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이야기 제53회
오렌부르크 요새
푸가초프 반란(1773-1775)을 이야기로 다룬 푸쉬킨의 소설 《대위의 딸》은 명작들을 모아놓은 세계명작전집에 더러 들어 있다. 문학적 감수성이 둔해서 그런지 필자는 푸쉬킨의 이 소설은 그렇게 대단한 작품이라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차라리 푸쉬킨이 그 소설을 발표하기 전에 쓴 《푸가초프의 역사》(1833)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필자가 역사가라서 그런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인 진실을 추구하는 작가의 모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시인이었던 퓌쉬킨은 오렌부르크에 와서 1년간 머물면서 국가의 문서보관소에 소장된 푸가초프 관련 문서들 뿐만 아니라 목격자들의 증언과 구전 등도 조사하였다고 한다.
《대위의 딸》(1836)은 이 역사연구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소설은 그리뇨프라는 귀족출신의 한 젊은 장교와 작은 요새 사령관 딸인 마샤와의 사랑을 주제로 펼쳐진다. 어느 면에서는 이 작품은 멜로드라마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작품의 배경이 러시아사 최대의 민중반란이라 할 수 있는 푸가초프 반란이다. 심지어는 푸가초프는 이야기 전개의 중요 인물로 등장한다.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었던 주인공에게 길을 안내해주고 또 그 대가로 주인공은 그에게 자신이 아끼던 외투를 준다. 이렇게 우연히 만났던 두 사람은 반란이 일어나면서 다시 만나게 된다. 이번에는 작은 요새를 수비하는 주인공과 그 요새를 탈취하려는 반군 지도자 푸가초프로서. 요새는 함락되고 그리뇨프 소위는 처형될 운명에 처한다. 그러나 푸가초프가 그를 알아보고는 목숨을 구해준다. 푸가초프는 또 이 젊은 친구가 연적의 방해를 물리치고 연인 마샤와 맺어지도록 도와준다. 한마디로 러시아 군대 장교인 주인공에게 반군 지도자인 푸가초프는 생명의 은인이었던 것이다. 푸슈킨은 소설에서 푸가초프를 이렇게 따뜻한 인간으로 그리고 있다. 두 사람은 헤어지고 반란은 지속되었다. 주인공은 반란 수괴와의 의심스런 접촉을 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에 처해질 처지에 놓였으나 마샤가 우연히 만난 예카테리나 여제에게 읍소하여 주인공은 목숨을 구하게 된다. 한편 푸가초프는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후 모스크바에서 공개처형 되는데 처형장에서 주인공을 알아보고는 눈짓으로 인사를 한다.
푸가초프 반란은 야익 코사크의 반란으로 시작된다. 야익 코사크는 16세기 후반 러시아가 볼가 강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그곳에서 살던 돈 코사크, 타타르, 노가이 등 다양한 족속 출신의 사람들이 야익 강 주변에 정착하면서 형성된 집단이다. 이들은 주로 강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살았는데 값비싼 철갑상어가 이들의 주된 돈벌이 수단이었던 되었다. 야익 코사크는 이러한 어업권을 보장받는 대신 러시아 정부가 이따금씩 요구하던 병력 지원에 응하여 러시아의 비정규군 역할을 하였다. 러시아가 예카테리나 여제 시대에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을 하면서 이들에 대한 병력동원 요구가 늘어났다. 그런데 제대로 급료가 지불되지 않고 밀리는 경우가 많아 불만이 높았다. 그러던 참에 앞서 1771년 칼미크 족의 대탈주 사건이 일어났다. 러시아 당국은 야익 코사크인들에게 칼미크 족에 대한 추격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야익 코사크는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러시아 당국이 개입하여 명령을 거부하는 코사크들을 처벌하려 하자 코사크인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야익 코사크의 반란은 푸가초프라는 상상력과 카리스마가 넘치는 걸출한 지도자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1772년 첫 번째 봉기가 진압된 이후 통상적인 국지적 민중반란으로 끝났을 것이다. ????대위의 딸????에서는 매우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에멜리안 푸가초프는 돈 코사크 출신으로서 1773년 가을 야익 코사크 반군의 우두머리로 추대되자 스스로를 표트르 3세 황제라고 자칭하였다. 