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 그들의 깊은 사유와 ‘웃픈’ 삶 21 마르크스 (4)

4. 위대성에 비해 너무나 적게 주목받은 여성

 

런던으로의 망명과 동시에 마르크스 가족의 비극은 시작된다. 가장家長은 전혀 안정된 수입을 갖지 못했다. ‘뉴욕 데일리 트리뷴’ 같은 신문에 글을 발표하는 등의 기고 활동을 통해서 약간의 수입이 생겼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철학자는 안정된 직장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이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중단 없이 내 목적을 좇아야 하며, 시민 사회가 나를 돈 만드는 기계로 바꿀 수는 없다.”

마르크스 가족은 처음엔 런던에서 좀 더 살기 좋은 지역인 첼시에서 살았다. 그렇지만 임대료를 지불할 수 없는 형편에 놓이게 되고 빈촌인 소호로 이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삿짐을 집밖으로 옮겨 놓자 배달원들이 미지불된 영수증을 들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부득이 값나갈 만한 물건들을 골라 전당포에 맡긴다.

자식들은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자주 장의사들을 불러야 했다. 이때의 비참한 상황을 예니 마르크스는 일기장에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1852년 부활절, 가련한 우리 아기 프란치스카는 심한 기관지 카타르를 앓았다. 가엾은 아이는 3일을 심한 고통 속에 죽음과 싸웠다. 넋이 빠져 나간 작은 육신은 뒷방에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 우리들은 다 같이 앞방으로 건너 왔고, 밤이 다가오자 우리들은 바닥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때 곁에 누워있던 살아 있는 세 아이들과 함께 우리는 차갑고 창백하게 식은 채 잠들어 있는 작은 천사를 생각하며 울었다. 가엾은 아이가 죽었을 때는 가장 궁핍했던 시절이었다. 그때 난 암담한 심정으로 이웃에 사는 한 프랑스 망명객에게 달려갔다. … 그는 내게 정말로 진심어린 연민과 함께 2파운드를 건네줬다. 그 돈으로 이제 우리 가엾은 아이가 영원히 안식할 작은 관을 샀다. 그 애는 세상에 태어났을 때 요람조차도 없었다. … 아이가 마지막 안식처로 옮겨졌을 때의 우리의 심정이란.”

프란치스카는 마르크스 부부에게 다섯 번째 아이이다. 바로 그 얼마 전엔 네 번째 아이인 사내아이가 죽었다. 일곱 번째 아이는 사산死産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를 가장 슬프게 한 것은 재능을 타고 났던 에드가의 죽음이다. 에드가는 1855년 몇 달 동안을 병과 씨름하다 그의 곁을 떠난다. 아버지는 이렇게 적고 있다. “주위에 생기를 불어 넣던 사랑스런 아이가 죽고부터서는 집안은 자연 황량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마르크스를 수배 중이던 프로이센의 한 형사는 이 작은 집안이 얼마나 황량하게 보이는지에 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방 하나가 응접실이다. 그 뒤로 침실이 있다. 집안을 통틀어 온전하고 쓸 만한 가구 하나 없다. 모든 게 부서져 있고 토막이 나 있고 헐어 있다. … 응접실 중앙에는 풀 먹인 천으로 덮인 낡고 큰 책상이 있다. 책상위엔 원고들, 책, 신문 그리고 아이들의 장난감, 부인의 재봉도구들 그리고 그 옆에는 또 이 빠진 찻잔들, 씻지 않은 수저들, 포크들이 놓여 있다. … 한 마디로 이 모든 물건들이 한 책상 위에 뒤죽박죽 섞여 있다.”

가족들은 정신적인 안정감을 잃는다. 특히 아내는 정신적 무감각증에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가정부 헬레네 데무스가 마르크스를 꼭 빼닮은 아이를 낳는다. 따뜻한 마음씨를 갖고 있던 이 여자는 그전엔 예니의 친정에서 부엌일을 했었고 나중엔 마르크스 부부를 위해 일했으며, 이들 부부의 고통을 아무 말 없이 함께 나누었다.

