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신고三一神誥」가 인도하는 진아眞我(17)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괴로움
“창생은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 맑은 기운과 탁한 기운, 돈후한 정기와 천박한 정기가 서로 뒤섞인 경계의 길을 따라 제멋대로 달리면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노쇠하고 병들어 죽는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느니라[衆 善惡淸濁厚薄 相雜 從境途任走 墮生長消病沒苦]”(「삼일신고三一神誥」)
지난 세기에 살았던 서양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이란 대체로 실존자實存者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인간이란 본래적인 자기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통속적으로 살아가는 “세상사람(Das Man)”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세상사람’이란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이 사람’, ‘저 사람’ 등 주체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와도 상관없고, 어느 누구도 아닌 그런 사람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말해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삶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않고, 그저 풍문이나 잡담에 귀를 기울이며, 유행이나 호기심에 사로잡혀서 바람이 부는 대로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일상인日常人들이라는 얘기다.
일상인들은 자기반성적인 삶에 대해 무관심하다. 자아의 삶에 대한 아무런 성찰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세상사람’으로서의 현존재(Dasein)는 본래적인 자아自我를 망각한 채 비본래적인 자아로 살아간다. 이는 시대의 흐름과 군중심리에 사로잡혀 마치 새우 떼가 떠밀려 다니듯이 흘러가는 퇴락頹落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퇴락한 사람은 비본래적인 자아에서 본래적인 자아로의 실존(Existenz)을 회복해야 한다’고 하이데거는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제시했던 것이다.
현존재가 실존을 회복하여 본래적인 자아로 전환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불안(Angst)”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불안’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불안’은 공포恐怖와 다르다. 공포는 그 대상이 존재하지만, 불안은 아무런 대상이 없다. 그럼에도 불안이 생기는 까닭은 ‘현존재’가 유한有限의 존재, 달리 말하면 “죽음에의 존재(Sein zum Tode)”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죽음은 외부로부터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인간에게 붙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죽음이라는 한계限界에 부딪쳐 부서짐으로써 자신의 유한성有限性을 그대로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으로의 ‘불안’은 인간에게 숙명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본래적으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 소멸될 것이라는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락, 스포츠, 광란의 즐거움에 탐닉하여 삶을 소비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인간으로 하여금 비본래적인 일상의 존재로 타락케 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죽게 마련이다. 인간이 죽으면 결국 “무(Nichts)”로 돌아갈 뿐이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이것은 탄생의 당연한 이치요 자명한 진리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현존재의 시작始作과 종말終末은 바로 ‘무’의 바다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출생 이전과 죽음 이후가 완전히 ‘무’라는 것을 함의한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면, 인간의 탄생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로부터 수동적으로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Geworfenheit)”이다. 달리 표현하면, 인간의 탄생이란 잠시 ‘무’ 위에 떠 있는 것이고, ‘무’ 위에 떠 있는 인간의 삶이란 죽음에의 존재일 수밖에 없어서 ‘불안’에 허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하이데거는 ‘무’에 직면해서 ‘무’를 꿰뚫어가는 진정한 “탈존자(Ek-sistenz)”의 지혜를 설파하기에 이른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게 되면[生] 성장의 가도를 걸으면서 늙고[老] 병들어[病] 죽음이라는[死] 한계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한계상황에서 인간이 위대한 점은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죽음이라는 사실을 앞당겨서 파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의 성자 싯다르타(Gautama Siddhartha, 기원전 6세기경)는 젊은 시절에 ‘생ㆍ노ㆍ병ㆍ사’의 한계상황을 모도目睹한 후, 왕사성王舍城에서의 권력과 환락, 부귀富貴와 명예, 그리고 가족과 처자식의 애틋한 사랑을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眞我]를 찾아 수도자修道者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진아’를 찾기 위한 싯다르타의 맹렬한 수도과정은 크게 두 방면으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禁慾主義를 따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정주의禪定主義를 추종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오직 참마음[眞心]만이 ‘진아’이고, 육신에서 비롯되는 일체의 모든 것들은 ‘진아’가 아니라 단지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러한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추종하는 수도과정은 결국 육신의 생명을 파괴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는 위험에 봉착하게 된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이 방식으로는 ‘진아’를 찾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후자의 경우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세속의 정[俗情]을 모두 끊어버리고, 심평心平의 경계에서 번뇌가 없는 삼매경三昧境에 드는 것이다. 금욕주의를 폐기한 싯다르타는 이 방식으로 수도에 전념한다. 기나긴 수도의 과정을 통해 그는 궁극으로 ‘연기緣起’의 도를 증득證得하게 되고, 인간의 삶이란 ‘생ㆍ노ㆍ병ㆍ사’의 고통, 즉 “일체의 것들이 모두 괴로움[一體皆苦]”이라고 진지하게 설파하게 된다.
