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신고三一神誥」가 인도하는 진아眞我(9)
삼신일체三神一體란 무엇인가
동방 한민족의 역사문화정신에 깃들어 있는 사유방식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삼수논리三數論理에 기반한다. 이는 ‘하나가 체이고 세 손길이 그 작용이다[一體三用]’는 논리이다. 재론하자면 선인仙人 발귀리發貴理는 “송가頌歌”에서 “하나는 셋을 그 쓰임으로 하고, 셋은 하나를 그 체로 한다[一三其用 三一其體]”는 논리를 말했고, 고려 말의 충신 행촌杏村 이암(李巖, 1297~1364)은 『단군세기檀君世紀』 서문序文에서 “하나를 잡으면 셋을 포함하고[執一含三]”, “셋이 모여 하나로 돌아간[會三歸一]”고 하여 ‘체와 용이 분리될 수 없음[體用無岐]’을 주장했다.
발귀리가 제시한 ‘일삼기용’과 이암이 제시한 ‘집일함삼’은 ‘하나의 본체[一體]’가 현상계에서는 ‘세 손길로 작용[三用]’함으로써 우주만유의 다양한 창조변화가 현실적으로 일어나게 됨을 밝히는 논리다. 이는 ‘하나의 본체’로부터 현상계의 ‘많음’이 유출流出하게 됨을 밝힌다는 의미에서 일명 ‘존재의 하향도下向道’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반면에 발귀리가 말한 ‘삼일기체’와 이암이 말한 ‘회삼귀일’은 거꾸로 현상계의 ‘많음’이 유출될 수 있도록 한 ‘세 손길의 작용[三用]’이 곧 ‘하나의 본체[一體]’로 귀환하게 됨을 밝히는 논리이다. 이는 다양하게 벌어진 현상계의 것들이 반전反轉하여 결국 ‘하나의 본체’로 돌아가 존재의 참 목적을 달성한다는 의미에서 ‘진리의 상향도上向道’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럼 ‘삼신일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삼신三神’과 ‘일체一體’가 결합된 용어이다. ‘일체’는, 글자대로 해석하면, ‘하나[一]’와 ‘몸[體]’이 ‘한 덩어리’란 뜻으로 ‘하나의 몸’ 혹은 형이상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하나의 본체’를 지시指示한다. 반면에 ‘삼신’은 ‘세 손길로 나뉘어 작용하는 신’을 지시한다. 따라서 ‘삼일기체’나 ‘회삼귀일’의 논리에 따라 ‘삼신일체’는 현상계에서 ‘세 손길로 나뉘어 작용하는 신[三神]이 하나의 본체다[一體]’는 뜻으로 압축된다.
이제 ‘하나의 본체[一體]’와 ‘삼신三神’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고, ‘삼신일체’의 진의眞意가 무엇인가를 검토해 보자. 이를 검토하기 전에 사전적인 지식을 쌓는다는 차원에서 동북아 문화권에서 ‘근원의 본체’에 대해 논의되었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해봄이 좋을 것이다.
동양 전통의 형이상학적 탐구에서 제시된 ‘근원의 본체’는 시대가 요구하는 문화적인 변천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원시유가原始儒家는 우주만유가 존재하게 되는 바의 근원성根源性을 강조하여 형이상학적인 ‘천天’이나 운동성을 동반하는 ‘천도天道’를 ‘근원의 본체’로 보았다. 반면에 도가道家는 자연의 ‘도道’를 ‘근원의 본체’라고 말하는데, 이는 끊임없이 창조 순환하는 자연의 법도[道法自然]를 함의한다. 중국의 송대宋代에 이르자 성리학性理學이 주류를 이루게 되는데, 주기론자主氣論者들은 물리적인 변화의 측면을 강조하여 ‘기氣’가 ‘근원의 본체’라고 하였고, 주리론자主理論者들은 존재의 이법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리理’가 ‘근원의 본체’라고 주장했다. 불가佛家에서는 일체의 모든 것들이 ‘마음[心]’에서 비롯한다는 의미에서 ‘한 마음[一心]’이 ‘근원의 본체’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삼신일체’에서는 ‘근원의 본체’라는 말 대신에 ‘하나의 본체[一體]’를 언급한다. 동북아 한민족의 사유구조에서는 ‘근원’이라는 말 대신에 명확성을 함의하는 ‘하나’를 말했던 것이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이는 선인 발귀리가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의 “송가”에서 “광대한 하나의 지극함이여! 이것을 양기良氣라 부르나니[大一其極 是名良氣]” 라고 말한 것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광대한 하나[大一]’는 「천부경」에서 “하나는 시작이나 무에서 시작한 하나이다[一始無始一]”라고 한 ‘하나[一]’와 같은 의미다. 그 ‘하나’는 내적으로는 ‘시작과 끝[始終]’이라는 극성極性을 가지며, 외적으로는 ‘하나이면서 전체를 포괄하는 존재’를 상징한다.
