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어휘에 남은 신화의 흔적
정인숙
1998년에 개봉되었던 타이타닉 (Titanic)이란 영화가 있다. 많은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아 2013년 현재 매출액 기준 전 세계 역대 흥행 2위에 오른 이 영화는 1912년에 있었던 타이타닉 호의 침몰을 소재로 했다. 초호화여객선이었던 타이타닉 호는 1912년 4월 10일 영국을 떠나 뉴욕으로 향하던 중 빙산에 충돌, 대서양에 가라앉았고, 2,200여명의 탑승자 중 1,5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이 역대 최악의 선박 사고의 원인으로 선박 장비 과신, 구명 장비 미흡 등 여러 가지가 꼽히고 있는 가운데, 미신이라고 할지는 모르지만 사고를 그리스 신화와 연결시켜서 그 비극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냐하면 타이타닉이란 배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티탄 (Titan) 에서 유래했고 그들은 파괴적인 행위를 했던 거인족이기 때문이다.
신화에 따르면 태초의 무질서 (chaos)에서 하늘의 신 우라노스 (Ouranos)와 대지의 여신 가이아 (Gaia)가 탄생했고 이들은 강력한 힘을 지닌 여러 거인 족을 낳았다. 그 중의 하나가 티탄 족이었다. 가볍고 강도가 높아 오늘날 항공 우주 산업, 해양, 군수 산업, 의료 산업 등에서 다양하게 사용되는 금속 티타늄 (titanium)의 이름도 티탄에서 유래하였다. 로마인들은 그리스를 정복한 뒤 그리스 신들의 이름을 라틴어 표기로 바꾸어서 하늘의 신은 Uranus, 대지의 여신은 Gaea가 되었다. 티탄족의 부모인 우라노스와 가이아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오늘날 각 분야의 영어 어휘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가이아는 geometry (기하학), geology (지질학), geography (지리) 등 오늘날 geo-로 시작하는 영어 어휘들에 그 자취를 남겼다. 우라노스의 경우에는 1781년 천문학자 윌리엄 허셜 (William Herschel)이 발견한 행성에 이름을 빌려주게 되었는데, 망원경을 통해 발견해 낸 최초의 행성인 천왕성(Uranus)이 바로 그것이다. 우라노스는 또한 방사성 원소인 우라늄 (uranium)에도 흔적을 남겼다.
티탄 족의 크로노스 (Cronus)는 우라노스의 아들이었는데 반란을 일으켜 우라노스를 몰아냈다. 패배한 우라노스는 크로노스도 자신처럼 아들에 의해 축출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 상황을 막고자, 크로노스는 아내 레아 (Rhea)가 자식을 낳을 때마다 잡아먹었다. 다섯 명의 자식을 이미 잃었던 레아는 돌에 아기 옷을 입혀 크로노스가 먹게 하고 여섯 번째 아이를 감추었다. 이 아이가 크레타 섬에서 양치기의 보호 속에 자란 제우스였다.
제우스는 어머니의 도움을 얻어 정체를 숨기고 크로노스의 시중을 들다가 구토 약을 몰래 넣은 음료수를 마시게 했다. 이를 마신 크로노스는 제우스의 다섯 남녀 형제를 토해 냈다. 구출된 신들은 티탄 족에 대항, 반란을 일으켜 승리를 거두었다. 제우스는 신들의 지배자가 되었고 그의 형제들인 포세이돈 (Poseidon)과 하데스 (Hades)는 각각 바다와 지하 세계를 다스리게 되었다. 로마인들은 제우스와 포세이돈을 각각 자신들의 신 Jupiter및 Neptunus와 대비시켜, 이들의 이름은 태양계의 행성인 목성 (Jupiter)과 해왕성 (Neptune)에 반영되었다. 한편 하데스가 맡은 지하는 죽은 사람들의 세계였을 뿐만 아니라 금속이 산출되는 곳이었으므로 하데스는 부(富)의 신이었던 플루토스 (Plutus)에서 유래한 Pluto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한때 태양계의 아홉 번째 행성이었다가 2006년 새로 정해진 행성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하여 행성에서 퇴출된 명왕성이 Pluto이다.
제우스의 여자 형제들로는 결혼과 출산 및 가사의 여신인 헤라 (Hera), 농경의 여신인 데메테르 (Demeter), 화로의 여신인 헤스티아 (Hestia)가 있었는데 로마에서 대비되는 신들은 각각 Juno, Ceres, Vesta였다. 1년 중 6번째의 달은 여신 Juno를 기려서 June이 되었고, 6월은 결혼식을 올리는 달로 알려져 June bride (6월의 신부)란 표현이 생겼다. 또한 농경의 여신 Ceres로부터 아침 식사용으로 가공 곡물 시리얼 (cereals)이 유래하였다.
