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 그들의 깊은 사유와 ‘웃픈’ 삶 13 칸트 (5)
5. 별들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에 깃든 도덕법칙
이 무렵 칸트는 그간 검소한 생활을 유지한 덕분에 쾨니히스베르크 성城 부근의 프린체신 거리에서 집을 구하고, 1787년 퇴역 군인인 충실한 하인 람페와 함께 그 리로 이사를 한다.
이때 칸트의 나이 63세였다. 정신과 의사라면 아마도 그에게서 강박성 신경증을 확인할 것이다. 규칙에 대한 그의 집착엔 다분히 그러한 증세가 나타나 있다.
칸트는 하인에게 매일 아침 5시 조금 못돼서 자기를 깨우라고 지시한다. 여기엔 다음과 같은 희한한 주문이 딸려 있는데, 그가 혹 눈을 뜬 후에도 침대에 누워 늦장을 부리려고 하면, 어떤 경우에도 이것을 그냥 놔둬서는 안 된다는 지시이다. 철학자는 이런 식으로 자신이 세심하게 짜놓은 시간표가 엉망이 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후에는 잠잘 때 쓰는 모자를 그대로 쓴 채 서재로 향한다. 그 곳에서 두 잔의 차와 한 대[언제나 오직 한 대]의 파이프 담배를 핀다. 그는 커피와 맥주를 건강에 해로운 것으로 믿었다.
정확히 7시가 되면 “강의실”인 지하실에 대략 20여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칸트는 결코 자신의 철학에 관해 얘기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의 강의는 유명세를 얻었다. 낮은 어조로 얘기하고, 앉아 있는 학생의 웃옷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으면 신경이 거슬리고, 또 강의 주제로부터 벗어나기 일쑤였다. 그렇지만 그는 여느 교수와도 다르게 학생들에게 철학, 무엇보다도 철학함을, 즉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법을 가르칠 줄 알았다.
9시엔 다시 서재로 돌아와서 슬리퍼를 신고 잠옷 가운을 걸치고 모자를 쓴 채 글을 쓴다. 꾸밈없는 잿빛의 벽에 걸린 것이라고는 그림 한 점이 고작이다.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의 초상화이다. 가구 역시 소박하고 간소하다. 몇 개의 책상과 의자들, 서랍달린 장이 있다. 다소 호사스럽다 할 만 한 것으로는 안락의자가 하나 있을 뿐이다.
방문객들은 칸트가 책이 소장된 공간을 갖고 있지 않는 것에 놀랐다. 생활고를 겪던 시절 그는 갖고 있던 책들을 팔아야 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더 이상 책을 사지 않았다. 그에게 있는 몇 권의 책들도 저자들이 비평을 부탁하며 보내준 것들이다.
1시엔 정장을 한 채 친구들을 불러 점심을 먹는다. 그는 점심에 초대하는 친구들의 숫자가 언제나 3명(우미를 상징하는 세 자매 여신처럼)보다 모자라지 않게, 그리고 9명(문예, 학술의 아홉 여신처럼)을 넘지 않게 세심하게 안배한다. 점심 친구들은 철학자를 세심하게 배려한다. 형사 자문위원인 옌쉬는 일주일 동안 피울 수 있는 담배를, 상인 야코비는 포도주를 가져다준다(칸트는 매일 한 잔의 포도주를 마신다). 또 한 친구는 총각인 칸트가 좋아하는 음식 재료들(대구와 치즈)을 가져 온다. 식탁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겨자 쏘스는 칸트가 손수 만들지만, 음식 요리는 점심 식사를 위해 고용된 여자 요리사가 한다.
보통 4시까지 이어지는 식사가 끝나면 칸트는 하얀 분말이 뿌려져 있고, 위에는 삼각모자가 얹힌 가발을 쓰고 산책을 간다. 그는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느릿느릿 걷는다. 그 사이 입술은 감기가 들까 굳게 다물어져 있다. 도중에 성가시게 군 거지에 대해 탄식하기도 한다. 언제나 그는 정확한 시간에 길모퉁이를 돌았고, 동네 사람들은 이를 보고 시계를 맞췄다고 한다.
저녁엔 독서로 시간을 보낸다. 그가 읽는 책들은 대부분 여행기들이다. 10시 정각에 침대로 간다. 잘 때는 곤충들이 방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늘 창문을 꼭 닫았다.
칸트는 이제 잠을 자려고 하는데, 집 근처에 교도소가 하나 있었다. 이곳 죄수들은 규정에 따라 매일 저녁 찬송가를 부르게 돼 있었다. 높고 낮은 노랫소리는 그렇지 않아도 음악을 “성가신 예술”이라고 싫어한 칸트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더욱이 죄수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노래하고 있다고 느낄 수도 없던 칸트는 교도소 당국에 편지를 써 “감옥의 위선”으로부터 그가 겪는 고통을 호소한다. 그의 진정서는 효과를 거둔다. 그 후로 죄수들은 창문을 닫고서 찬송가를 부르게 된 것이다.