일반적으로 민중반란은 불법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민중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반란을 정당화할 필요성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좋은 방안이 억울하게 쫓겨났거나 처형된 황제를 참칭하여 민중을 위한 정치를 펴겠노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 역사에서는 이러한 참칭자들이 민중반란 시기에 여럿 출현하였다. 17세기 초 보리스 고두노프 황제 때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반 4세의 아들 드미트리 왕자를 자칭하는 여러 명이 차례로 등장하여 사람들을 미혹시켰던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표트르 3세는 1762년 황제 자리에 오른 후 반년도 되지 못해 쿠데타로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 살해되었다. 쿠데타는 왕비인 예카테리나가 사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자세한 사정은 한참 뒤에 알려졌는데 반란이 일어난 1770년대만 하더라도 표트르 3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명민한 푸가초프는 이 표트르 황제를 참칭하였는데 이러한 술책은 민중들에게 먹혀들었다. 표트르 황제는 죽은 것이 아니라 갇혀 있던 요새에서 도망쳐 나와 이제 요부 예카테리나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민중을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려 하니 민중들은 어서 자신이 이끄는 반군에 합류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푸가초프는 이렇게 가난한 농민들과 국영공장의 노동자들 및 농노들 뿐 아니라 비러시아계 유목민 집단들도 끌어들였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바슈키르 인들은 그들이 상실한 땅과 전통적 생활방식, 정치적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대거 반란에 가담하였다. 푸가초프의 반군은 순식간에 야익 강에서 볼가 강까지 러시아 초원지대를 지배하였다. 야익 강변에 위치한 러시아의 작은 요새들이 차례로 반군에 넘어갔다. 이러한 요새들에서 탈취한 총과 대포가 반군을 무장시켰다. 푸가초프는 곧 지역의 중심지인 오렌부르크에 주목하고 오렌부르크로 진격하였다. 1773년 10월부터 오렌부르크는 반군에 포위되어 외부로부터 식량을 조달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음 해 3월 오렌부르크 인근의 타티슈체프 요새 전투에서 반군이 크게 패하여 도주함으로 오렌부르크는 간신히 6개월 동안의 포위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푸가초프 반군은 오렌부르크 공방전에서 패한 후 모스크바 방향으로 방향을 틀어 볼가 강 연안의 요충지 카잔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774년 여름 푸가초프는 이곳에서도 참패하여 카잔을 버리고 이번에는 볼가 강을 따라 남쪽으로 도주하였다. 9월 볼가 강변의 차리친(오늘날의 볼고그라드)에서 싸우다가 부하들의 배신으로 러시아 군에게 넘겨졌다. 그는 모스크바로 압송되어 다음 해 초 처형된다.
푸가초프는 바슈키르 인들과는 달리 카잔의 타타르 족과 우랄 지역의 카자흐 족, 칼미크 족을 끌어들이는 데는 실패하였다. 카자흐족의 경우 반란을 이용하여 러시아 국경을 넘어 러시아 촌락들을 약탈하는 기회로 삼았다. 당시 러시아와 가장 국경을 많이 접하고 있었던 소 주즈의 누르알리 칸은 러시아 정부와의 우호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반란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오렌부르크 공성이 시작되자 푸가초프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반군이 오렌부르크에서 패배하여 도주하자 러시아 측에 협력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누르알리의 권위는 별 것이 아니었는지 일부 카자흐 부족들은 그의 변덕스런 태도에 상관없이 푸가초프 반군을 계속해서 도우고 러시아 지역으로의 원정을 감행하였다. 푸가초프가 야익 강 너머의 땅을 이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러시아 내부의 혼란을 틈탄 일부 카자흐 족의 러시아 약탈원정은 푸가초프 반란이 종식되어서야 멈추었다.
