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 속의 신비의 인물 멜기세덱
기독교 구약성서의 〈창세기〉는 크게 나눠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지창조로부터 대홍수에 이르는 창세역사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즉 족장들(patriarchs)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창세기〉의 전체 50개 장 가운데 11장부터가 모두 아브라함, 이삭, 야곱 삼대에 걸친 족장들 이야기이다. 그 첫 번째 인물인 아브라함은 원래는 팔레스타인 사람이 아니다. 그는 수메르 문명이 태동하였던 도시국가 가운데 하나인 우르 출신이다. 〈창세기〉에 의하면 그는 야훼 신의 부름으로 우상숭배가 만연하던 수메르 땅을 떠나 자신과 후손에게 복을 내리겠다는 야훼의 약속만을 믿고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이러한 믿음 때문에 기독교도들은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받들고 있다.
아브라함은 혼자서 이주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처는 말할 것도 없고 부친 데라와 동생 하란, 조카 롯 등 일가가 모두 이주한 것이다. 도중에 동생인 하란과 부친 데라가 죽었으니 이주도 몇 년에 걸린 것으로 보인다.
아브라함 일가는 가축을 키우는 유목민이었다. 한 곳에 정착해 사는 것이 아니라 초지를 따라 이동하였는데 남쪽으로 이동하다가 팔레스타인 땅에 기근이 크게 들자 이집트로 내려갔다. 이집트는 나일 강이 매년 규칙적으로 범람하기 때문에 기근 걱정이 없는 나라였다. 아브라함은 이집트에 체류하는 동안 이집트 왕으로부터 많은 가축과 노예를 얻어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집트 왕 바로가 사라가 아브라함의 처라는 것을 모르고 아리따운 사라를 취하려고 하다가 그만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아브라함에게 크게 보상을 해주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후 상당히 큰 전쟁이 있었다.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기록인데 엘람 왕에 대해 팔레스타인의 여러 왕들이 싸운 전쟁이다. 당시 이란 지역에 근거를 두고 있던 엘람 왕국의 왕 그돌라오멜은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지배하였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던 소돔, 고모라 등의 소왕국들이 그돌라오멜의 지배에 반기를 든 것이다. 그돌라오멜과 그 휘하의 동맹국 왕들이 반란 세력을 응징하기 위해 팔레스타인까지 온 것인데 이들은 소돔 지역에 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 집안사람들 및 소유물을 모두 사로잡아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집안의 종자들 318 명을 거느리고 약탈자들을 쫓아갔다고 한다. 그돌라오멜과 그 동맹왕들을 시리아 땅의 다마스쿠스 근처까지 추격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롯과 그 식구들을 구해왔다는 것이다. 삼백 명 가량의 인원으로 엘람 연합군을 격파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기록이지만 구약성서에는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만 지적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그런데 아브라함이 승전해서 돌아오자 소돔 왕도 영접하러 나왔을 뿐 아니라 멜기세덱이라는 인물도 환영하러 나왔다. 〈창세기〉에 의하면 그는 ‘살렘 왕’이자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제사장’이라고 하였다.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갖고 아브라함을 맞으러 나와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고 한다. 빵과 포도주는 아브라함과 그 가신들을 대접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식사대접 뿐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엘 엘뤼온)의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은 자신이 적들에게서 빼앗은 물건의 1/10을 멜기세덱에게 바쳤다. 혹자는 이것이 십일조의 기원이라 주장하는데 후대 모세에 의한 십일조 계율이 제정되기 전의 일이라 이러한 주장은 의심스럽기도 하다.
