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별을 향해 가는 것, 오직 그것뿐!” -마르틴 하이데거
5. 은둔과 침묵의 나날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은 사상가가 이같은-물론 전적으로 평화적인-믿음을 더욱 공고하게 다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10개월 후 하이데거는 지도자[히틀러]야 말로 정치적으로 분열되고 대량 실업사태로 침체돼 있는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정치가라고 확신한다.
나치[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가 권력 장악에 성공하던 해, 사회민주당원인 폰 묄렌도르프 총장은 나치에 의해 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철학자에게 후임을 맡아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
행정 감각이란 전혀 없는 하이데거는 몹시 망설이면서도 결국 전임자의 뜻을 따른다. 그가 이같은 결정에 이른 것은 대학을 위한 명분 때문이었다. 그는 대학을 정치로부터 지키고자 하며, 또 “독일 대학의 자기주장”이란 제목의 총장 취임연설에서도 이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물론 철학자는 통제에 맞선 대학의 자기주장이 힘겨운 일임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다. 그 때문에 그는 취임 연설문에서 국가사회주의자들의 불신을 해소시켜 주는 한편, 이들에게 대학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의 내용을 포함시킨다. 교수와 학생 스스로가 대학의 안정과 쇄신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노동의 봉사”, “병역의 봉사”, “앎의 봉사”니 하는 말들을 단숨에 쏟아내기도 하며, 또는 “독일 민족의 운명을 그 역사에 각인시키는 정신적 과업의 엄격함”에 대해 얘기한다. 나아가 사상가는 총장으로서 국가사회주의당에 당원으로 가입한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당이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학내 주요 보직(학장)들에 당원들을 임명하려 하자 이에 대한 항의로 총장직을 사임한다.
그에게서는 반反유태적 표현을 찾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미나 참고 문헌에서 유태인 저자의 작품을 제외시키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또 학생들과 히틀러 청년단원들이 프라이부르크 대학 앞에서 열려고 한, 악명 높은 “책 소각 행사”를 금지시킨다. 나중에는 심지어 당 사찰요원들에 의해 감시를 당하는 입장에 놓인다. 그는 또한 병역 봉사가 면제돼 있는, 5백 명의 “주요 학자 및 예술인”에 들지도 못하고 1944년 여름, 국민돌격대로 징집돼 라인 강변의 참호 쌓는 작업에 투입된다.
그럼에도 1933년 그가 보인 정치적 예견력의 부족은 재앙으로 변한다. 1945년 프랑스 점령군은 그의 정교수직을 박탈한다. 1951년에 가서야 해직 조치는 취소되지만, 그러나 그 사이 62세가 된 하이데거는 스스로 대학에 복귀하기를 원치 않는다. 정식으로 사표를 제출하고 교수직에서 완전히 물러난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그는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과거 전력 시비에 휘말려든다. 적대자들은 특히 그의 철학에 파시스트적인 사유 소재들이 포함돼 있다는 점을 입증해내려고 애쓴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이같은 공격에 대해서 어떤 대응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연 것은 슈피겔(Spiegel)지紙와의 인터뷰에서이다. 하지만 인터뷰 내용은 하이데거의 바람에 따라 그의 사후死後에야 비로소 공표될 수 있었다.
