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 그들의 깊은 사유와 ‘웃픈’ 삶 32 : “하나의 별을 향해 가는 것, 오직 그것뿐!” -마르틴 하이데거 (3)

하나의 별을 향해 가는 것, 오직 그것뿐!” -마르틴 하이데거

 

3. 시간의 심연으로

 

하이데거의 사상이 세계 도처에서 논의되고 있음에도, 정작 그에게서는 세계에서 흔히 유행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에게는, 영국인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이 독일 철학자들에 대해 확고하게 단정하고 있는, 삶에 대한 사상의 느슨한 구속력이 발견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파티장에서 위스키 잔을 손에 들고 자기 의견을 밝히는 그런 모습을 하이데거에게서 상상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는 진지하며 또한 고향에 깊은 결속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시인 요한 페터 헤벨(Johann Peter Hebel)(“라인 지방 가정의 벗”/ 1760~1826)은 그가 선호하는 작가들 중 한 사람이다. 이 시인에 얽힌 일화와 그가 남긴 경구들에는 이해하기 힘든 깊은 뜻이 들어 있는 것들이 많다. 함부로 낭비하는 자는 자신의 것에 대한 무용한 향락이 있는 반면, 인색한 자는 어떤 향락도 갖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하이데거가 특히 사랑하는 시인은 정신착란 상태에서 죽은 언어의 천재 프리드리히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 1770~1843]이다. 철학자는 횔덜린에 관해서 다수의 중요한 논문들을 저술하기도 한다.

1923년 34세의 강사[하이데거]가 마르부르크 대학 철학부의 원외 교수로 채용되던 때는 이미 학자들의 세계에서는 명성을 얻고 있을 때다. 그의 강의에는 학생들이 몰려오고, 동료들은 은근한 질투심을 느끼면서 그의 강의를 청강한다. 유명한 존재론자 니콜라이 하르트만(Nicolai Hartmann)도 그중 한 사람이다.

새롭게 출현한 인물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숭배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많은 제자들이 “그가 헛기침을 하거나 침을 뱉는”(가다머) 독특한 모습들을 닮고자 한다. 또 하이데거의 의복을 따라 입기도 한다. 하이데거가 입는 옷은 화가인 오토 우벨로데(Otto Ubbelohde)에 의해 디자인 된, 긴 외투와 승마용 바지로 이뤄진 “실존적 의상”이다. 그 차림새의 하이데거란 영락없이 일요일 날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나선 시골 사람 같은 행색이다.

그렇지만 특히 유행이 된 것은 그의 독특하고 신비스런 독일어들이다. “하이데거식 언어(heideggern)”에 대한 열광이 마치 유행병처럼 번져 간다. (진리의) “은폐(Bergung)”, “세상 사람들(Man)”과 “잡담(Gerede)”에 “빠져있음(Verfallenheit)”, (사물의) “손안에 있음(Zuhandenheit)”과 같은, 이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말들이 이제는 철학 개념의 히트 리스트의 맨 앞을 차지하게 된다.

그렇지만 젊은 사상가의 명성은, 베를린의 문부성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던 모양이다. 1925년 마르부르크대학의 (보다 권위 있는) 정교수 자리가 비게 되자, 당국은 그 자리에 만케 교수를 임명하려고 한다. 그때 마침 작성돼, 직접 그의 손으로 제출된 『존재와 시간』의 원고는 당국의 신임을 얻지 못한다.

당시 독일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인 막스 셸러(Max Scheler)가 문부성 관리들만큼이나 신중하지 않은 방식으로 정부의 계획에 반대한다. 그는 베를린으로 쫓아가 문부성 장관을 대면하고는 “당신 이름을 영구히 욕되게 하려면 하이데거의 윗자리에 만케를 앉혀야 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문부성은 재빨리 애초의 계획을 바꿔 하이데거를 마르부르크 대학 정교수로 임명한다.

하이데거는 강단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즉 그의 대부분의 저서들은 학기 중에 강의한 강의록을 기초로 저술된 것들이다. 그가 이른바 “존재를 둘러 싼 거인들의 싸움”(플라톤)에 끼어들게 된 대표작 『존재와 시간』도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하이데거 자신도 플라톤처럼 군사적인 용어를 빌려 자기 생각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결코 임의로 회피할 수 없고 감내해야 하는 공격”이란 표현이 그런 예이다.

『존재와 시간』이란 제목 자체가 그의 근본 사상을 드러내 주고 있다. “존재”는 “시간”과 상관이 있다. 그런데 이때 시간이란 무엇인가? 사물들 가운데 하나인가? 우리가 시간을 갖는가? 모든 사람이 각자의 시간을 갖는가? 아니면 시간이 우리를 갖는가?