‘생ㆍ노ㆍ병ㆍ사’의 고통은 인간에게 왜 숙명처럼 붙어 있는가? 싯다르타는 생겨나고 사멸死滅하는 현상계의 모든 존재가 ‘인연이 있어 일어나는 것[연기緣起의 소산]’임을 깨달았다. 한마디로 생명의 탄생과 죽음은 ‘생멸연기生滅緣起’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상계에서 생겨나는 모든 것들은 동일성同一性이 확보된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합해서 이루어진 가합假合’의 상태들이기 때문이다. 가합상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흩어지기 마련이다. 결과적으로 가합은 생명의 탄생이요, 흩어짐은 곧 생명의 죽음이다.
그럼 가합의 상태에서 벌어지는 탄생과 죽음의 고통을 벗어던질 수 있는 진정한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연기’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길[道]이다. 연기의 사슬을 끊는 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깨달음을 통해 지혜智慧를 구하는 것이다. 지혜란 무엇인가? 인간의 인식은 지혜에 대한 ‘진식眞識’과 허상과 망상으로 범벅이 된 ‘환식幻識’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깨달음은 지혜에 대한 앎이고, 지혜는 곧 ‘진식’으로 볼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깨달음을 통해 환식을 진식으로 전환하는 ‘환멸연기還滅緣起’도 지혜를 구하는 관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싯다르타는 일체의 미혹迷惑을 벗어나 존재의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것, 즉 세속의 모든 번뇌를 끊고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 ‘진아’가 되는 것이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는 길이라고 가르친 것이다.
생성과 소멸이 교차하는 시간의 수레바퀴 속에서 인간은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에 직면하게 되고, 운명적으로 ‘일체의 고苦’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여기로부터 하이데거는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 ‘진아’를 찾기 위해서는 ‘무’의 상태와 마주한 ‘현존재’가 ‘무’를 꿰뚫어가는 과정에서 일체의 존재자를 벗어나 초연한 상태로 있으면서 ‘존재자의 근원’을 묻게 되고, 곧 깨달음을 통해 ‘존재자체’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반면에 불가佛家에서는 ‘생멸연기’의 지혜를 깨우치고, 유식설唯識說에서 논의되고 있는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저장된 종자種子의 망식妄識을 깨뜨려 ‘환멸연기’를 벗어나 여래如來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동북아 한민족의 수도비경修道秘經인 「삼일신고」는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觸”의 수행법을 제시한다. ‘생ㆍ노ㆍ병ㆍ사’의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여러 방식으로 말해볼 수 있겠지만, 「삼일신고」에서 제시된 ‘지감, 조식, 금촉’의 삼법三法은 동서양의 수행법을 종합 통일한 최선의 수행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감, 조식, 금촉’의 삼법수행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서 ‘진아’가 되는 것인가? ‘진아’가 되는 길은 인간의 생명을 구성하는 ‘심ㆍ기ㆍ신’의 삼방三房에서 삼신으로부터 받은 ‘성性ㆍ명命ㆍ정精’ 삼진을 회복하여 원래대로 발현하는 것이다. 수행의 과정은 일차적으로 삼진의 선한 마음, 맑은 기운, 돈후한 정기[善ㆍ淸ㆍ厚]가 주체가 되어 감식촉感息觸 삼문三門을 통해 들어오는 악한 마음, 탁한 기운, 천박한 정기[惡ㆍ濁ㆍ薄]를 순화純化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아’에 이르게 되고, ‘진아’는 결국 삼신이 열려 성령의 빛으로 ‘삼신일체 하느님’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삼일신고」의 2장에서 말한 “성기원도聲氣願면 절친견絶親見이니 자성구자自性求子라야 강재이뇌降在爾腦이니라”고 한 진정한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