그리스인들은 제우스와 그 형제들 및 자손 신들이 올림포스 산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올림포스의 신들 (Olympians)’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제우스를 위해 올림피아 (Olympia) 계곡에서 4년마다 경기를 열었다. 기원후 394년 로마 황제에 의해 폐지된 이 경기는 1896년 프랑스의 쿠베르탱 (Coubertin) 남작의 주도하에 Olympic Games로 부활되었다.
올림포스의 신들 중 미와 사랑의 여신은 아프로디테 (Aphrodite) 인데 로마인들의 신으로는 Venus였다. 태양계에서 태양과 달 다음으로 밝게 빛나고 아름다운 행성인 금성은 Venus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또한 venerate (공경, 숭배하다), vineral disease (성병) 등이 Venus에서 유래하였다.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는 에로스 (Eros)란 이름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활과 화살을 지니고 다니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에로스는 오늘날 eroticism (미술, 문학 등을 통한 성적 표현), erotic (성적인) 등의 단어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영어에서는 Eros 보다 로마 이름인 Cupid가 더 널리 쓰인다.
제우스와 헤라의 아들인 아레스 (Ares)는 전쟁의 신이다. 로마의 전쟁의 신은 마르스 (Mars)였으며 그의 이름을 딴 행성이 화성 (Mars)이다. 1년 중 3번째 달인 3월은 그를 기려 March가 되었다. 한편 아레스에게는 포보스 (Phobus)와 데이모스 (Deimos)라는 아들들이 있었다. Phobus는 매우 강한 비이성적인 공포 혹은 혐오를 뜻하는 phobia란 단어의 바탕이 되어 hydrophobia (광견병, 공수병), xenophobia (외국인 혐오증), acrophobia (고소공포증) 등 의학과 심리학에 자취를 남겼다.
올림포스의 주신 외에 하위의 신들도 존재했다. 그중 뮤즈 (Muse)들은 시, 문예, 음악, 무용을 맡아 보는 여신들이며 천문학, 철학 등 모든 지적인 분야를 담당했다. 보통 9명으로 간주되는데 신이나 영웅들의 제사 혹은 의식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이들에게서 음악 (music)이 유래하였다. 뮤즈들을 위해 지은 신전은 museum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라티아이 (Gratiae)는 세 자매로서 여성의 매력을 맡은 여신들이었고 이들에게서 우아함, 품위를 뜻하는 grace가 파생되었다. 한편 올림포스의 주신 중 한명인 아폴론 (Apollon)에게는 의약과 치료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 (Asclepius)라는 아들이 있었고, 그에게는 ‘건강’을 뜻하는 휘게이아 (Hygeia)와 ‘만병통치약’이란 뜻의 파나케아 (Panacea)라는 딸이 있었다. 휘게이아에서 유래한 것이 ‘위생’ 이란 의미의 hygiene이다. 로마인에게 건강의 신은 살루스 (Salus)이며 salutation (인사)에서 그 자취를 엿볼 수 있다.
문 (門)의 신 야누스 (Janus)는 그리스 신화에 대응하는 신이 없는 유일한 로마 신화의 신이다. 문의 입구와 출구를 담당했기 때문에 한쪽은 앞을 보고 한쪽은 뒤를 보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것으로 그려졌다. 1년 12달 중 1월은 한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시작하는 달이기에 야누스의 이름을 따서 January로 명명되었다.
이리스 (Iris) 여신은 신의 메시지를 인간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무지개를 타고 내려오곤 했던 여신은 눈의 홍채 (iris)와 붓꽃 (iris)에 그 흔적을 남겼다.
그리스 신화에는 신과 거인족 뿐만 아니라 괴물도 등장하는 데 그중 시렌 (Siren)은 아리따운 아가씨의 모습을 한 괴물들이었다. 이들이 노래를 부르면 지나가는 선원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배가 바위에 부딪혀 목숨을 잃었다. 오늘날 경찰차나 소방차, 구급 자동차 등에 설치된 경보기 사이렌 (siren)은 이들 그리스의 괴물에서 유래하였다.
먼 옛날 신전에서 사람들의 숭배를 받았던 신들은 이제 이야기로만 남았지만, 우주에서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인간 삶의 도처에서 신들과 신화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비록 더 이상 인간들의 삶에 강한 영향을 미치거나 숭배를 받지는 못하지만, 어쩌면 이렇게 흔적을 남겨 놓고 인간들 삶의 일부가 된 사실에서 신들은 위안을 얻고 있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