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이야기 54회
러시아 제국의 카자흐 스텝 지배
카자흐스탄 지역은 엄청 광대한 지역이다. 한반도의 12배가 넘는 면적으로 그 위치도 러시아 카라반이 페르시아, 인도, 중국, 중앙아시아 칸국들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러시아 카라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카자흐 초원을 장악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정의 고민은 카자흐 칸들을 여러 가지 외교수단들을 통해서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어 놓아도 그들의 권위가 카자흐 인들 사이에서 확실하게 확립되어 있지 못했다는 점이다. 카자흐 칸들이 중가르 등 외적들의 위협 때문에 러시아의 도움을 요청함에 따라 카자흐 칸국들이 러시아의 보호령이 되었다는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 하였다. 그러나 카자흐 내정에 대한 러시아의 개입과 간섭은 카자흐 인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푸가초프 반란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여러 반란들은 러시아의 간섭과 지배에 대한 반제국주의 저항을 성격을 띠었다. 물론 이러한 저항은 카자흐 칸국들 내부에서 권력투쟁과 결합되었다. 칸의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는 러시아의 지배에 반대하는 기치를 내걸고 친러시아파 칸에 대항하였다.
러시아는 결국 칸 제도 자체를 폐지해 버렸다. 칸 제도 자체가 러시아의 지배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주즈와 중주즈에서 1820년대에 칸이 사라졌다. 이제 러시아는 자신들이 원하는 권력제도를 만들어 그것을 카자흐 인들에게 강요하였다. 러시아 당국은 여러 단계의 행정단위들을 만들었다. 가장 하위에 있는 것이 ‘아울’로서 카자흐 유목민들이 보통 유목활동을 함께 하는 단위로서 15개 가구 정도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아울들을 10여개 모아놓은 것이 ‘볼로스트’이다. 볼로스트는 아울의 촌장들에 의해 선출된 귀족신분의 술탄이 우두머리가 되어 다스렸다. 볼로스트를 20 개 정도 묶어 ‘오크룩’을 만들었는데 볼로스트는 우리나라의 면이나 읍, 오크룩은 군에 상당한 행정단위가 될 것이다. 오크룩에는 선출직 술탄이 러시아 파견위원 2명과 카자흐 인 선출직 위원 2명과 함께 합의체를 구성하였는데 이 위원회(프리카즈)에서 재판권을 행사하였다. 러시아 당국은 카자흐 인들에게 볼로스트 수준까지는 자치를 허용하고 오크룩 차원에서는 러시아인을 파견하여 행정을 통제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정연하고 합리적인 행정체계를 제시한 인물이 미하일 스페란스키 백작(1772-1836)이다. 스페란스키는 알렉산드르 1세의 총신으로서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법률위원장도 맡아 러시아를 명실상부한 법치국가로 만들려 한 인물이다. 그는 러시아를 볼로스트의 두마(의회)로부터 시작하여 국가 차원의 두마까지 만들어 인민의 대의가 정치에 반영되도록 정치개혁안을 제시하였는데 19세기 러시아는 그의 이러한 개혁안을 뒤늦게야 하나씩 실현하였으니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 그는 많은 정치가들과는 달리 귀족출신이 아닌 평민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자유주의적 개혁을 추진하자 보수파 귀족들이 견제하여 중앙관직에서 밀려나 1819년 시베리아 총독에 임명되었다. 다시 중앙으로 불려 올라간 1821년 까지 몇 년 동안 그는 카자흐 유목민들의 세계와 접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카자흐 유목민 사회의 통치를 위한 초안도 제시하였는데 러시아 제정의 카자흐 통치를 위한 법적 토대가 되었다.
스페란스키 개혁안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 스텝 지역의 토지문제에 관한 부분이다. 그는 스텝의 토지는 국유라고 선언하고 스텝의 국유지를 카자흐 인들에게 공동으로 이용하도록 만든다는 원칙을 확립하였다. 볼로스트는 상부로부터 목지를 할당받고 볼로스트는 다시 그 밑의 아울들에게 목지를 할당하며 아울의 촌장은 각 가구에 그것을 할당한다. 유목민들은 특별한 허락이 없는 한 그들이 속한 볼로스트의 경계를 넘어설 수 없다. 이러한 제도는 체계적인 행정제도에 입각한 토지의 할당방식이기는 하지만 하영지와 동영지 사이의 거리가 수백 km에 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카자흐 유목민들의 관습적 이동 형태는 이러한 제한과는 맞지 않았았다.
스페란스키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카자흐 유목민들을 정착시켜 농민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농업을 원하는 유목민들에게는 40 에이커의 토지를 준다는 것이었다.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사유재산으로 국가가 농지를 나눠주는 것이다. 40 에이커라면 우리나라에서 흔히 사용하는 단위로 따져 거의 5만 평에 달하는 면적이다. 당시 유목민들의 유목지가 부족한 것이 큰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이 때문에 스페란스키의 안에 호응하여 러시아와의 국경선 근처에 정착하여 농민이 된 사람들도 나왔다.
스페란스키 백작의 개혁안은 장기적으로 보자면 카자흐 유목사회를 해체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더욱이 러시아 당국이 코사크 인들과 러시아인들을 비롯한 비유목민들을 불러들여 농업을 권장하면서 그 위축은 가속화하였다. 농장이 생겨나면서 유목로를 막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러한 러시아 당국의 토지정책과 식민정책은 카자흐 인들에게도 큰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카자흐 인들에게는 러시아가 자신들의 땅을 빼앗고 자신들의 전통을 짓밟는 것으로 여겨졌다. 러시아인들이 새로운 행정체계에 입각하여 카자흐 인들에게 과하는 세금도 불만에 일조하였다. 카자흐 인들이 겪고 있는 빈곤도 러시아의 지배가 초래한 것으로 여겨졌다. 1830, 40년대 카자흐 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케니사리 카시모프(카자흐 어로는 케네사리 카심)의 반란도 이러한 다양한 불만을 배경으로 하여 나온 것이다. 중주스의 아블라이 칸의 손자로서 중주스 칸국을 부활시키려고 한 그는 중주스 뿐 아니라 당시의 모든 카자흐 집단의 지지를 받았다. 사후에도 카자흐 인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오늘날 대부분의 카자흐 인들은 그를 카자흐 민족운동의 선구자로 숭상하고 있다. 카시모프는 1844년 압도적인 러시아 군에게 패배한 후 중주스를 떠나 키르키즈 인들에게로 갔다. 그곳에서 1847년 키르키즈 인들과 함께 코칸드 칸국의 지배에 대항하여 싸우다 전사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Martha Brill Olcott, The Kazakhs (Hoover Institution Press,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