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 그들의 깊은 사유와 ‘웃픈’ 삶 3 쿠사누스 (3)
3. 모르지만 알고 알지만 모른다
공회의에는 불길한 징후가 감돈다. 개혁주의 진영은 면죄부 장사, 성직자들의 타락 그리고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서 나타나는 재앙에 가까운 성직자들의 교양의 위기 등을 혁파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들이 내건 파격적인 요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톨릭교회에게는 부담이 되고 있는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는 것이다. 교황의 권력에 대한 문제이다.
니콜라우스는 개혁주의자들의 편에 가담한다. 그는 언변과 책략을 통해 교황 유진 4세에 대한 반감을 조성하면서 교황이 자리에서 물러나든지 아니면 적어도 공회의의 결정에 따라야 할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쿠사누스가 비로소 지성적 면모를 인정받게 된 것은 1433년 그의 첫 저서인 『보편적 일치에 관하여』를 내놓은 이후이다.
니콜라우스는 이 책에서 내적으로 분열돼 붕괴 직전에 놓인 권력들–교황과 황제들–을 구제하려고 하는 원대한 구상을 전개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이 분열의 해소란 오직 ‘개별자들’에 관한 이론과 ‘보편자들’(일반자들)에 대한 플라톤의 이론을 결합시킴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적이기 보다는 정치적인 저술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저자가 변증법의 한 탁월한 이론가란 사실을 입증해준다. 다시 말해 쿠사누스는 일차원적으로 사유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사유는 보통의 사유와는 반대로 늘 전체에 맞춰져 있다.
변증법의 시야란,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누군가 얘기 중에 자기가 집 한 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고 하자. 우리는 대개 이 말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에 비해 쿠사누스 같은 변증법자들은 다른 반응을 보인다. 이들은 그 사람이 집을 가지고 있다는 것 외에도 그 집과 관련된 다른 사실들(세든 사람, 건축 소재 등)을 알려줘야만, 그제야 그 집은 ‘실제 있는’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세든 사람이나 건축소재 등의 사람과 사물들은 또한 그것들대로 무수한 관계망에 걸쳐 있다. 이들은 이런저런 관계망을 통해 또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에 연관돼 있는 것이다. 이는 종국에까지 사유해볼 때, 결국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연관돼 있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한 채의 집과 관련된 것들을, 전체에 이르기까지 캐내면 캐낼수록 그 집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전체의 단계에서는 대립은 해소된다. 자신의 정치적 저술에서 쿠사누스는 교황과 황제에 대한 문제 또한 이 방법론에 따라 분석한다. 여기서 그는 거듭해서 사람들의 기본 정서에 호소하는 결론에 이른다.
단일성(하나임, Einheit)과 다수성多數性(여러 개임, Vielheit)이란 개념 쌍을 다룰 때가 그 한 예이다. 그는 단일성이란 신에 있다고 말한다. 단일성은 모든 대립들, 그리고 모든 긍정(Ja)과 부정(Nein)을 넘어서 있다. 그렇지만 단일성은 또한 다수성을 전제한다. 다수성 없이 단일성(혹은 일치, 조화)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쿠사누스는 나아가 우리를 둘러 싼 다수의 사물들은 단일성으로부터 전개돼 나온다고 주장한다. 여러 사물들은, 말하자면 우리에겐 감추어져 있는 단일성의 지체肢體들이란 것이다. 사물들은 반드시 다수여야 하며 또한 서로 구별돼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사물들을 지각하거나 인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식함은 곧 나눔, 가름, 구분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지각하는 다수의 사물들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단일성은 실재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그런데 다수의 것들–쿠사누스는 여기에 인간도 포함시키는데–이 단일성에서 유래돼 나오고, 나아가 단일성의 지체들이라면, 엄밀하게 논리적으로 볼 때 그것들은 서로 대립할 수 없다.
