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인들의 뿌리 오구즈 족
돌궐 제국은 한 때는 몽골 초원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카스피 해 연안까지 지배한 대제국이었다. 그러나 돌궐 제국은 6세기 중반에서부터 8세기 중반까지 200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것도 659년부터 682년까지 20여 년 동안은 국가가 사라지고 당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단명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돌궐 제국은 지속적인 국가로 남는 데는 실패하였던 것이다.
돌궐 제국에 비하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오스만 베이라는 셀주크 제국의 한 지방 영주에 의해 건국된 1299년부터 일차대전 직후인 1923년까지 무려 600년 이상 지속하였다. 더욱이 오스만 제국은 망하기는 하였지만 오늘날의 터키 공화국으로 이어졌다.
오늘날의 터키인들은 자신들이 오구즈 투르크족의 후예라고 한다. 오구즈 투르크는 누구인가? 오구즈 투르크에 대한 기록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먼저 고대 돌궐비문에 보면 오구즈는 돌궐의 적으로 등장한다. ‘토구즈 오구즈’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9개의 부족연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토구즈는 9를 의미한다. 아홉 부족 가운데 하나가 위구르족의 조상인 ‘회흘回紇’이었다. 회흘은 오구즈 부족연합을 주도한 집단이다.
이 회홀의 주도로 744년 돌궐제국은 멸망한다. 그리고 위구르 제국이 그 뒤를 이었다. 어느 면에서 보면 돌궐제국은 위구르 제국으로 그 이름만 바뀌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배집단만 돌궐에서 위구르로 바뀐 것일 따름이다. 위구르 제국은 840년 같은 유목민인 시베리아의 키르키즈인들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위구르 제국의 붕괴는 커다란 민족이동의 물결을 일으켰다. 위구르인들은 키르키즈의 살육을 피해 일부는 남쪽 타림분지의 투르판으로, 또 다른 일부는 중국에 더 가까운 감숙 지역으로, 또 다른 일파는 오르도스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 지역들은 당시 모두 당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지역이다. 남쪽의 중국으로만 간 것은 아니었다. 서쪽으로 간 사람들도 있으니 이른바 중국 사서에서 말하는 ‘총령서회골葱嶺西回鶻’이다. 총령은 파미르 고원을 말하는데 이들은 파미르 고원 주변에 자리 잡았던 것이다. ‘카라한’이라는 나라는 바로 이들이 세운 나라였다.(존속기간 840-1212) 오늘날 중국 신강지역의 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카슈가르가 이 나라의 수도였다. 중국인들은 카슈가르를 카스喀什라고 줄여서 부른다.
9세기 초에는 아랄 해 근처에서 또 다른 오구즈인들에 의해 한 나라가 세워졌다. 이 나라는 역사학자들이 ‘오구즈 야브구 국가’라고 하는데 그 우두머리가 자신을 칸으로 내세우지 않고 한 단계 낮은 야브구라는 칭호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예전 돌궐제국은 영토를 동서로 나눠 통치하였는데 동쪽의 왕은 ‘카간’, 서쪽의 왕은 적어도 초기에는 부왕이라는 뜻의 ‘야브구’라는 칭호로 만족하였다. 오구즈 야브구라는 칭호는 오구즈인들의 서돌궐 제국 계승 의식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돌궐제국이 위구르인들에게 망할 때 위구르인들은 카를룩, 바스밀과 손을 잡았다. 두 부족 모두 투르크계에 속하는 유목민들이었다. 위구르 왕은 카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던 반면 카를룩은 야브구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아 위구르(회흘, 회골)가 돌궐에 대한 반란을 주도하였으며 카를룩 부족에 대해 우위에 섰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둘 사이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카를룩의 우두머리도 카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위구르의 지배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8세기 중반 돌궐제국의 붕괴로 초래된 초원지대에서의 혼란은 돌궐제국의 탄생지였던 몽골 초원에서부터 시작되어 그 여파가 서쪽으로 확대되었다. 몽골 초원에서부터 카자흐 초원지역으로 다시 카자흐 초원에서 아랄 해 인근 초원지대로의 유목민 집단의 연쇄적 이동이 일어났다. 카를룩인들은 카자흐 초원과 천산 산맥 서쪽에, 오구즈인들은 아랄 해 근처의 초원에 자리 잡았다. 당시 이곳에는 페체네그인들이 있었는데 페체네그인들은 오구즈의 압박으로 그곳에서 쫓겨나 서진하여 흑해 북안의 초원지대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일대로 도주하였다. 페체네그인들은 그곳에 살던 마자르인들을 밀어내었다. 몽골 초원에서 시작된 유목민족들의 연쇄적인 이동의 물결이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을 밀쳐내듯 일어났던 것이다.
