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왕가를 통해서 본 세계사
2. 티롤을 얻고 스위스를 잃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루돌프 1세가 황제에 선출된 것을 계기로 오스트리아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앞에서 말한 오스트리아 공작령과 카린티아 공작령, 스티리아 공작령, 그리고 카르니올라 공작령이 그것이다. 지도를 보면 북쪽의 오스트리아 공작령으로부터 남쪽으로 차례로 스티리아, 카린티아, 카르니올라가 위치해 있다. 카르니올라는 오늘날 슬로베니아 영토에 속해 있지만 그것은 일차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이 패하면서 떨어져나갔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 지방들 외에 티롤을 1364년 획득하게 된다. 티롤은 현대 독일의 남단을 차지하고 있는 바이에른 주와 붙어 있다. 14세기 당시 티롤 백작이 지배하던 영토는 알프스의 중요한 고개 가운데 하나인 브렌너 고개 너머까지 펼쳐져 있었다. 소위 남티롤 지방이다. 트렌토 공회의가 열린 트렌토라는 도시도 이 남티롤에 위치해 있다. 그러니까 14세기 티롤 백작령은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티롤과 이탈리아 티롤로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티롤 지방을 통치하던 마인하르트 가문이 절손되는 바람에 여자 하나만 남게 되었다. 마르가레트라는 여자였는데 정치적 수완이 상당하여 티롤에 대한 통치권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이름이 마인하르트 3세)이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죽었다. 결혼은 했지만 후사가 없었다. 당시 대부분의 유력가문이 그러하듯 이 아들도 어려서 합스부르크 가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름도 자기 엄마와 같은 마르가레트였는데 오스트리아 공작 알베르트 2세의 딸이었다. 티롤 여공작 마르가레트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사돈 관계였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바이에른 가문에서 이 티롤 지방을 노리고 심지어 군사적 침략까지 감행하였기 때문에 마르가레트는 사돈 가문인 합스부르크 가의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4세에게 티롤 백작령을 양도하는 계약을 맺게 되었다. 그리하여 티롤 백작령은 1364년 합스부르크 영토가 되었다.
티롤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방이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북유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인 브렌너 패스가 있을 뿐 아니라 남부 독일 및 스위스와도 접해 있다. 즉 중요한 통상로 상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티롤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도약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15세기 말 막시밀리안 황제는 이 티롤의 인스브루크를 수도로 삼고 이곳에 왕궁을 세웠다. 인스브루크는 이 시기부터 유럽의 정치와 문화의 한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다. 볼만한 유적들이 많을 뿐 아니라 알프스 산맥 자락에 위치해 있는 이 도시의 자연환경 때문에 인스브루크는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그림1 인스브루크 왕궁 정원
그림2 인 강과 옛날 목조 다리
그림3 시내에서 본 알프스 산지
그림4 인스브루크 왕궁
그림5 인스브루크 왕궁교회에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 영웅들의 청동상
그러나 티롤을 얻은 반면 합스부르크 가문은 14세기에 그 원래의 근거지였던 스위스에서는 쫓겨났다. 스위스인들의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투쟁이 오늘날의 스위스라는 나라를 태동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원래 스위스는 신성로마 제국에 속해 있는 땅으로서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향하는 통상로에 위치한 덕택으로 바젤이나 취리히 등의 도시들이 발전하였다. 알프스 계곡의 여러 농촌 공동체들(코뮌)이 자신들의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한 동맹들을 형성하면서 이러한 도시들과 손을 잡게 되었다.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오스트리아에서 권력을 쌓아가던 14세기 때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알프스 계곡의 농촌 공동체인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의 세 공동체가 상호서약을 통해 일종의 선서공동체를 만들었다. 상호간에 평화를 유지하며 갈등이 일어나면 외부에 호소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중재와 재판을 통해 해결한다는 선서를 함으로써 성립한 집단이었다. 후일 이러한 공동체가 칸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칸톤들이 모여 스위스라는 나라를 이루게 된다.