살렘이 예루살렘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에 예루살렘이라는 나라가 있었던 것 역시 확실하지 않다. 예루살렘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BCE 1350년경의 엘 아마르나 문서로서 이집트의 파라오 아케나톤과 예루살렘 총독 사이의 외교서신이다. 아브라함이 실존인물이라면 아브라함의 생존시기는 그보다 수백년 이전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살렘을 지역으로 보지 않고 ‘평화’로 해석하기도 한다. 샬렘이 평화 혹은 평강을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 해석에 따르면 멜기세덱은 어느 지역의 왕이 아니라 사제였다. 후대의 유태인들은 멜기세덱을 아론의 후손들이 맡았던 일반적인 제사장과는 다른 부류의 특급제사장으로 생각하였다. 다윗 왕이 지은 시에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시편 110:4) 여기서 반차班次는 히브리어로 ‘알 디베라티’인데 그리스어 역에서는 계급을 뜻하는 ‘타크신‘으로 번역하였다. ’멜기세덱의 반차‘라는 말은 결국 멜기세덱이 일반 제사장보다 훨씬 높은 계급의 제사장임을 뜻한다. 이러한 관념은 신약성서의 〈히브리서〉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예수를 일반 제사장과는 다른 멜기세덱의 반차에 속하는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신약성서 가운데서 신학적 논문의 성격을 띤 〈히브리서〉의 저자는 멜기세덱에 관한 설명이 어렵다는 말을 하면서 멜기세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느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7:2-3)
하느님의 아들도 아닌데 하느님의 아들과 비슷한 존재이니 보통 제사장과는 급이 다른 것이다. 예수가 바로 이러한 멜기세덱 급의 제사장이라고 〈히브리서〉 저자는 뒤에서 말한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가 멜기세덱을 일컬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는’ 영원한 천상의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중세 유럽의 한 연대기에서는 이 멜기세덱을 아비와 어미가 있는 인간으로 제시하였다. 7세기 이집트의 니키우 주교였던 요한이라는 사람이 쓴 연대기이다. 이 책은 원래는 그리스어로 씌어지고 (당시 이집트는 비잔틴제국의 영토였다) 아랍인들에 의해 정복된 이후에는 아랍어로 번역되었다가 다시 근대에 와서 아랍어에서 에티오피아어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현재 그리스어본이나 아랍어본은 사라졌고 에티오피아어본만이 남아 있어 이 판본으로부터 1916년 영역본이 나왔다.
니키우 주교의 연대기는 모두 122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세 시대의 많은 연대기들처럼 인간의 창조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태고 시대에 관한 서술에서는 구약성서의 이야기 뿐 아니라 그리스와 로마, 이집트의 신화와 전설들도 대거 동원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흥미롭다. 저자가 그냥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을 그대로 베껴놓았거나 요약해 놓았더라면 이 연대기의 가치는 훨씬 떨어질 것이다.
멜기세덱에 관한 서술은 제28장에 나온다. 구약성서에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고 한 것은 그가 아브라함 일가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러나 실은 이집트 왕가 출신이었다. 즉 멜기세덱의 선조는 이집트에서 온 셈인데 시두스라는 인물로 가나안 땅을 다스렸다고 한다. 시두스는 페니키아의 도시 시돈을 건설하였다고도 한다. 가나안인들이 그러하듯 멜기세덱의 부모는 모두 우상숭배자였다. 즉 가나안의 여러 신들을 숭배하였다. 멜기세덱은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부모를 비난하고 가출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의 사제가 되었다. 그리고 왕으로서 가나안인들을 다스렸다. 골고다 언덕에 시온이라는 도시도 세웠는데 이 도시는 ‘평화’를 의미하는 살렘이라고도 불렸다. 니키우 주교의 연대기에 의하면 그는 살렘을 113년이나 다스리다 죽었다.
니키우 주교는 왕이면서 제사장이었던 이 멜기세덱이 최초로 하느님에게 빵과 포도주를 제물로 바친 사람이라고 그 공덕을 찬양하였다. 즉 동물을 죽여 그 피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빵과 포도주라는 제물, 즉 평화의 제물을 바쳤다는 것이다.
멜기세덱이 시돈 왕가로부터 나왔다는 이야기는 니키우 주교의 연대기보다 근 한 세기 반 이전에 편찬된 시리아 출신의 요한 말라라가 남긴 연대기에도 나온다. 중세 유럽인들 사이에서 멜기세덱은 시돈 왕가 출신으로서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진정한 하느님을 숭배한 믿음의 영웅이자 평화의 왕으로 여겨졌던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