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학 속의 해원- 〈공무도하가〉 이야기
노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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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가요 〈공무도하가〉(일명 〈공후인〉)는 우리 문학사의 첫머리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첫 단추다. 어떤 일이든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 다음 ‘단추’에 영향을 미치는 까닭이다. 따라서 〈공무도하가〉는 우리 문학사의 한 쪽 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하나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공무도하가〉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작품이다. 방금 우리는 ‘불행하게도’라고 했다. 그만큼, 〈공무도하가〉는 작품 자체는 물론이고, 작품 외적으로도 한이 많은 작품이다. (여기서 ‘한’은 ‘원’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원과 한의 구체적인 이야기는 다른 기회로 미루자.) 〈공무도하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전거문제, 작자 문제, 제작시기, 제명문제, 〈공무도하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국적과 신분 문제, 배경설화 문제 등 연구자들 사이에는 아직도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논란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불행하고, 또한 그만큼 한이 많다는 뜻도 될 터이다.
문학을 작품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우리 고대가요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러지를 못했다. 십중팔구는 작품을 뒷전에 두고 작품 외적인 배경설화부터 얘기를 한다. 〈공무도하가〉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공무도하가〉야말로 논란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는 〈공무도하가〉라는 텍스트 자체만을 놓고 이야기를 전개하자. 결론부터 얘기하면,〈공무도하가〉는 한과 해원의 과정을 이야기한 작품이다. 한 마디로 해원을 이야기한 작품이다. 박춘우(의 논문 「고시가에 나타난 한의 맺힘과 풀림」)식으로 표현하자면 ‘한의 맺힘과 풀림’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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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리 민족이나 문학의 보편적 정서를 한이라고 이야기해 왔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우리 문학의 정체성(identity)을 구명하려는 노력과 연관된다. 일찍이 한에 대하여 다양한 논의를 전개해 온 천이두는 대체로 한의 개념을 1)한자적인 사전적 의미에 구애되어 원한이나 허탄 등으로 보기도 하고, 2) 설움 곧 감상이라는 피상적인 단어로 보기도 하며, 3) 한/해한(解恨)이라는 이원 대립의 등식을 설정하여 한이란 맺힘이며, 이는 풀어주어야 할 것, ‘맺힘―풀림’의 구조로 이해한다. 1)과 2)는 한의 개념을 부정적으로 파악하고 있고, 3)은 부정에서 긍정으로의 변이과정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박춘우는 3)의 손을 들어주면서, 한의 심성이 우리 민족의 근원적 정신구조를 이루고 있는 요소 중의 하나로 그 맺힘과 풀림의 과정이 여러 작품에서 핵심적인 요소를 이루고 있다는 결론으로 우리 고시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우리 민족이나 문학의 보편적 정서가, 우리 민족의 근원적 정신구조를 이루고 있는 요소가 과연 한인가. 한이기만 한가. 아니다. 해원이다. 해원이여야 한다. 한이 틀렸다는 애기가 아니다. 우리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한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반쪽만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렇다. 맺힘이 있으면 풀림이 있고, 한이 있으면 해원이 있다. 그러나 앞선 이야기들은 대부분 전자에 무게를 두어왔다. 우리는 후자에 무게 중심을 두고자 한다.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當奈公何
그대여, 물을 건너지 마오.
그대 결국 물을 건너셨도다.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가신임을 어이할꼬.
〈공무도하가〉 전문이다. 앞선 이야기들은 배경설화를 앞에 놓고 이 작품을 옛사람들의 집단적 놀이의 한 형태로 보기도 하고, 무당의 푸닥거리로 보기도 했다. 또한 어떤 이는 죽음을 노래한 작품으로 보았고, 고대 여성의 지아비에 대한 순결과 소박한 헌신적 순애의 자세를 보며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극치로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주신(酒神)과 강물의 요정인 님프인 동시에 악신으로 해석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미숙련된 샤먼의 고행과 실패로, 또 어떤 이는 죽음을 이기는 모성애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
바로 여기에, 우리는 이야기 하나를 보탠다. 〈공무도하가〉는 해원의 노래다. 해원을 노래하고 있다. 아니, 해원의 현장,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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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가〉의 시간적 배경은 작품 자체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다. 배경설화를 보면, 얘기가 많아지겠지만, 여기서는 작품 자체만을 가지고 이야기하자. 공간적 배경은 강이다. 강물은 마지막 행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행에 모두 등장한다. 그만큼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강명혜가 「죽음과 재상의 노래―〈공무도하가〉」에서 지적하였듯이 시적 화자에게 있어서 강물은 긍정적인 물이 아니다. 아름다운 이미지도 아니다. 죽음의 물이다. 좌절의 물이다. 원망과 한탄, 저주의 물이다.
1행에서 화자는 청자에게 물을 건너지 말라고 애원한다. 사건이 일어난 날의 강물은 폭우로 물이 불어나고 물살이 세찼거나, 아니면 그것의 강물이 원래 깊고 물살이 세어서 간단한 부기만 지니고 건너기에는 헌함 곳이었는지 모른다는 강명혜의 추측도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박춘우는 한의 ‘맺힘―풀림’의 서사구조를 맺힌 자(피해자), 맺히게 하는 자(가해자), 푸는 자의 세 행위자가 벌이는 기본적 행위과정을, 풀리지 않는 경우의 서사적 가능성까지 고려해서 하나의 도식으로서 A. 소망, B. 좌절, C. 맺힘, D. 풀려는 노력, E. 풀림//안 풀림으로 요약하고 있다. A~C는 한이 맺히는 과정이고 D~E는 풀림의 과정이다. 결국 ‘맺힘―풀림’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공무도하가〉의 1행은 소망이다(그는 배경설화를 다루고 있으므로 청자의 ‘아내의 소망’이라고 쓰고 있지만).