이로부터 쿠사누스는 다음과 같은 삶의 태도, 삶의 입장을 취할 것을 요구한다. 서로 다른 것들, 심지어 긍정과 부정이라는 서로 대립되는 것들조차도 더 이상 적대적으로 규정할 게 아니라 그들의 논리에 따라 있는 바대로, 즉 전체–단일성이 그 안에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는’ 부분들로 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따라 쿠사누스는 바젤에서 가톨릭교회의 단일 이념과 ‘독일제국’의 단일 이념에 대한 충성을 서약한다. 그는 여러 종파의 대표자들, 바른 믿음에서 벗어난 자들 그리고 오직 자기 이익만을 꾀하는 정치가들에게 격렬하게 대항한다. 그는 이들에게 많은 ‘개별자들’이 단일성에 기여할 목적에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개인적인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공회의를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단일성을 능멸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는 성령聖靈에 위배違背되는 죄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니콜라우스는 성령을 단일성 안에서 활동하는 힘과 동일시한다.
이같은 호소의 내용과는 상치되게도, 그는 여전히 교황의 적대자들 편에 서 있다. 그러나 공회의가 6년째 접어들던 1436년 12월 니콜라우스는 회의의 모든 참가자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을 충격을 안겨 준다. 납득할 만한 아무런 이유도 제시함이 없이 그는 개혁주의자들 편에서 이탈하여 유진 4세의 지지파에 가담한다. 그의 동지들은 그의 배신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배교자, 변절자라고 욕하지만, 그는 이같은 비난들을 냉담하게 뿌리친다.
그는 어제까지만 해도 자기가 격렬히 대항했던 적들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한다. 교황 유진 4세는 아직 그를 신뢰하지 않지만, 쿠사누스는 책략의 장인답게 재빠르게 기교를 부려 그의 의심을 말끔히 지워버린다. 전향이 있고 난지 불과 2주후 그는 교황 진영의 수석 대변인에 임명된다. 그리고 그 뒤 얼마 후 교황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릴, 정통 동방교회와의 공회의를 준비할 대표단을 구성할 때는 그가 여기에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된다. 애석하게도 쿠사누스가 어떻게 해서 자기에게 환멸을 느껴야 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되돌려 자기를 지지하도록 만드는지 짐작케 할 만한 실마리는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그의 정치적 적대자들은, 마치 여자들이 카사노바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가 그들의 손을 쥐기만 하면 어느새 그를 용서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1437년 11월.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의 교회 정문에서 유명한 95테제를 발표함으로써 근대의 개시를 알린 것은 이로부터 80년이 흐른 뒤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질 때, 근대가 개시된 것은 이 1437년 11월의 어느 날 밤이다. 바다엔 거센 폭풍이 일고, 잠을 이루지 못한 니콜라우스는 갑판으로 나온다. 그리고 거기서 그의 표현대로라면, “천상으로부터, 빛의 아버지로부터 선물”을 받는다. 좀 더 세속적인 말로 옮기면, 바다의 광대함이 그에게 우주는 무한하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하였다. 무한 개념은 중세의 사유에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았다. 스콜라 철학은 시간적으로 개념파악되고, 신과의 관련 속에 사용되는 “영원성”이란 개념만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쿠사누스의 발견은 그때까지의 세계관인 ‘프톨레마이오스의’의 세계관을 뿌리째 뒤집는 것이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죽은 자들의 영혼과 더불어 신이 거주하는 하늘은 자기들의 머리 위, 별들 너머 둥근 아치 모양을 하고 있다고 여겨왔다. 그런데 이 발견은 사람들의 이같은 믿음을 허무는 것이다.