칸트는 죽기 얼마 전 지나치게 과음을 했다는 이유로 하인 람페를 내쫓는다. 그러나 그리고 나서 자책감을 느끼게 된 그는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말을 적어 둔다. “람페란 이름은 완전히 잊혀야 한다!”(논리학자인 칸트는 사람이란 어떤 것을 잊겠다고 다짐하면 그렇게 된다고 믿는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면서, “계몽주의” 정신에 담긴 엄청난 정치적 파괴력이 강렬한 인상을 주면서 입증된다. 칸트는 이 사조의 탁월한 사상가로 간주된다. 그가 저술한 “이성비판”의 결론 중 하나는 인식비판적으로 보면 어떤 군주도 자신이 신의 은총으로 권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통찰이다.
그렇지만 칸트는 절박한 처지에 몰린 상태에서 권리를 위해 권력에 항거하는 시민계급의 대변자로 나설 수 있는 실천가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정치가, 더욱이 혁명가로 여기지 않았다. 나아가 철학자의 이성은 권력으로부터 상처를 입기 마련이라고 믿고 있다. 칸트는 플라톤과 자신을 구별하며, 철학자가 왕이 돼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권력은 정신을 타락시키기 때문이란 것이다.
동시대인들이 기술하듯이 그는 “‘아니오’라고 말은 할 수 있지만 대항하여 부정하는 사상가는 아니다.” 그는 논증할 수 있지만, 설복의 능력은 없다. 마르크스나 레닌 등과 같은 철학적 사상가들과는 달리, 군중을 끌어 모아 소요를 일으키거나 선동하는 능력은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칸트에게는 자기가 밝혀 놓은 진리를 대중에게 설득시키고 전파하려는 의지가 결여돼 있다. 그렇지만 진리는 결국 스스로를 관철시킨다는 그의 믿음은 확고하다.
그 후 그는 철학자로서 『순수이성비판』의 이론들을 비판철학이라는 하나의 테두리 안에 체계화하는 일에만 열중한다. 그는 포괄적인 도덕 이론을 기술하고 이를 『도덕형이상학의 기초』(1785), 『실천이성비판』(1788), 『도덕형이상학』(1797)이란 이름으로 출간하다. 『도덕형이상학』은 또한 법 이론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기이한 일어난다. 칸트는, 말하자면 『순수이성비판』에서 앞문을 통해 내쫓은 신을 “실천이성”에서는 뒷문을 통해 다시 불러들인 것이다.
그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실천적인 면에서 신에 대한 심각한 필요성을 갖고 있기에 신을 믿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실천이성”은 신이 존재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 주장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뒷받침한다.
도덕적으로 처신할 의무를 진 인간은 짧은 생을 통해서는 결코 지고의 선, 즉 도덕적 행위와 행복의 일치에 이를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일치는 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단지 신과 영혼의 불멸성, 다시 말해 영혼의 영원성이 있는 경우에만 그렇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미덕에는 보상이, 악덕에는 벌이 따르기를 바란다. 그런데 인과응보의 정의는 지상地上에서는 논외의 일이다. 때문에 우리는 죽고 난 이후 하늘의 신이 그 정의를 행할 것이라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이 사유방식을 “코미디”라고 부른다. 칸트는 그의 사유에 대해 논리적이기 보다는 어떤 “도덕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살면서 쾌락을 쫓아서는 안 되며 “의무”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그의 요구 역시 도덕적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 “의무”란 무엇인가? 또는 더 정확히 말해 올바른 행동을 규정해주는 그 법칙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칸트는 이에 대해 순수실천이성이라고 대답하며 다음과 같이 논증할 것이다. 우리는 쾌락을 법칙의 기초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쾌락이란 말을 각자 다르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쾌락을 갖게 되는 경험들은 상이하다. 쾌락의 공통분모를 추려낼 수 없으며, 따라서 쾌락으로부터는 공동생활을 더 낫게 만드는 법칙을 이끌어 낼 수 없다.
때문에 칸트는 이제 『순수이성비판』에서 그랬던 것처럼 단지 경험에서 끌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험에 앞서 놓여 있는(선험적인), 다시 말해 이성에서 비롯된 명제들을 찾기 시작한다.