우리가 “있다(이다, ist)”를 통해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존재”라는 말은 더욱 수수께끼이다. 존재는 모든 개념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이다. 존재는 어떤 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또한 존재는 (마치 사과가 나무로부터 나오듯) 그것이 비롯돼 나올 수 있는 그보다 상위의 개념이 없으며, 그래서 정의될 수도 없다. 이런 이유로 헤겔은 외경심에 가득 찬 채 존재에 대해 말하기를, “신의 첫 번째 사유”라고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서구의 철학들은 존재에게 나름의 규정을 덧씌우기 위해 애썼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존재 설명들을 연구하면서 놀랍고 진기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 해석들에는 시간이 숨겨진 방식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곧 이들 사상가들은 존재를 해석할 때 주로 시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예를 들어 헤겔은 절대정신의 “존재유형”을 “영원성”이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영원성은 장차 있게 되는 것도 기왕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영원성은 ‘현재한다(ist)’. 영원한 것은 절대적인 현재이다.”

비록 여기서 헤겔이 결코 시간 개념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존재를 시간과 연관 짓고 있다. 그리고 헤겔 이전의 모든 위대한 형이상학자들 또한 마찬가지로 그렇게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한결같이, 하이데거가 처음으로 발견하고 정식화한 바처럼, “존재를 지속적 현존(Anwesenheit)”으로 그리고 헤겔은 절대정신의 존재를 “가장 높은 지속성의 현존”으로 규정했다.

“지속적 현존”과 같은 말이 우리가 시간으로 느끼는 것과는 거의 무관하다는 점은, 예를 들어 시계를 쳐다보기만 해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 때문에 하이데거는 또한 초, 분, 시간으로 이뤄진 일상에는 붙잡히지 않는 “근원적인 시간” 또는 “시간의 가장 내적인 본질”에 관해서 말하기도 한다. 사상가에 따르면, 우리는 단지 “시간의 가장 내적인 본질”로부터 파생돼 나온 시간만을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의 가장 내적인 본질”을 길어 올린 하이데거는 매우 복잡한 증명을 거친 후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시간의 중심에 존재의 의미가 놓여 있다.

이같은 인식이 가져 온 결과는 당장 눈에 띄지는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이는 한나 아렌트가 단지 플라톤의 작품들에게서나 경험한, 거센 사상의 질풍을 불러일으킨다. 하이데거가 존재의 의미를 끌어내고 그리고 거기에서 시간을 발견한 이후, 인간, 진리, 학문 등에 관한 물음 같은 서구 사유의 근본 주제들은 새롭게 제기되고 철저하게 캐물어져야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유-변혁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광범하다.

하이데거의 새로운 철학과 종래의 철학 사이의 차이를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게 하이데거의 “실존(Existenz)”이란 개념이다. 칸트와 같은 사상가들은 인간을 오성과 이성을 통해 탁월함이 특징지어지는 존재라고 정의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전통을 뿌리치고 “현존재(Dasein)”와 “실존”으로서의 인간을 철학함의 중심에 둔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칸트 등 시간을 다룬 뛰어난 철학자들을 통해서 하이데거는 시간이 인간의 본질과 일정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은 우리 자신 안에 있다고 설명한다(“영혼이 없다면 시간은 있을 수 없다”). 또한 칸트는 인간을 시간이 깃든 곳으로 가정한다. 하지만 시간에 대해 가장 아름답고 직관에 찬 설명을 하는 사람은 성인聖人이며 교부敎父인 타가스테(알제리) 출신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시간이란 하나의 신비이다. 지나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가올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속하는 게 아무 것도 없다면 현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미래와 과거란 무엇인가? 이 둘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는 아직 존재하지 않고, 다른 하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현재의 경우는 어떠한가? 현재가 시간이 되기 위해서는 그 즉시 무로 사라져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질문한다. 세 가지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하나의 시간만이 존재하는가? 미래와 과거란 단지 현재 속에만 있는가? 내가 금요일 날 현재 이번 일요일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 마음속의 장면은 금요일 지금 이 순간에 있다. 또 내가 지난 일요일에 대해 생각할 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 그렇다면 현재에 세 가지 시간이 모두 있는가?

그러나 현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측정될 수 있는가? 과거와 미래의 경우 그 점은 분명하다. 우리는 내년에 또는 작년에 이탈리아로 휴가를 갈 것이라고 혹은 갔다 왔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지금 현재라고 말한다면, 그 순간 현재는 지나가고, 또 다른 현재가 그 자리를 메꾼다. 현재란 도무지 측정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다음의 결과를 갖는다. 이제 시간을 측정하고자 할 때 단지 과거와 미래만을 대상으로 할 수 있지,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 확정된다. 우리는 이미 있었던 것, 아니면 아직 있지 않은 것만을 측정할 뿐이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는 결국 있지 않은 어떤 것을 측정하는 것이다.

이같은 언급들은 하이데거에게, 그가 보기에 존재의 의미를 이루고 있는 시간의 가장 내적인 본질에 대한 물음을 어디에서부터 캐물어가야 할지를 알려준다. 그곳은 실존하는 인간이다. 파생된 (시계상의) 시간이 이미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면 하이데거가 찾고 있는 근원적 시간은 더더욱 인간 본질 안에 들어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본질의 어느 영역에서 근원적 시간을 찾아야 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런 것이다. 인간 본질에는 근원적 시간( 또는 시간의 가장 내적인 본질)과 만나는 근원적인 차원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인간은 이 영역을 지각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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