우리를 비롯한 위의 세 공동체들이 처음으로 서약공동체를 형성한 것이 1291년이었으니 앞에서 본 루돌프 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이 농촌공동체들은 그 이전부터 합스부르크 백작을 자신들의 영주로 섬기고 있었다. 그런데 사소한 갈등으로부터 합스부르크 가와 스위스인들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영내의 한 수도원과 슈비츠 공동체 사이에 방목지를 놓고 일어난 갈등에서 합스부르크 가의 레오폴트 공작(레오폴트 1세)이 군대를 동원해서 슈비츠를 공격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황제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라이벌 관계였던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의 루트비히 4세(재위 1314-1347)였다.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하는 스위스 공동체들을 옹호하여 그들의 자유를 인정해주었다. 레오폴트 공작이 스위스인들에 의해 쫓겨난 1315년의 모르가르텐 전투를 역사가들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으로 본다. 봉건영주 세력에 대항하여 일어난 농민들이 싸워서 승리한 것이다. 이후 스위스 지역에서는 공동체들 사이의 동맹 체결이 더 활발하게 일어났다. 뤼체른 같은 도시도 농촌 공동체들의 동맹에 가담하여 합스부르크 가의 지배에 도전하게 되었다. 당시 도시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계층간, 당파간의 투쟁도 합스부르크 가의 지배를 약화시켰다. 예를 들어 취리히 시에서는 14세기 중반 도시혁명이 일어나 수공업 장인들의 길드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이들은 상인계급과 대립하였는데 상인들이 합스부르크 가문을 지지하였던 터라 취리히의 수공업 길드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황제 루트비히 4세에게 기대었다. 따라서 취리히 시와 합스부르크 가문과는 적대적인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스위스 도시들과 농촌공동체는 주변의 영주권을 사들여 힘과 영역을 확대해갔다. 예를 들어 우리(Uri) 코뮌의 경우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중요한 고갯길인 고타르 패스를 손에 넣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에 두고자 한 곳이었는데 이러한 전략적 요충지가 농민들 수중으로 넘어간 것이다. 1365년에는 슈비츠 공동체가 주변의 주크 공동체를 점령하고 강제로 동맹에 가담하게 만들었다. 뤼체른 같은 도시는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파견한 관리와 충돌을 빚었다. 뤼체른인들은 주변의 합스부르크 영지를 공격하고 그 주민들에게 도시의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이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민의 지위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당시 형인 알베르트 3세가 오스트리아 쪽 영토를 통치하고 동생인 레오폴트 3세가 스위스 영토를 다스리기로 되어 있었다. 또 최근에 획득한 티롤은 두 사람이 공동으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스위스인들이 합스부르크의 지배에 대해 반기를 들자 결국 합스부르크 가문의 스위스 영토를 담당하던 레오폴트 3세가 군대를 이끌고 뤼체른을 공격하였다. 뤼체른과 그 동맹 공동체들은 이 레오폴트 공작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레오폴트 공작도 전사하였다. 1386년 젬파흐 전투이다. 그 직후에는 아펜젤의 농민들이 귀족들과 그를 후원하는 합스부르크 군대와 싸워 승리하였는데 이러한 농민군의 승리는 스위스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어 마치 반봉건 농민전쟁과 같은 양상을 띠었다.
아르가우는 라인 강 상류의 한 지류인 아르 강 주변 지역으로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직할영토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원향인 합스부르크(하비츠부르크) 성도 이곳에 있다. 15세기 초에는 서유럽의 가톨릭 교회가 분열되어 여러 교황들이 자신이 정통이라고 우기면서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태를 종식시키고 단일한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룩셈부르크 가의 지기스문트(재위 1411-1437)가 나섰다. 합스부르크 가문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가 소집한 콘스탄츠 공회의의 소환요구에 세 명의 교황 가운데 한 사람이 소환요구에 불응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가 있던 아르가우 지역으로 도주하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의 공작 프리드리히 4세가 그 피신을 도왔다는 것이 밝혀지자 황제는 영을 내려 프리드리히는 범법자이며 그 영지는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공작의 영토를 점령해도 죄가 되지 않았다. 스위스 칸톤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르가우를 점령하였다. 인접한 베른 시를 비롯한 스위스 칸톤들은 이 아르가우를 마치 봉건영주가 자신들의 영지를 통치하듯 대리인(‘란트보크트’라 하였다)을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많은 수입을 가져다주지는 않았지만 이 아르가우 지역에 대한 통치를 위해서 당시 스위스의 일곱 칸톤의 대표들이 주기적으로 회합해야 하였다. 이것이 스위스 민주주의의 기원이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는 이후 스위스에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그들의 남은 영지는 섬과 같이 띄엄띄엄 고립된 상태로 남았다. 오스트리아로부터 스위스에 걸친 단일한 통합영토를 만들어내려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도는 이렇게 스위스인들의 저항 앞에서 좌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면에서 보자면 스위스에서 내쫓기는 바람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 땅에 관심을 집중하여 그곳을 바탕으로 유럽의 제일가는 왕가로 발전할 수 있었던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