이 법칙들은 우리의 의지가 정하는 목적들(예를 들어, 결혼하기)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의지를 세우는 토대가 되는 조건들을 가리키는 것이어야만 한다. “정언명법”이 우리에게 이 조건들을 부여한다. “너는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칙으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행위하는 인간들 각자의 의지를 이끄는 규칙들이 보편적 입법의 원칙들에 거슬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만약 한 사람의 준칙이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하자. 이를 보편적 원리로 확장하면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의 희생으로 부자가 되도 좋다는 원칙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이 올바른 것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비롯되는 행위들(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의 희생으로 부자가 된다)은 서로 상쇄될 것이며, 또 그 행위들로 인해 보편적 착취의 세계가 발생할 터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한 사람의 준칙이 나는 오직 내 자신만을 걱정하고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하자. 물론 이 규칙이 보편적 법칙으로서 성립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인간 이성의 보편적 입법의 원칙으로서는 타당한 것일 수 없다. 인간이란 순전히 자족적인 존재자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살기 위해서 다른 인간을 필요로 하는 존재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언명법”을 칸트가 발견한 인식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것으로 여긴다. 실제로 정언명법은 반박의 여지가 없이 완전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또한 시간과 조건에 구애받음이 없이, 다시 말해 무전제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의지함의 조건만을 밝힐 뿐 구체적으로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즉 어떤 구체적 행위 지침도 주지 못하는, 단순히 하나의 형식적인 법칙일 따름이다. 때문에 이를 실생활에 적용할 때는 항상 논란의 여지가 따르게 된다.
예를 들어, 마르크시스트 철학자인 에른스트 블로흐는 이 원칙을 자본가들에 의한 노동자 착취를 폐지해야 할 근거로 수용한다. 반면 칸트를 전공한 장 아메리같은 이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임의적인 이용 수단”으로 삼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칸트의 요청은 시민계급에 의해서는 그 단초적인 수준에서도 이뤄질 수 없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사회 전체가 “정언명법”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시민계급에 속하는 칸트 해석가들은 그런 식의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1790년 칸트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인 비판서 『판단력비판』을 완성한다. 이 비판서에서 그는 “쾌감과 불쾌감”의 동기를 밝히는 작업을 한다.
칸트는 모든 감정이란 쾌감 또는 불쾌감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감정의 내용은 감정과 관련된 대상이 합목적적이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영화 보는 데 쾌감을 갖고 있는 경우라면, 쾌감을 채워주기에 적합한 영화는 합목적적이다. 그와 달리 극장에 가고 싶지 않을 때 영화는 거의 합목적적이지 않거나 전혀 합목적적이지 않다.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합목적성에는 주관적 합목적성과 객관적 합목적성이 있다. 전자의 합목적성은 미적 판단, 즉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판단 동기이다. 그에 비해 후자의 합목적성은 목적론적 판단, 즉 자연의 합목적성에 대한 판단 동기이다. 이에 따라 『판단력비판』은 “미적 판단력 비판”과 “목적론적 판단력 비판”을 포괄한다.
특별히 미에 대한 탐구는 문학계의 대가들로부터 주목을 받는다. 31세의 프리드리히 실러가 그 중 한 사람이다. 실러는 물론 칸트의 딱딱한 의무개념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이내 칸트의 비판적 추종자가 된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 안에 칸트의 이론들을 담아내는 한편 괴테를 또한 이 철학자에게 심취하게 만든다.
실러와 괴테 두 사람은 칸트와 사귀고 싶어 하지만, 이들의 바람은 칸트의 수줍음과 교제에 대한 두려움으로 성사되지 못한다. 거기다 칸트는 괴테의 작품은 거의 읽지 않았으며, 실러 작품의 경우는 겨우 조금 읽어 본 정도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관심의 결여는 특히 괴테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다. 칸트가 죽은 지 20년이 흐른 뒤였지만, 시인은 격분의 감정을 삭이지 않은 채 이렇게 실토한다. “그는 나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1795년 칸트는 “영원한 평화”의 가능성을 검증해 보는, 한 권의 저술을 출간한다. 여기서 그는 전쟁이란 이성과 합치될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모든 국가들이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국제 연합을 창설할 것을 주창한다. 평화는 이러한 방식에서 가장 확고하게 지켜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구성 국가들의 헌법은 “공화주의적”이어야 된다고 말한다. 이때의 “공화주의적”이란 말은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1919년 국제 연맹이 칸트를 인용하며 다시 이 이념을 내세운다. 또한 “세계 민족들의 평화적이고 전반적인 연대에 대한 칸트의 이성 이념”은 국제 연합(UN)에도 각인된다. 세계의 평화문제 연구가들은 그를 가장 위대한 평화 사상가 중 한 사람으로 여긴다.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칸트의 정신은 급속히 쇠약해져 간다. 그의 몸은 마치 몸 안의 수분이 다 빠져 나간 듯하다. 그는 1804년 2월 12일 노화로 숨졌다. 친구들은 단출하고 조용한 장례식을 준비한다.
그러나 그의 사망이 쾨니히스베르크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에 몰려든다. 시신이 장지로 운구될 때는 1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조문객의 행렬이 뒤를 따랐다. 시내 극장은 이날 하루 문을 닫았다.
그는 쾨니히스베르크 성당 지하에 있는 교수 묘지에 묻힌다. 훗날 시민들은 『실천이성비판』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를 새긴 묘비를 세운다.
“그에 대한 생각에 깊이 잠길수록 두 가지 사실이 더욱 새롭고 보다 큰 경탄과 외경으로 내 마음을 채운다. 그것은 내 머리 위 별들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 안에 깃든 도덕법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