이 혁명적인 생각은 단지 더딘 속도로만 확산되어 갔지만, 아마도 그 이유는 그 생각이 근본적으로 엄청난 요구를 담고 있는 탓일 것이다. 쿠사누스는 지구는 다른 별들에 비해 결코 고상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신의 눈길”은 비단 이 지구에만 향하고 있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지구는 우주의 하나 뿐인 중심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무한한 우주에서는 어떤 점도 중심이 될 수 있고, 따라서 어떤 하나의 점도 유일하게 중심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에 대한 이같은 새로운 발상은 무엇보다도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우주 전체를 파악해보려는 희망을 붕괴시킨다. 그것은 우주를 계산 가능한 크기로 파악하는 시도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우주의 속성을 하나의 공식으로 담아보고자 하는, 코페르니쿠스에서 하이젠베르그에게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희망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새로운 생각은 궁극적으로는 수학적 우주론을 폐기시키면서 그 자리에 신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자”란 낯선 아름다움의 이념을 대치시킨다. 이단자로 단죄돼 화형당한 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는 쿠사누스를 위대한 수학의 아버지들 중 한 사람인 그리스인 피타고라스와 견주면서 기술하기를, “지혜는 자신의 집을 지중해에 세웠다. 이 집은 처음엔 이집트로 옮겼고, 지금은 다시 독일로 옮겨 와 있다”라고 한다.
니콜라우스는 한 동안 외교관 생활을 중단하고 고향 쿠에스로 돌아와 철학에만 전념한다. 무한 개념을 실마리로 해서 그에게 일련의 사유들이, 마치 눈사태처럼 일어난다. 이 사유내용들은 특히 그의 저서 『지적인 무지』에 실려 있다.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을 본 딴 책의 제목은 일체의 세속적 앎을 궁극적으로 회의를 가지고 대하는 철학적 태도를 표현하고 있다.
특히 무한성을 탐구하는 것은 인간 지성의 무력함을 절감하게 하는 일이다. 사유의 과정에서 니콜라우스는 거듭해서 기존의 논리학으로는 넘을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친다. 예를 들면 그는 신을 무한자로 기술한 다음, 무한자[절대자]와 유한한 인간, 사물들에는, 마치 사과와 배의 관계가 그렇듯이, 어떤 관계도, 어떤 비교 가능성도 없다고 확정한다. 오히려 양자 사이에는 사유로는 도저히 메꿀 수 없는 심연이 가로 놓여 있다는 것이다. 쿠사누스는 어쩌면 우리는 무지를 통해 신, 무한자 또는 절대자에 다가갈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물론 그렇다고 이 사상가가 책을 내던져야 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과감한 생각에는 논리학의 전면적인 전복이 숨어 있다. 우리는 한 대상, 예를 들면 한 그루의 나무를 기술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무엇은 아니다고 말할 수는 있다. 다시 말해 그 나무와 구별되는 모든 것들(그것은 풀이 아니다. 그것은 철탑이 아니다 등)을 열거할 게 분명하다. 이렇게 다른 것들을 제외시켜 가다 보면 결국에는 문제의 나무가, 마치 그것은 무엇이다고 진술된 것처럼, 남아 있게 된다. 이때 우리는 그 나무를 ‘부정적으로’ 규정한 것이며 그것이 무엇은 아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에 한해서는 그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는 셈이다.
이같은 논리를 신에 적용했을 때는 사정이 훨씬 더 복잡해진다. 신은 ‘어떤 것’, 나무와 같은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무엇이 아니다고 열거해 갈 때, 나무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곧 다음의 사실을 의미한다. 신과 무는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이제 이쯤에 이르러서는 이 철학자가 책의 제목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보다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의도는 이런 것이다. 우리는 신에 대해 탐구함으로써 신에 관한 “지식을 갖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애초에 알고자 했던 것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래서 늘 “지적인 무지한 자들”로 남는다.
1년이 지나자 벌써 강변 마을의 평온함에 싫증을 느낀 쿠사누스는 교회 업무로 다시 돌아온다. 철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복귀를 애석하게 여긴다. 실제로 쿠사누스에겐 플라톤이나 칸트에게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신에게서 법에 이르기까지, 정치학에서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의 이론 안에 자기의 철학을 담아내는 학문적 끈기를 찾아보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