 카자흐 초원에서는 카자흐 족 뿐 아니라 겨울의 맹렬한 추위도 무서운 적이었다.
큰 희생을 치르고 카자흐 초원을 지난 후 무리는 이르티쉬 강 상류를 거쳐 일리 강 지역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였다. 카자흐 족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대신 초원을 버리고 남쪽으로 험준한 계곡과 사막을 지나는 여정을 택했다. 사막을 지나면서 다시 한 번 많은 인명과 가축이 죽어나갔다. 엄청난 희생자를 내고서애 발하슈 호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수의 맑은 물로 기운을 다시 차린 무리는 7월 중순 마침내 중가리아가 시작되는 일리 강에 도달하였다. 7개월간의 여정을 끝내고 청나라 영역에 발을 디뎠을 때 남은 자는 6만 6천 명에 불과하였다. 무려 10만 명 이상이 중도에 희생된 것이다.
아바쉬 칸은 일리 강에 도착하자 중국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자신들은 러시아의 풍속이 다르다고 온갖 멸시를 받았는데 이제 귀순하니 받아달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사신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중국 조정은 러시아 측의 공문을 통해 이들이 오고 있음을 알았다. 칼미크 무리 사이에는 청나라를 배반하고 도망간 역적들도 있기 때문에 이주자 무리를 쉽게 받아주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건륭제는 칼미크 족의 귀환을 받아주기로 결정하였다. 건륭제가 파견한 사신 서혁덕은 일리 강변에서 우바쉬를 만나 건륭제의 서신을 전했는데 서신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너희들은 오랫동안 중가르에 거주하였으니 그 풍속이 러시아와 달라 안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오이라트 등이 짐의 은혜를 입어 처자식을 이끌고 중국에 귀순하니 실로 연민의 정이 일지 않을 수 없도다. 마땅히 빠른 시일 내에 안주할 곳을 마련할 것이다.” (《열하의 피서산장》, p.248.) 또 도망간 역적에 대해서도 죄를 묻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분명히 하였다.
건륭제는 참찬대신 서혁덕을 신장 일대를 관할하는 일리 장군으로 임명하여 토르구트 족의 안착을 위해 신속하게 옷과 가축, 곡식 등 생필품과 돈을 지급하게 하였다. 건륭제는 당시 더위를 피해 열하의 피서산장에 있었는데 이렇게 죽음을 무릅쓰고 무리를 이끌고 중국으로 온 우바쉬 칸과 주요 인사들을 산장으로 초대하여 환대하였다. 건륭제는 칼미크 인들이 자신의 덕을 숭모하여 돌아온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일리 지방에 칼미크의 ‘귀순’을 기념하는 비석을 네 가지 언어로 새겨 세웠다.
러시아는 칼미크 족이 아무런 통고도 없이 이주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돌려보낼 것을 청나라에 요구하였다. 러시아는 칼미크 인들의 귀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평화조약도 깨어질 것이며 백성들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그 위협에 굴복하지 않았다.
칼미크 인들은 자신들의 동족이 세운 중가르 제국을 무자비하게 무너뜨린 청나라의 품에 이렇게 안겼다. 그리고 일리 강 주변의 초원에 정착하여 청나라의 충성스런 백성이 되었다. 1860년대 신장 지역 일대에서 청나라의 지배에 대한 반란의 물결은 칼미크 인들과는 무관하게 지나갔다. 1880년대에 한 러시아 학자가 수집한 위구르 인들의 민요에는 칼미크 인들이 위구르 반도들을 잡으러 다니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황하에서 천산까지》, p.202) 다른 몽골 부족처럼 칼미크도 청나라 군대 속으로 편제되어 들어갔다. 칼미크는 청나라 속으로 흡수통합된 것이다. 현재 신강의 수도 우루무치 남쪽에 한반도의 두 배쯤 되는 엄청난 크기의 바인궈렁(巴音郭楞) 몽골자치주가 있다. 서양인들은 ‘바인골(Bayingol)’이라고 부르는데 이 몽골족 자치주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후 만들어진 것으로 토르구트의 옛 거주지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참고문헌
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사계절, 2016).
김호동, 《황하에서 천산까지》 (사계절, 1999)
가오홍레이 (김선자 역), 《절반의 중국사》 (메디치, 2017).
웨난 · 진위첸 (심규호 · 유소영 역), 《열하의 피서산장》 (일빛, 2005).
제임스 밀워드 (김찬영·이광태 역), 《신장의 역사》 (사계절, 2013).
Henry Howarth, History of the Mongols from the 9th Century to the 19th century. Part I, (18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