‘하나’는 근원을 포함하는 ‘하나의 본체’를 지칭指稱하는데, 발귀리는 이를 ‘양기良氣’라고 말한 것이다. ‘양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동양철학의 주기론자들이 말하는 단순한 기氣 자체가 아니라, 지극히 밝고[光明] 지극히 순수[至純]하다는 의미에서 신령神靈한 존재, 즉 신神과 기氣가 융합된 영적靈的인 존재를 함의한다. 이를 발귀리는 “송가”에서 “광대한 허虛에 광명이 있으니, 이것이 신의 형상이요, 광대한 기가 오래도록 존속하니, 이것이 신의 조화로다[大虛有光 是神之像, 大氣長存 是神之化]”라고 표현한다.
사실 ‘허虛’, ‘광명[光]’, ‘신神’, ‘기氣’ 등은 우주의 기원起源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궁극자窮極者의 범주範疇에 속하는 개념들이다. 이 개념들은 자체로 무궁無窮한 혼돈의 경계에 있다는 의미에서 현상계의 ‘원초적인 본체’로 규정될 수 있을 법하다. 달리 말하면 이들은 태초太初에 우주만유의 시원始原的의 바탕으로 아직 ‘존재의 지평地平’에 떠오르지 않은 태초존재太初存在라 명명命名할 수 있을 것이다. “텅 비어 아무런 존재도 없는 기[虛無之氣]”, “아무런 규정도 형상도 없는 혼탁한 시초의 기[混元之氣]”, “무無의 지극한 경계”, “태초의 광명한 신神”, 상수론象數論에서 요구되는 ‘영零=0’도 ‘태초존재’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다.
‘태초존재’의 특성은 자체로 무한히 퍼져 있는데, 공간적으로는 안에서나 밖에서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투과할 수 있으며, 시간적으로는 언제 어디에서나 상존常存하는 균일均一한 것임을 함의한다. 이에 대해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은 “아무런 형질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고, 상하사방도 없고, 밖으로 허하고 안으로 공하여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으며 허용하지 않음이 없는 것[“無形質 無端倪 無上下四方 虛虛空空 無不在 無不容]”이라고 표현한다. 또한 ‘태초존재’는 절대적으로 없음[無]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존재의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은 상태’여서 내적으로 아무런 특성도 없고, 외적으로 아무런 규정도 없는 것임을 함축한다. 이에 대해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은 “밖으로 허하고 안으로 공한 가운데 항상 있는 것이다[外虛內空 中有常也]”라고 한다. 그리고 상수론에서 ‘영=0’으로 표기하는 ‘태초존재’는 자체로 수數가 아니다. 하지만 임의의 수에 들어가 수의 증감增減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존재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태초존재’가 “존재의 지평”으로 떠오를 때 ‘하나[一]’를 획득하게 되고, 이로써 현상계에서 바로 근원적인 ‘하나의 본체[一體]’라는 지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를 발귀리는 “송가”에서 “대일기극大一其極”으로 정의했고, 곧 “양기”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데 ‘양기’는 ‘신’과 ‘기’가 융합된 ‘하나의 본체’이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서 “신은 즉 기요, 기는 즉 허요, 허는 즉 하나이다[神卽氣也 氣卽虛也 虛卽一也]”라고 기술한 것은 ‘양기’의 내면적이며 외면적인 본체의 특성을 언급한 뜻으로 봐야 한다.