마르크스는 데무스 부인이 낳은 아이가 자기 아이란 것을 부인한다. 아마도 그는 사랑하는 예니가 자신의 간통을 도저히 정신적으로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날마다 내게 죽은 아이들과 함께 땅속에 묻히고 싶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불행에 아랑곳없이 마르크스는 여전히 일에 대한 의욕을 찾는다. 1859년 『정치경제학 비판(Zur Kritik der politischen Oekonomie)』 이란 저서가 출간돼 나온다. 책의 서문에는 그가 자기 사유의 축이라고 여긴 인식이 들어있다. “인간의 의식이 그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 의식을 결정한다.”

형식은 다르지만 초기저작들 속에 이미 나타난 이 기본 사상의 뜻은 이런 것이다. “의식은 애당초 사회적 산물이다. 의식은 인간이 실재하는 한에 있어서만 존속한다.”

마르크스는 훗날 『자본론 』에서 이를 약간 바꿔서 헤겔을 겨냥하며 이렇게 기술한다. “관념적인 것은 나에겐 오히려 두뇌 안에서 변환된 물질에 다름 아니다.” 그 모든 형상과 현상들에 있어 물질적 사회적 현존은 종교, 법, 도덕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정신적인 것(의식)을 위한 기초를 이룬다는 말이다.

1860년 무렵 마르크스는 후기 저작이자 대표작인 『자본론(Das Kapital)』 저술에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실제로 그는 대영박물관의 도서관에 앉아 자본주의의 조건들을 탐구하기 위해 책과 신문들을 읽는다.

처음엔 그는 이 작품이 단 몇 주면 완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마르크스가 죽을 당시에도 그 작품은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그의 생전에 총3권 중 제1권만이 출간돼 나온다(1867).

『자본론』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난해한 책이다. 그리고 대중을 독자로 갖고 있지 못했음에도 이 책은 “노동자의 성경”으로 간주된다. 이 책이 오직 영구불변하는 착취 법칙의 기초 위에서만 존속할 수 있는 사회체제에 대한 치밀하고도 피땀 어린 기술들을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착취 법칙은 동시에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붕괴는 우선 역사 법칙을 의식함이 없이 자발적으로 봉기한 노동자들의 혁명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생산양식의 발전이 불가피하게 초래하게 되는 역사적-물질적 과정의 결과로도 설명될 수 있다.

이는 외견상 마르크스의 후기 작품에 나타난 모순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의적인(곧 자발적인) 계기를 생산관계의 결과로 해석함으로써 모순을 해소시킨다. 진정한 혁명은 시기가 무르익을 때 일어난다. 그리고 그 시기는 생산과정이 혁명 의식을 형성시켰을 때 성숙한다.

이 과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것은 노동력, 잉여가치, 착취 그리고 노동자들의 궁핍과 아울러 자본의 축적과 집중들이다. 이 개념들은 아주 단순화시키면 대략 다음과 같은 관계로 정리된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의 노동력은 하나의 상품이다. 그리고 이 상품 역시 다른 모든 상품들처럼 일정한 시장가치를 가지고 있다. 노동력의 시장가치는 일반적으로 노동자가 필수적인 생활수단(의식주, 여가활용 수단, 직업훈련, 가족부양비, 자녀 교육)에 들여야 하는 비용을 기준으로 결정된다. 노동자의 임금이란 간신히 이 비용들을 충당할 정도이지 결코 생산수단을 소유할 만큼에 이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고, 기업가는 그 덕분에 자기가 임금과 생산수단(원료, 기계, 건물)의 형태로 지불해야 했던 금액 이상의 돈을 제품 판매를 통해 벌어들인다. 비용과 거래 가격 간의 차이가 곧 이윤이다. 실제로 이윤 획득은 오로지 한편으로는 인간의 노동력이 가치를 창출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 각자의 노동력이 기업가에겐 임금의 형태로 지불했던 것 이상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만 가능하다. 곧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의 노동력이며, 기업가는 그 잉여가치를 이윤으로서 차지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노동자의 착취가 있다.

