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렉산더 이슈추크 박사의 “동방과 서방 : 동유럽 트리필리아 문화와 문명사에서 갖는 위치”

상생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본 연구소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올렉산더 이슈추크 박사는 우크라이나의 키이우(키예프)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하는 고고학자이다. 그는 한국에도 와서 우크라이나 고고학에 관한 발표를 한 적이 있으며 우리에게 여러 번에 걸쳐 우크라이나 관련 논문을 보내주었다. 지난 9월 23일 이슈추크 박사와 상생문화연구소의 강시명 박사 그리고 본인 셋이 줌으로 화상대화를 하였다. 그는 전쟁 초기에 키이우가 러시아 군대에 포위공격을 받았을 때에는 식량 구하기도 쉽지 않고 아주 힘들었는데 러시아 군대가 키이우 지역에서 물러난 후로는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안전 문제로 박물관에 나가서 일을 하지 못하고 집에서 재택작업을 하는 형편이라 한다. 우리는 그의 안전을 기원하며 이슈추크 박사에게 앞으로는 우크라이나의 역사에 대해서도 글을 써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최근 러시아와 전쟁을 하며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이 뚜렷해지고 있어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한 소개가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흔쾌히 우리의 제의를 수락하였다. 그가 9월에 보내온 논문은 동유럽의 선사문화인 트리필리아 문화에 관한 논문이다. 김현일 연구원이 이슈추크 박사의 영어논문 앞에 일반독자들을 위해 본 논문의 요지를 간략히 소개하였다.

1) 본 논문은 중유럽에서 수천년 동안 번성하였던 선사문화인 트리필리아 문화에 관한 글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겠지만 동유럽에서 쿠르간 문화 이전에 존속한 중요한 문화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쿠쿠텐-트리필리아 문화’라고도 부른다. 트리필리아(Trypillia)는 그 선사문화의 유적이 처음으로 발굴된 키이우 인근의 한 마을 이름이다. 쿠쿠텐이라는 말도 쿠쿠테니(Cucuteni)라는 루마니아 지역에서 따온 명칭이다. 쿠쿠텐-트리필리아 문화는 BCE 5500~2750년 시기 카르파티아 산맥으로부터 우크라이나에 걸쳐 존속한 신석기 및 동석기 문화이다. 시간적으로는 말하자면 환국에서 배달국에 걸친 시기에 존속했던 문화이며 지리적으로 말하자면 현재 동쪽의 우크라이나에서 서쪽의 몰도바와 루마니아까지 펼쳐져 있던 문화이다. 해당 지역의 면적은 35만 평방킬로미터로 초기 도시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 전성기에는 주민의 수가 40만에서 2백만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2) 트리필리아 문화의 발굴은 1890년경 비켄티 흐보이카에 의해 키이우 근처에서 유적이 발굴된 이후부터 이루어져 왔으며 지금도 발굴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트리필리아에는 발굴을 기념하는 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트리필리아 문화가 남긴 유산은 대단히 많다. 주거지, 무덤, 유물을 합하면 2,300점이 넘게 발견되었다. 몰도바와 루마니아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3) 트리필리아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초기 도시의 존재이다. 수천 명에서 수만 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사는 도시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20세기에 들어 항공지자기 영상촬영술(geomagnetic aerial photography)을 통해 확인되었다. 이 기술은 지표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건물의 토대를 드러내준다. 현재 여러 곳의 도시들이 확인되었는데 확인된 도시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탈랸키 마을 근처의 도시이다. 주민 수는 25,000명 정도로 추정되며 주택 수는 2,700동, 도시 크기는 450헥타르에 달한다.

현재 발굴된 도시들은 공통점을 보이는데 중간에 광장이 있는 원형구조를 하고 있으며 주위에는 해자가 있었다. 성벽은 내부성벽과 외부성벽으로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서로 화살의 사거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트리필리아 문화의 도시 유적 발견은 구유럽(Old Europe) 문명사 연구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현재 여러 나라의 고고학자들이 참여한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도시의 주택의 구조도 밝혀졌는데 3층짜리 주택도 있었다. 목재를 프레임으로 하였으며 벽에는 광물 안료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4) 트리필리아 문화의 으뜸가는 유물은 채색도기이다. 도기들에 그려진 문양은 중국의 앙소문화 토기 문양과 유사하여 주목을 끈다. 이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간 교류를 시사해준다. 도기로 된 신전상도 발견되었는데 태극기에서 보이는 것과 똑 같은 태극 문양이 있어 놀랍다.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이 문양은 트리필리아 유물들에서 흔히 나오는 것이라 한다.

5) 트리필리아 인들은 곡물(밀, 보리, 콩, 기장)을 주변으로 수출할 정도로 농업을 발전시켰다. 곡물재배 뿐 아니라 염소, 젖소, 돼지 등 가축도 키웠다. 이들은 50~70년 동안 한 곳에서 농사를 짓다가 지력이 쇠퇴하면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다. 트리필리아 문화 영역이 넓은 것은 이 때문이다.

6) 트리필리아 문화는 1,500년 동안 번성하다가 고고학적 유물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학자들은 퍼즐을 풀기 위해 고심해왔다. 최근 전문가들은 새로운 주민들에 의해 점진적으로 대체되었다고 본다. 줄무늬 토기를 사용하는 목축민, 유목민들이 들어와 이들을 정복하자 일부는 서쪽으로 이주하고 일부는 새로운 주민들에 동화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주자들은 그리스 미케네문명을 일으키는 데 기여한 것으로 저자는 본다. 이들이 그리스 기록에 나오는 ‘펠라스고이’라고 한다. 크레타 섬에서 발견되는 도기에 새겨진 문자가 트리필리아 문자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트리필리아 인들이 서쪽으로 이주하여 켈트문화와 슬라브문화, 게르만문화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Robert Macram et al., The Story of English)

7) 프린스턴 대학의 역사학자들은 트리필리아 문화와 기타 남유럽, 동유럽, 중부유럽의 문화의 형성은 BCE 9천년기로부터 6천년기에 걸친 동에서 서로의 주민들의 이주에 기인한 것이었다고 한다. 중앙아시아 쪽에서 온 사람들은 터키 반도를 거쳐 그리스와 발칸 반도 이북으로 진출하여 구유럽 문화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주민들의 이주와 함께 농업도 전파되었다. 트리필리아 문화는 그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8) 이러한 동서간의 이주의 물결을 증명해주는 것의 하나가 중국의 양샤오 문화의 도기와 트리필리아문화 도기가 아주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환국 문명의 존재(BCE 7197-3897)는 유라시아의 여러 고대문화들이 비슷한 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