‘양기’의 내면적이며 외면적인 본체의 특성으로 기술된 ‘신’과 ‘기’는 각기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본체’를 의미하는 두 측면이다. 선인 발귀리는 “송가”에서 이를 한마디로 “허조동체虛粗同體”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허’는 ‘신’의 다른 표현이고, ‘조’는 ‘기’의 다른 표현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의 본체’는 ‘신기동체神氣同體’가 된다. 이에 대해 『단군세기檀君世紀』 서문에서는 “신은 기와 분리될 수 없고 기는 신과 분리될 수 없다(神分離氣 氣分離神)”고 했고, 화이트헤드(A.N.Whitehead, 1861~1947)는 『과정과 실재』에서 “모든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란 정신적인 극(mental pole)과 물리적인 극(physical pole)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본체’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보면 ‘신’이지만, 물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허조동체’, 즉 ‘신기동체’가 아니라면, 그래서 ‘신’과 ‘기’가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하나의 본체’는 물리적인 ‘일기’ 뿐이거나 정신적인 ‘일신’ 뿐이거나, 아니면 ‘일기’와 ‘일신’이 양립하는 이원론二元論에 봉착하게 된다. 이는 결국 유물론唯物論의 사고에 빠지게 되어 정신의 고귀한 가치를 버리게 되거나, 아니면 유심론唯心論의 사고에 함몰되어 육신의 생명활동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게 되거나, 아니면 유물론과 유심론의 대립적인 구도에서 사고의 갈등과 투쟁이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허조동체’ 즉 ‘신기동체’의 논리는 물리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를 동시에 아우르면서 조화調和를 나타내는 완성된 진리를 담아내고 있다.
‘신기동체’는 ‘하나의 본체’가 겉으로 보면 ‘일기’이지만 속으로 보면 ‘삼신’임을 뜻한다. 여기에서 ‘삼신’이란 ‘일신’이 주체가 되어 ‘세 손길로 작용하는 신’을 일컫는데, 이에 대해여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은 보다 명확하게 간파하여 기술하고 있다. “하나의 기는 안으로 삼신이 있고 … 삼신은 밖으로 일기가 싸고 있다. 그 겉으로 존재하는 것도 하나이고, 그 안에 담고 있는 것도 하나이고, 그 통제하는 것도 하나이다(一氣者 內有三神也 … 三神者 外包一氣也 其外在也一 其內容也一 其統制也一)”.
‘허조동체’, 즉 ‘신기동체’의 논리에서 ‘하나의 본체[一體]’가 현상계에서 삼신三神으로 작용한다는 진리는 현상계에서 일어나는 현실적인 모든 창조변화가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한 인간의 생명체가 배태胚胎될 때, 맨 먼저 ‘신’과 ‘기’의 융합인 ‘하나의 본체’로부터 생명의 기틀[機]이 잉태孕胎되고, 잉태된 태아胎兒는 점차 성인으로 성장해 나간다. 태아가 성장한다는 것은 ‘허’에 해당하는 ‘신’과 ‘조’에 해당하는 ‘기’의 작용으로 인해 태아의 형태가 점진적으로 형성되어 감을 뜻한다. 달리 표현하면 인간의 생명체가 마음[心] – 생명의 기운[氣] – 신체[身]로 분석된다고 할 때, ‘하나의 본체’에서 잉태된 태아는 삼신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마음[心]의 활동이 확장되고, 생명의 기氣가 왕성해지면서 인간의 신체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 ‘신’과 ‘기’가 융합된 ‘하나의 본체’에서 현상의 창조변화를 이끌어가는 ‘작용의 원인[作用因]’, 즉 주체主體는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이는 바로 ‘하나의 신神’에게서 찾아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조화작용의 결정 요인은 ‘신’에게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은 “하나 가운데 신이 있으니 능히 삼신이 되니라[自有中一之神而能爲三也]”고 했고, 「삼신오제본기」는 “주체는 일신이나 각기 따로 있는 신이 아니라 작용인 즉 삼신이니라[主體則爲一神 非各有神也 作用則 三神也]”고 했다. 이는 화이트헤드가 작용의 추동력인 ‘신’을 두 본성, 즉 “원초적인 본성(primordial nature)”과 “결과적 본성(consequent nature)”으로 구분하고, ‘원초적 본성’으로서의 신이 개념적인 “영원한 대상(eternal object)”을 파악하면 ‘결과적 본성’으로서의 신이 이를 창조성[기氣]에 실현하여 세계를 창조한다는 논리에 대비하여 이해해볼 수 있다.