상품 판매를 통해 이윤으로 바뀐 잉여가치는 기업가에 의해 재활용된다. 기업가는 그중 일부를 개인 수입(소득)으로 차지한다. 그는 또한 나머지 이윤 가운데 일부를 추가 노동력에 지불되는 자본(가변자본)으로 그리고 나머지 일부를 새로운 생산수단을 사거나 노후화된 생산수단을 대체하는 데 필요한 자본(불변자본)으로 사용한다. 기업가는 자기 몫의 소득을 적게 취하면 취할수록 그만큼 더 많이 투자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많이 투자하면 투자할수록 그의 자본은 더 많이 축적된다. 자본 축적은 다른 사람의 노동을 대가로 한 잉여가치에 대한 기업가의 끊임없는 착복의 과정이다.

이제 새로운 기술들이 새롭고 더 나은 생산 방법들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기업가는 그만큼 더 많은 불변자본을 계속해서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종국에는 획득된 이윤으로는 더 이상 이를 감당치 못하는 사태에 이른다. 다수의 소자본들은 계속해서 매일매일의 생산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소수의 보다 큰 자본에 흡수돼야(집중돼야) 한다. 자본은 이렇게 증식되면서 소수 자본가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이와 동시에 새로운 기술들의 도입은 빠른 속도로 노동자들을 대체한다. 기업가에게는 불변자본 비중이 가변자본 비중에 육박한다. 이 결과 노동자 해고 사태가 일어난다. “산업예비군”이 발생하는 것이다. 늘어나는 실직자의 수는 기업가에게 노동조건을 가혹하게 만들고 고용 중인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고용된 그리고 실직한 프롤레타리아의 물질적 및 정신적 궁핍화가 동시에 가속화되고, 이를 통해 기업가 자신은 잠재적 구매자들을 잃게 된다. 이렇게 해서 기업가에 의한 “자본 활용”(자본을 지속적으로 증식시켜야 한다는 강박감)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그 반면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지속적인 생존위협의 원인들에 대항해 싸울 수밖에 없는 상태로 내몰린다. “…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그 본성상 필연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부정否定을,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고유한 종말을 만들어 낸다. … ”

카를 마르크스는 혁명과 자본가들의 재산몰수로 종결될 그같은 파산을 고대하지만 이는 헛된 희망일 따름이다. 그는 병든 몸과 쓰라린 마음으로 노동자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착취자들과 화해하는가를 지켜본다.

다행히 엥겔스가 삶의 황혼에 있는 그를 위해 생활비를 고정적으로 보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마르크스는 최소한 가난 속에서 궁색하게 지내는 일만은 벗어나게 된다.

그는 높은 명성을 가지고 있지만 쓸쓸함 속에 말년을 보낸다. 1881년 그의 아내는 암의 고통을 겪으면서 죽음을 앞두고 있고 그 역시 폐렴과 늑막염을 앓으며 옆방에 누워 있다. 그의 딸은 이렇게 적고 있다.

“큰 방에는 엄마가 누워 있었고 그 옆의 작은 방에는 아빠가 누워 있었다. 서로에게 그렇게 친밀하고, 떨어질 수 없이 다정하게 얽혀 있던 두 분은 이제 더 이상 한 방에 같이 있을 수 없게 됐다. … 아빠의 병세가 한때 호전된 적이 있었다. 난 결코 그날의 아침을 잊을 수 없다. 아빠는 기운을 되찾고 엄마가 누워있던 방으로 건너갔다. 두 분은 다시 젊은 날로 돌아갔다. 엄마와 아빠는 두 사람이 함께 삶을 시작하는, 사랑에 빠진 처녀였고 청년이었다. 두 분은 서로 각자 다른 시간에 삶과 작별했던, 병에 지친 늙은 남자, 죽어가는 늙은 부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 죽음과의 괴로운 싸움도 없이, 천천히 평온하게 깃드는 죽음. 그 눈은 어느 때보다도 빛나고 아름답다.”

마르크스는 부인과 사별 후 약 15개월을 더 살지만 내적으로는 이미 허물어진 상태였다. 예니는 시련 속에서도 그를 따랐고 그의 역사적 소명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어준 사람이었다. 하인리히 뵐(Heinrich Boell)이 기술하는 것처럼, 그녀는 그 위대성에 비해 너무나 적게 주목받은 19세기 여성들 중 한 사람이다.

마르크스는 1883년 3월 14일 폐농양으로 사망한다. 그가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히던 날, 엥겔스를 포함 불과 몇 사람만이 그의 묘 앞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러시아의 10월 대혁명이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35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