오구즈는 아랄 해 근처에 정착한 후 카자르 제국에 신속하였다. 역시 투르크계였던 카자르의 왕은 카간을 칭하고 있었다. 오구즈의 우두머리는 야브구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카자르 제국은 965년 키예프 루스의 공격으로 망했는데 전쟁의 계기는 크림반도의 고트족에 대한 카자르 제국 산하 유목민들의 약탈 공격이었다고 한다. (The Russian Primary Chronicle, 240쪽) 크림반도는 당시 비잔틴 제국의 영토이기는 하였지만 비잔틴 제국이 아랍과의 전쟁에 몰두해 있던 터라 고트인들은 주변의 신흥 강자인 키예프 공에게 보복을 호소하였던 것이다. 중앙아시아사 대가인 피터 골든 교수에 의하면 965년 키예프의 카자르 원정에 오구즈인들이 루스인들 편에 서서 참전하였다고 한다. 이는 카자르 제국과 오구즈족 사이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분쟁이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카자르 제국은 그 이전에 오구즈와 손을 잡고 페체네그인들을 흑해북안으로 쫓아내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둘 사이의 관계가 적대적으로 변한 것이다.
셀주크 제국을 세운 셀주크 족도 이 오구즈 집단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셀주크 제국을 세운 셀주크 베이는 원래는 오구즈 야브구 밑의 장군이었으나 둘 사이의 관계가 나빠지자 호레즘 왕국의 젠드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셀주크와 그가 이끈 집단은 향후 이슬람의 전사(‘가지’라고 한다)로서 주변의 이교도들과의 성전에 앞장섰다. 셀주크의 아들들과 손자들은 이란의 동부 지역인 호라산의 가즈나 왕국을 차지하고 셀주크 제국의 건설을 선포하였다.(1037) 이들은 그 여세를 몰아 시아파 부이 왕조의 지배하에 있던 바그다드의 칼리프의 요청을 받아들여 바그다드를 해방하고 술탄이라는 칭호를 얻어내었다.(1055) 또 비잔틴 제국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아나톨리아 반도로 들어가는 길목을 확보하였다. (1071년 만치케르트 전투)
이후 오구즈인들은 비잔틴 제국의 영토 내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슬람 초기부터 이교도 투르크인들과 접촉하여 왔던 아랍인들은 이들 회교도가 된 오구즈인들을 ‘투르코만’ 혹은 ‘투르크멘’이라 불렀다. 투르크인과 비슷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비잔틴인들도 처음에는 오구즈인들을 ‘우조이’라고 했지만 점차 아랍인들을 따라 투르크멘으로 이들을 부르게 되었다. 오늘날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메니스탄 공화국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즈베크인들, 터키인들 모두 자신들이 투르크멘의 후손이라 여기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투르크멘 즉 오구즈족은 오구즈 칸이라는 인물에서 나왔다고 믿는다. 오구즈 칸에 대한 기록은 라시드 앗 딘의 사서를 비롯한 여러 역사서에 나온다. 오구즈 칸의 계보에 관한 이야기는 투르크인들의 뿌리 역사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주기 때문에 상당히 흥미롭다. 그에 따르면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셋째 아들 야벳에게서 투르크족이 나왔다. 여러 족보에 등장하는 아불제 칸이 바로 이 야벳과 같은 인물로서 그는 동쪽으로 가서 유목민이 되었다고 한다. 아불제 칸의 손자가 오구즈 칸이다. 오구즈 칸은 태어나면서부터 알라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의 부친과 삼촌들을 포함한 일가는 모두 이교도였다. 오구즈 칸이 장성하자 알라 신에 대한 신앙 은 일족 사이에 심각한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오구즈 칸은 전통적인 신앙을 버렸다는 이유로 자신을 죽이려고 한 부친 카라 칸과 대립하였다. 양측은 이 때문에 75년간 전쟁을 하였다고 하는데 카라 칸은 이 전쟁에서 전사하였다. 전쟁에서 이긴 오구즈 칸은 탈라스로부터 부하라까지의 땅을 자신의 영토로 삼아 다스렸다. 그는 전쟁에서 자신의 편에 섰던 여러 종족들과 친척들에게 ‘위구르’라는 명칭을 내려주었는데 그 뜻은 투르크어로 ‘연합하다 , 도움을 주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몽골과 투르크 종족들의 뿌리 역사를 기록한 라시드 앗 딘은 위구르 종족은 모두 그들의 후손이라 하였다. (《부족지》, 1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