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 그들의 깊은 사유와 ‘웃픈’ 삶 11 칸트 (3)
3. 흄을 통해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다
1770년 무렵 혹은 그보다 더 일찍 “비판적 사유”의 시기가 시작된다. “비판적 사유”는 칸트에게 시대를 초월하는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이는 또한 다음의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칸트는 그 때로부터 10년 간 침묵을 지킨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비판적 사유의 근본 원칙들에 대해 깊이 탐구한다. 그리고는 그는 불과 몇 달 만에 『순수이성비판』이란 책에 담아낸다.
칸트가 우리의 인식 능력의 한계에 대한 물음, 다시 말해 감성과 오성, 이성이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비로소 문제 삼은 것은 몇 년의 시간이 지난 뒤이다. 그는 처음 한동안은 이전의 다른 철학자들, 예를 들어 라이프니츠처럼 신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논리적으로 올바른 한, 참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모순(‘키가 더 큰 사람은 키가 작다’)되지 않는 것,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는 것(‘열의 원인은 태양이다’), 또 명석하고 판명하게 사유된 것은 올바르다.
라이프니츠 그리고 칸트 또한 처음엔 논리학을 믿은 나머지 경험의 가치, 특히 감성, 즉 사물과 사건들에 대한 구체적인 지각의 가치를 소홀히 여기고, 나아가 아예 무시한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경험과 감성은 다만 사유를 혼란시킬 뿐이다. 이것이 곧 “합리주의”의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칸트는 이와는 완전히 상치되는 것을 역설하는 또 다른 철학 경향을 발견한다. 영국 “경험주의”가 그것이다. 영국 경험주의의 창시자인 존 로크(1632-1704)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일찍이 감성에 주어지지 않는 어떤 것도 오성에 들어 있지 않다.
로크가 보기에 우리의 인식은, 그것이 보다 확실한 만큼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 아마도 수학은 그 예외가 될 것이다. 로크는 어떤 감각적 지각도 앞서 있지 않은 인식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대단한 것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초감성적인 것에 대한 학문인 형이상학 역시 그러한 인식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신과 영원에 관한 이론들은 경험을 통해 증명돼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순수사유”의 결과물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들은 순전히 논리적 구성물들일 따름이다.
“사실들을 따지는” 지금의 시대에는 경험의 사유가 오성의 사유에 비해 훨씬 더 우월한 권위를 갖고 있다. 하지만 임마누엘 칸트가 살았던 시대에는 그 반대였다. 논리가 단연 경험을 앞서고, 또 그래서 이론이 실천을 앞선다.
그러나 칸트는 곧 인간이 단지 오성만을 가지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우선 인식의 문제를 숙고하는 과정에서 이율배반에 부딪치기 때문이다. 이율배반은 다 같이 참이지만, 즉 다같이 “오성적으로는” 입증될 수 있지만 그러나 서로 모순되는 두 주장이 양립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세계(우주)는 시간에 있어 시초를 가지고 있다 / 세계는 시간에 있어 시초를 가지고 있지 않다. 또는 우주는 공간적으로 한계가 있다 / 우주는 공간적으로 한계가 없다.
이런 명제들 앞에서는 모든 인식이 중단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가능한 경험의 테두리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직 경험에만 의존하는 사유는 더 복잡한 딜레마에 빠진다. 분명 칸트는 데이비드 흄의 저술들을 읽으면서 그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을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 흄(1711-1776)은 사상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중 한 명이다. 그는 칸트에게 인간의 인식능력에 회의를 품도록 부추긴 장본인이다. 나아가 그는 자신의 저서 『인간 오성 탐구』를 통해 독일 철학자로 하여금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게 한다.
그때부터 쾨니히스베르크의 철학자가 영국인 철학자에게 힘입은 바는 실로 크다. 칸트는 그에 대한 감사를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는 자기 조상이, 데이비드 흄과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출신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흄은 근대 철학자들 중 가장 위대한 “회의주의자”란 명성을 갖고 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한 문장으로 축약된다. 우리가 확신을 갖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오성과 감성은 어떤 차이도 없다.
그는 무엇보다도 이른바 오성적인 명제인 “내일 해가 뜬다.”가 논리적으로 보면 그 반대의 사실을 말하는 “내일 해가 뜨지 않는다.”만큼이나 근거가 충분하게 뒷받침되지 않다는 점을 입증한 후, 그와 같은 결론에 이른다.
흄이 밝힌 주장들은 인간 이성을 뒤흔들어 놓는다. 그리고 이 혼돈으로부터 이성을 다시 건져준 사람이 칸트이다. 칸트는 “이성비판”을 통해서 이성을 구제한다. 이것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한 예를 통해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인과성의 문제이다.