‘신’은 ‘기’를 움직여 우주만유의 현상을 구현하게 되는데, 주체가 ‘일신’이고, 현상계에서의 작용은 ‘삼신’이다. 이러한 정신에서 태고의 인류 원형문화를 주도한 신교에서는 대우주 존재의 중심을 신神으로 정의定義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본체’는 우주의 조화원신造化元神으로 ‘일신’이지만, 현상계에서는 ‘삼신’으로 작용하여 우주만유가 창조변화의 과정으로 진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현상계에서 ‘세 손길로 작용하는 삼신’의 본질적인 특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조화造化’의 신, ‘교화敎化’의 신, ‘치화治化’의 신으로 분석되는데, ‘조화의 신’은 우주만유를 창조하여 낳는 신성을, ‘교화의 신’은 낳은 것들을 가르쳐 육성하는 신성을, ‘치화의 신’은 조화와 교화의 작용을 조율하여 본래의 목적에 이를 수 있도록 다스리는 신성을 가진다. 그럼에도 ‘체용무기體用無岐’의 논리에 따라 ‘삼신의 작용은 하나의 본체[三神一體]’이다.
‘삼신일체’에서 ‘삼신’이 ‘스스로를 드러낸[自己顯現]’ 최초의 존재는 무엇인가? 「천부경」의 논리에 의거하면, 그것은 바로 하늘[天], 땅[地], 인간[人]이다. 그래서 「천부경」은 ‘하늘도 하나[天一]’요, ‘땅도 하나[地一]’요, ‘인간도 하나[人一]’라고 규정한다. ‘삼신’에 대응해서 하늘은 우주만유를 낳는 성령, 땅은 육성하고 깨닫게 하는 성령, 인간은 조화로 다스려 최선의 목적에 이르도록 하는 성령을 가지게 된다. 삼신의 현현, 즉 ‘하늘, 땅, 인간’은 ‘체용무기體用無機’의 논리에 따라 ‘하나의 본체’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삼신일체’는, 그 본성적인 특성으로 말하면, ‘조화’, ‘교화’, ‘치화’의 신이 ‘하나의 본체’라는 뜻이고, 현실적인 존재의 특성으로 말하면, 우주만유의 창조를 주도하는 ‘하늘’, 만유를 육성하고 깨달음을 주도하는 ‘땅’, 조화로 다스려 최선의 목적에 이르도록 주도하는 ‘인간’이 ‘하나의 본체’라는 뜻이다. 따라서 ‘삼신일체’의 진리에 의거해볼 때, ‘삼신일체’가 ‘하느님’의 존재를 지시하는 것이라면, 결국 하늘도, 땅도, 인간도 똑같은 하느님의 위격으로 존재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동방한민족의 역사문화정신에서 말하는 ‘삼신일체三神一體’는 서양 기독교문화의 중핵이 되는 ‘삼위일체三位一體’와 다르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우주만유를 ‘말씀(Logos)’으로 창조의 사역을 맡은 ‘성부聖父’, ‘말씀’을 구현하는 사역을 맡은 ‘성자聖子’,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고 영적 진리를 심어주는 ‘성령聖靈’의 세 위격位格이 동일한 한 분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또한 인도 힌두문화의 중심사상으로 자리 잡은 ‘삼신일체三身一體’와도 다르다. 인도의 ‘삼신일체’는 우주만유를 창조하는 근원적인 정신인 ‘브라흐마’, 현실세계의 창조질서와 정의가 무너질 때 이를 바로 세우는 ‘비슈누’, 파괴와 재창조를 담당하는 ‘쉬와’가 한 몸에서 화신化身한 세분 신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