우리는 소망 대신 욕망이라고 표현하자. 사전적 의미에서 전자는 어떤 일을 바람 또는 그 바라는 것이고, 후자는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런 마음이다. 거칠게 얘기하면 무엇인가를 원하는 것이다. 원하는 것이지만, 아무래도 후자가 좀 더 적극적이다.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해원이고, 해원 저쪽의 원한이다. 원한은 욕망이 좌절당할 때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욕망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텍스트 1행에서 표면적으로는 화자의 권유형식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욕망의 드러냄이다. 화자는 청자에게 물을 건너서는 안 된다는 자기의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2행에서, 청자는 화자의 소망을 묵살하고 물을 건너간다. 화자의 욕망이 좌절당한 것이다. 욕망이 좌절당했으니 한이 맺힐 수밖에 없다(이 경우는, 타자인 청자에 의해 화자의 욕망이 좌절당했으므로 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3행에서 청자는 물에 빠져 죽고 만다. 박춘우의 지적에 의하면 맺힘이다. 물론 한의 맺힘이겠다. 우리의 이야기는 좀 다르다. 강을 건너지 말아 달라는 화자의 욕망이 좌절당하고 한이 맺힌 것은 이미 2행에서 진행되었다. 3행에서는 이미 화자의 욕망을 좌절시켜버린 청자가 물에 빠져 죽었다. 물에 빠져 죽은 청자를 보고 한이 맺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오히려 한 자체의 풀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적어도 욕망이라는 시각에서는. 그러나 여기까지는 화자의 입장이다.
청자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되는가. 1행에서 청자는 물을 건너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2행에서 청자는 화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강을 건넘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실천했다. 그러나 3행에 와서 욕망이 좌절당하고 만다. 이 경우, 청자는 스스로 욕망이 좌절당했으므로 한이 맺혔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4행이다. 지금까지 논자들은 4행 보다는 3행을 주목해 왔다. 한을, 한의 맺힘을 중요하게 생각한 까닭이다. 4행에서 화자는 ‘가신임을 어이할꼬’하고 한탄한다. 박춘우에 의하면 맺힌 한을 풀려는 노력은 있으나(D), 풀림(E)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배경설화를 참고로 한다면 죽음으로써 풀려는 노력과 함께 풀림이 나타난다고 했다. 이것은 설화에 대한 시가의 의존관계를 나타내주는 좋은 예이며, 그러므로 D에서 풀려는 노력은 풀림이 잠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와 같은 독해에 대해 우리의 이야기는 좀 아쉬움이 없지 않다. 작품을 굳이 작품 외적인 배경설화와 연결시켜 이해하려는 태도가 좀 불만이다. 물론 배경설화를 곁들이면, 이와 같은 결론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 배경설화에 따르면 화자가 청자를 따라서 물에 빠져 죽었으므로. 그러나 이와 같은 배경설화를 텍스트 독해의 열쇠로 삼았을 때는 ‘작품 감상’이 획일적으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
굳이 배경설화가 아니더라고 우리는 4행에 와서 해원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가신임을 어이할꼬’ 하고 한탄하는 화자의 행위 자체는 풀림이요, 해원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이다. 한 마디로 4행은 해원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앞선 3행까지가 바로 이 4행에 이르는 여정이라고 한다면, 이 4행은 이 작품이 이르고자 하는 종착지이다. 결론적으로 고대가요 〈공무도하가〉는 해원을 노래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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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가〉의 화자는 여성이다. 이 사실은 배경설화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그러나, 화자가 굳이 여성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 분명한 것은, 텍스트에서 드러나는 주조음은 여성이다. 〈공무도하가〉는 여성 화자의 해원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구체적으로는 한 여성의 한의 맺힘과 풀림을, 해원을 탁월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여성의 한과 해원에 대해 일찍이 19세기 말에 활동한 증산상제만큼 적극적으로 표현한 이도 드물 것이다. 그는 여자의 한이 천지에 가득 찼다고 말했다. 봉건적 질서가 흩뜨려지는 때라고 하지만, 당시로서는 실로 파천황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다.
선천은 억음존양(抑陰尊陽)의 세상이라. 여자의 원한이 천지에 가득 차서 천지운로를 가로막고 그 화액이 장차 터져 나와 마침내 인간 세상을 멸망하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이 원한을 풀어 주지 않으면 비록 성신(聖神)과 문무(文武)의 덕을 함께 갖춘 위인이 나온다 하더라도 세상을 구할 수가 없느니라.(『증산도 도전』2-52)
그리고 증산상제는 “이 때는 해원시대(解寃時代)라.”(『증산도 도전』 2-24)고 선언했다. 그렇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과제는 해원이다. 바로 그 해원의 현장을, 해원의 정서를 고대가요 〈공무도하가〉는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공무도하가〉가 고대가요는 물론 우리 문학사의 첫 단추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 첫 단추의 향방에 따라 다음 단추의 운명도 결정될 것이다. 실제로 우리 문학사에서 작품 〈공무도하가〉의 정서는 굵은 크기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신라향가, 백제가요 〈정읍사〉, 고려가요 〈정과정곡〉, 〈이상곡〉, 〈만전춘별사〉, 그리고 김소월, 한용운, 한하운, 서정주, 박재삼의 작품들이 그것이다. 우리 문학 속에서, 해원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