우리들의 지식은, 예컨대 이런 문장들로 이뤄져 있다. “해가 뜨면 날이 밝는다.” “빵을 먹으면 배가 부르다.” “뜨거우면 버터가 녹는다.” “가스를 주입하면 자동차는 더 빨리 달린다.” 등. 이 명제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모두 결과를 발생시킨 원인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는 날이 밝음(결과)의 원인이다. 뜨거움은 버터가 녹는 원인이다.
이 명제들의 확실성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제대로 관계를 맺게 하고, 그 안에서 살 수 있도록 해준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과 땅의 모든 사건들을, 하나의 사물(또는 사건)은 다른 사물(사건)의 원인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서의 확고부동한 확실성을 보증할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못한다. 관찰을 통해서는 도무지 열 때문에 버터가 녹는다는 것을 지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각하는 것은 단지 열이 가해지고 그리고 나서 버터가 녹는다는 사실뿐이다.
다시 말해 열의 가해짐과 버터의 녹음, 이 두 사건은 단지 시간적인 연관으로만 우리에게 나타날 뿐이다. 이 과정에서 가해지는 열과 녹는 버터가 서로 인과적으로 혹은 내적인 연관으로 묶여 있다는 사실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첫 번째 사건(열)만을 따로 떼어 놓고 볼 때, 그 안에는 두 번째 사건(녹는 버터)을 지시하는 어떤 근거도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해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해 때문에 날이 밝은 것은 아니다. 다만 해가 비추기 시작하면서 날이 밝았을 뿐이다. 이때도 단지 시간적인 연관만을 지각할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출과 날이 밝음은 인과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입증해야 할 때, 다시금 증명 부재 상태에 빠져 버린다. 해가 비춘다는 사건만을 따로 관찰해볼 때, 우리는 그것만을 가지고서는 대지에 날이 밝는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해가 비추기 시작하는 대지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이끌어 낼 수 없다.
그러나 사물과 사건들이 원인과 결과의 원칙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는 어떤 증거도 제공되지 않는다면, 논리적으로는 우리에게도 사물과 사건들이 인과적으로 진행된다고 주장할 아무런 권리가 없다.
현실 세계에서는 인과율이 발견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해 유명한 시계 비유가 설득력을 얻는다.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는 시계 비유란 이런 것이다. 만약 두 시계가 초침까지 똑같이 움직인다면, 이는 다음 두 가지 이유 중 하나이다. 두 시계가 서로 연결돼 있거나 아니면 시계를 만든 사람이 애초에 두 시계가 서로 독립된 상태에서 언제나 같은 시간을 가리키도록 정교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엔 두 시계는 단지 겉보기에만 서로 연관된 것처럼 보일 뿐이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우리의 실제 세계가 후자와 같은 상황이다. 신은 사물과 사건들을, 우리가 그것들이 서로 인과적으로 연관돼 있다고 믿을 만큼 시간상으로 정확하게 진행하게끔 만들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처음 일어난 사건은 그 다음 일어난 사건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렇지만 흄도, 칸트도 그런 방식의 설명을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스코틀랜드인[흄]은 자연의 인과법칙에 대한 “믿음”은 “습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잇달아 일어나는 두 사건을 관찰하게 된다면, 얼마 후엔 첫 번째 일어난 사건을 두 번째 일어난 사건의 원인으로 여기는 습관을 갖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가정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원인에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흄의 설명 방식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물론 그는 자연에서 인과법칙은 발견될 수 없다는 흄의 생각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는 스코틀랜드인과는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과법칙은 있으며, 그것도 우리 오성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인과법칙은 그 인식 기능 안에서 인간의 경험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전제들” 가운데 하나를 이루고 있다. 이는 곧 다음의 사실을 의미한다. 인간은 애초부터(선험적으로) 인과법칙을 가지고 있어서 세계의 사건들을 관찰할 때, 다시 말해 경험할 때 이를 적용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언제나 인과성이라는, 벗을 수 없는 안경을 통해서 “해–날이 밝음” 또는 “열–녹는 버터” 등과 같은 사건들을 본다는 것이다.
내부의 안경 없이는 도저히 사유할 수 없고, 따라서 존재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계와 제대로 관계 맺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세계 안에 질서를 부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해나 버터 같은 서로 상이한 대상들을 납득할 만한 연관 안에 집어넣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연관의 구조는 오성에 의해 이미 주어져 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혼돈 속에서 붕괴되고 말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인과성은 일종의 질서부여 요소로서 인간의 이성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 인과성의 도움으로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산다.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지금 말하고 있는 세계란 “현상의 세계”이지 “물 자체”의 세계가 아니란 점이다. 물 자체의 세계에는 인과성의 법칙 또한 적용될 수 없다. 물 자체는 사유구조의 유효범위 밖에 있다. 우리의 인식에는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들의 세계는 단지 나타남들, 감각들, 작용들, 인상들의 총화일 따름이다. 그리고 인과법칙은 오직 이 세계 안에서만 질서부여 활동을 한다. 인과법칙이 또한 오성 밖이나 물 자체의 세계에도 있는지, 또 역할을 하고 있는지 여부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영국인 회의주의자 흄은 칸트에게 또 다른 중요한 사유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자연에서는 인과성이 발견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한 후 흄이 다음과 같은 확신에 이르는 일은 불가피한 것이다. 논리적으로 보면 우리는 원인–결과 법칙을 토대로 어떤 기대도 할 권리가 없다. 곧 과거를 근거로 미래를 이끌어 낼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
보다 분명하게 말하면 앞으로도 열이 가해지면 역시 버터가 녹을 것이고 또 내일도 역시 해가 뜰 것이라는 가정엔 어떤 이성적인 근거도 없다는 것이다. 흄에 따르면, 정반대의 주장들인 ‘버터가 녹지 않을 것이다.’, ‘해가 뜨지 않을 것이다.’ 역시 앞서의 주장들만큼이나 정당하다.