“네스케 출판사(Neske-Verlag)”는 하이데거가 이미 죽고 난 뒤임에도, 그의 명예에 커다란 흠집을 내는 일을 범한다. 네스케는 하이데거의 친구들과 적대자들이 그를 회고하는 내용을 담은 “하이데거에 대한 기억”이란 책을 펴낸다. 그런데 대만 출신의 한 교수가 이 책에 기고한 글에서 유태인 철학자이자 카르멜 수도회 소속 수녀인 에디트 슈타인(Edith Stein)이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한 것과 관련해 하이데거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이 수녀는 나치 독일을 출국할 수 있도록 보증을 서 달라는 부탁을 하이데거에게 여러 차례 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뿐더러, 심지어는 슈타인 수녀가 프라이부르크로 그를 만나러 가고 싶다고 하자 자기가 집에 없을 것이라고 둘러대 방문을 거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쾰른에 있는 수도회의 “평화의 마리아”는 전혀 게슈타포[독일 나치정권의 비밀국가경찰]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지 않았던 상태였다. 동료 수녀들의 증언에 따르면, 슈타인 수녀는 아무런 방해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38년 그녀는 자발적으로, 또 적법한 비자를 받아 독일을 출국했으며, “혹시 있을지 모르는 위해”로부터 쾰른 수녀원을 안전하게 보호할 목적으로 네덜란드 수도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후 1941년 네덜란드에서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된 그녀는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1938년까지는 슈타인 수녀가 하이데거에게 도움을 부탁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목적으로 그녀가 하이데거에게 편지를 쓰거나 그를 방문한 적도 전혀 없었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수도회에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스스로 입증될 수 있는 일이다. 편지는 수녀원장의 분명한 허락이 있어야만 쓸 수 있었으며, 여행이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에디트 슈타인의 동료인 마리아 아마타 네이어(Maria Amata Neyer) 수녀는 대만 출신의 교수가 제기한 주장에 대해서 이렇게 논평한다. “하이데거-슈타인 사안은 모두 항간의 풍문에 속한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네스케 출판사는 책들을 서점에서 회수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대부분 강연 목적의 몇 차례의 여행을 제외한다면, 하이데거는 25년 동안을 완전히 프라이부르크의 자택이나 토트나우베르크의 오두막에서 칩거한 채 은둔 속에서 보낸다. 아침 6시 30분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부인과 함께 아침을 먹는다. 8시 30분부터 12시까지는 연구실에 들어 앉아 사색을 하거나 글을 쓴다. 이 시간에는 부인도 그를 방해하지 못하게 돼 있다.
12시경쯤에 부인이 우편물을 가져다주고 오후 1시에 그를 불러 점심 식사를 한다. 잠깐 낮잠을 잔 후 그는 2시부터 5시까지 다시 연구에 몰두한다. 오후의 연구가 끝나면 그를 찾아온 방문객들을 만나는 시간으로 이어진다. 그가 가려서 만나는 방문객들은, 말하자면 은둔하고 있는 위대한 사상가를 경배하기 위해 찾아 온 순례자들인 셈이다. 그리고 저녁 6시부터 7시까지는 그가 매일같이 어김없이 하고 있는 산책 시간이다.
저녁 식사 시간은 대략 8시 무렵이다. 두 부부는 레코드음악(바흐와 모차르트)을 들으면서 상대방에게 시를 낭독해주며 하루의 휴식을 취한다. 하이데거는 그가 가장 애호하는 시인인 횔덜린의 시 구절을 들려주는 한편, 아내는 그녀가 좋아하는 작가인 괴테와 슈티프터의 작품들을 읽어준다. 10시가 될 때쯤이면 의례 이 부부는 잠자리에 든다.
하이데거는 신문을 거의 보지 않으며 텔레비전은 아예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중요한 축구경기 중계가 있는 날은 그가 옷을 맞춰 입는 재단사 집으로 가서 TV를 시청하고는 하였다.
그는 80회 생일을 맞아 딱 한번 직접 TV에 출연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때도 그는 자기 개인적인 것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마치 제왕과도 같이 군림하고 있는 칼 마르크스의 다음과 같은 사상을 “근거 없는 명제”라고 비판한다. “철학자들은 늘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세계를 변혁시키는 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세계 변혁이란 하나의 세계 표상, 곧 하나의 세계 해석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앞 문장에서 버리려고 한 것을 뒤의 문장에서 무의식적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 3년 동안 하이데거는 주로 원고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한다. 이 가운데 이제껏 책으로 출판돼 나온 것은 고작 몇 권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일단 통 70권으로 기획된 전집의 완결판을 그의 손으로 출간하고 싶어 하지만, 1980년 현재까지 그 중 10권만이 세상에 나왔을 뿐이다. 약 30년이 지난 뒤에야 마지막 권이 인쇄될 수 있을 그 전집에는 다음과 같은 헌사獻辭가 실려 있다.
“ … 나의 아내 엘프리데 페트리에게 바침. 긴 여정 동안 한결같은 그녀의 내조는 내가 필요로 했던 도움이었다.”
그는 1976년 5월 26일 부인이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전혀 예기치 못하게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의 시신은 고향 메스키르히에 있는 부모의 묘지 옆에 묻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