반란의 무대가 되었던 오렌부르크는 러시아가 아시아로 팽창하면서 세워진 도시로 다른 요새도시들에 비해서는 다소 늦은 1740년대에 세워졌다. 1734년 이반 키릴로프라는 정부 관리가 러시아 제국 팽창정책을 위해서는 야익 강변에 새로운 요새 도시를 세워야 한다는 건의를 올렸다. 애초에는 야익 강(우랄 강)과 오르 강이 만나는 곳에 세우려고 하였는데 원래 계획된 곳에서 250 km나 떨어진 하류 쪽에 세워졌다. 처음 계획된 곳은 봄마다 강이 범람하여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시 건설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또 건설책임을 맡았던 키릴로프가 작성한 보고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렌부르크 요새는 우랄 강 너머의 카자흐 인들을 러시아 신민으로 붙들어두고 그들을 원만하게 통치하기 위한 의도로 건립된 것이다. 키릴로프는 오렌부르크가 바슈키르 족과 카자흐 족 사이에 위치해 있을 뿐 아니라 볼가 칼미크와 바슈키르를 갈라놓을 수 있는 중간지점에 있다는 것 그리고 심지어는 오이라트와도 멀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오렌부르크의 가치는 그러한 지정학적인 장점에 그치지 않는다. 키릴로프는 이곳이 아시아와의 풍부한 교역이 이루어질 중심지라고 보았다. 히바와 부하라, 인도 상인들이 이국적인 물건을 갖고 이곳으로 몰려올 것이며 심지어는 아르메니아와 유럽의 상인들도 찾아올 것이라 하였다. 상트페테르스부르크가 서방으로 나아가는 문이라면 오렌부르크는 동방으로 나아가는 문이 될 것이다. 키릴로프는 또 주변 아시아 지역의 무한한 천연자원을 강조하였다.
당시 러시아를 통치하던 안나 여제는 키릴로프의 보고서에 담겨 있는 제안을 채택하고 계획실현을 위한 다양한 칙령들을 반포하였다. 예카테린부르크의 국영공장들은 대포와 탄약, 건축자재를 준비하고 우파(Ufa)의 총독은 건설단을, 아스트라칸 총독은 군대를 파견해야 하였다.
오렌부르크가 세워진 땅은 바슈키르 족의 땅이었다. 바슈키르 땅에 살던 비러시아계 족속들이 동원되어 건축 노동을 제공해야 하였다. 불만이 높을 수밖에 없었던 바슈키르 인들은 1736년 오렌부르크로부터 사마라 강변의 요새선이 완성되면서 자신들이 러시아 군대와 이주민들에 의해 포위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바슈키르족이 여러 차례 봉기를 일어난 것은 이러한 위기감 때문이었다. 바슈키르 족이 푸가초프 반란에 대거 가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강 너머의 카자흐 칸들은 달랐다. 그들은 오렌부르크 요새 건설부터 환영하였다. 오이라트와 바슈키르의 공격으로부터 더 안전해졌을 뿐 아니라 교역으로 인한 이익도 더 늘어날 것으로 믿었다. 그들은 바슈키르 족이 반란을 일으키면 러시아 군대를 적극 돕겠다는 약속도 하였다. 실제로 1736년 소 주즈와 중 주즈의 카자흐 족이 바슈키르 땅으로 약탈원정을 하여 많은 바슈키르 인들을 죽이고 생포하은 일도 벌어졌다. (코다르코프스키, 159)
푸가초프 반란의 무대가 되었던 야익 강은 지금은 우랄 강으로 불린다. 푸가초프 반란이 끝난 후 그 사건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예카테리나 정부는 강 이름을 우랄 강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 반란이 시작된 야익 코사크들의 도시 야이츠크 고로도크 역시 이름이 바뀌어 ‘우랄스크’가 되었다. 오늘날 카자흐스탄의 도시 ‘오랄’이 바로 이 도시이다. 1991년 소련이 무너지고 카자흐스탄이 독립하면서 러시아식 이름을 오랄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소련 붕괴 후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모두 민족주의적 경향을 띠었는데 카자흐스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오랄이라는 도시 이름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바뀐 것일 터이다. 참고로 하나 덧붙이자면 러시아인들은 전통적으로 우랄 산맥을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경계로 생각하였다. 그 남쪽 초원을 흐르는 우랄 강 역시 그와 같은 경계의 하나였다. 초원을 흐르는 이 강 너머에는 바로 아시아 유목민인 카자흐 족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침고문헌
Alexander Pushkin (Earl Sampson tr.) The History of Pugachev (Phoenix, 2001).
M. Khodarkovsky, Russia’s Steppe Frontier (Indiana University Press, 2002).
Isabel de Madardiaca, Catherine the Great. A Short History (1990, Yale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