당연히 “건전한 인간 오성”은 흄의 이런 생각에 반발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사물들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장래에도 또한 그럴 것이란 기대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흄의 주장에 대한 통속적인 대답은 이런 것이다. 예를 들어 해가 뜬다는 사실은 이제껏 틀린 적이 없다. 이로부터 우리는 앞으로도 여전히 해가 뜨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경험에서 나오고 흔히 반론으로 즐겨 내세우는 위 명제는 도대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즉 앞으로 입증돼야 할 것을 주장의 근거로서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철학자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명제의 확실성, 즉 과거의 일출들로부터 미래의 일출을 이끌어 낼 수 있느냐의 여부이다.
다른 한편, 어떤 사건이 한 번 반복됐느냐, 수백 만 번 반복됐느냐 하는 것은 논리학의 법칙으로 볼 때는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반복은 사건의 상황 자체에 어떤 변화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경험(예를 들면 해가 뜨는 사건의 관찰 같은)은 단순히 사건이 일어나고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만을 알려주지, 그 사건이 필연적으로 일어나고 또 되풀이돼야 한다는 사실을 지시해주지는 못한다.
물론 영국인[흄]이 매일 해가 뜨는 사건을 진심으로 의심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자기의 주장을 인간 이성의 파산 선고로 간주한다. 실제로 흄의 명제는 오랫동안 과학에 있어서 하나의 스캔들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물리학자들, 화학자들, 생물학자들은 자연법칙들을, “어떤 경우에도 타당한”, 엄밀하고 보편적이고 시간에 제약받지 않는 진리들이라고 여겨 왔던 것이다. 그들은 바로 되풀이된 관찰들로부터 보편타당한 자연법칙을, 예를 들어 해가 뜨는 사건들을 반복적으로 관찰함으로써 “언제나 아침이면 해가 뜬다.”란 법칙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확신으로 살아왔다.
오늘날에 과학자들은 물론 좀 더 신중해졌다. 그들은 여전히 예측의 가능성을 믿지만 더 이상 자신들의 법칙을, 마치 그것들은 절대적으로(예외 없이) 타당하다는 식으로,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지는 않는다. 다만 개연성이 굉장히 높은 규칙들이라고 통계적으로 이해한다. 이들에 따르면, 언제나 아침이면 해가 떴다는 사실은 내일 아침에도 해가 뜰 것이란 것을 절대적으로 입증해주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확률적으로 매우 높은 가능성을 가지고서 보장해준다.
흄의 주장에서는 어떤 논리적 약점도 찾아 볼 수 없다. 우리는 그의 주장을 “신 존재 증명”처럼 무너뜨릴 수는 없고, 다만 반대이론을 통해서 반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칸트가 자신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바로 그러한 시도를 한다.
칸트는 그 같은 엄청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논리학에 몰두한다. 거기서 그는 ‘판단’의 세 가지 유형을 구별해낸다.
이에 따르면, 우선 어떤 의심에서도 벗어나 있는 명제들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명제이다. “총각은 언제나 미혼이다.” ‘총각’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결혼하지 않은’이란 술어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총각’이란 주어를 분석함으로써 ‘결혼하지 않은’이란 술어에 이른다. 이런 유형의 판단들은 물론 참이지만 하나의 단점을 가지고 있는데, 새로운 인식에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칸트는 이런 명제를 “분석명제”(이 경우, 분석함이란 주어를 분석하는 것을 뜻한다)라고 부른다.
이에 비해 인식의 새로움을 가지고 있어서 흥미로운 또 다른 명제들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진리 내용이 문제가 된다. 다음의 주장이 그러한 유형의 명제에 속한다. “이 총각은 참하다.” 칸트에 따르면, ‘참하다’는 술어는 ‘이 총각’이란 주어에 들어 있지 않다. 오히려 주어 아닌 다른 통로로부터 덧붙여진 것이다. 철학자는 이런 유형의 명제를 “종합명제”(종합적=결합된)라고 호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