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신고三一神誥」가 인도하는 진아眞我(20)
“총명하고 밝은 사람은 느낌을 멈추고, 호흡을 고르게 하고, 접촉을 금하고, 오직 한 뜻으로 행하고 삼망을 고쳐서 삼진에 이르면, 삼신의 조화의 기틀이 크게 발휘하느니, (삼신의) 성에 통하여 공업을 완수하는 것이 이것이다[哲 止感 調息 禁觸 一意化行 改妄卽眞 發大神機 性通功完 是]”(「삼일신고」)
금촉禁觸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외부와의 신체적인 접촉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이는 살아 있는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인데, 생명을 가진 존재는 어떤 방식으로든 신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체는 감각기관感覺器官을 동원하여 곧 외부와의 접촉함으로써 외부에 대한 정보를 받아들여 활동하고, 이로부터 필요한 에너지원을 찾아 흡수한다. 흡수된 에너지는 생명활동에 필수적인 가용可用 에너지로 전환되어 몸에 자동적으로 저장되고, 생명활동을 위해 저장된 에너지를 소모함으로써 살아간다.
그런데 「삼일신고」는 수행법에서 ‘금촉’을 말한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말하면 생명활동을 하는 몸[身]이 외부와의 ‘접촉을 금지하라’는 뜻이다. ‘접촉’은 논리적으로 두 측면으로 분석해볼 수 있다. 하나는 몸[身]에 부착된 감각기관이 외부의 대상세계와의 접촉이고, 다른 하나는 자아가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정보에 따라 몸 안에서 발생하는 ‘감각관념’과의 접촉이다. 이에 대해 불가佛家의 유식론唯識論은 ‘감각대상’과 ‘인식주관’으로 분석하여 논의한다. 즉 ‘감각대상’은 감각이 접촉하는 외부의 경계로서 ‘육경六境’, 즉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이고, ‘인식주관’은 그 뿌리로서 ‘육근六根’, 즉 외부의 ‘6경’에 대응하여 자아 내부에서 발생하는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육식六識’을 말하고 있다.
「삼일신고」에서 말하는 ‘금촉’은 그 대상이 귀[耳]를 통해 생겨나는 ‘소리[聲]’, 눈[眼]을 통해 형상화되는 ‘색色’, 코[鼻]를 통해 생성되는 ‘냄새[臭]’, 혀[舌]를 통해 느끼는 ‘맛[味]’, 성기性器를 통해 일어나는 ‘음란[淫]’, 살닿음을 통해 신체적으로 느끼는 저항[抵]’의 관념들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금촉’은 두 방식의 접촉을 금함, 즉 외부의 대상세계와 몸에 부착된 감각기관과의 접촉, 이에 대응해서 인식주관이 형성하는 관념과의 부딪침을 금지하라는 뜻을 모두 포함한다.
그런데 우리의 생명체가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금지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결과적으로 말해서 우리의 몸은 결국 생명활동을 멈추게 되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이 외부와의 접촉을 전적으로 금지하게 된다면,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는데 유용한 에너지원도 찾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의 공급되는 에너지원이 끊어지면, 영양을 흡수하지도 못할 것이고, 숨도 쉬지 못하여 생명의 기운이 운용되지도 못하여 결국 생명활동을 위한 에너지가 고갈되어간다. 따라서 「삼일신고」에서 말하는 ‘금촉’은 우리의 몸이 외부의 물리적인 대상과의 접촉을 전적으로 금지하고, 이에 대응하여 우리 안에서 발생하는 감각지각을 차단하라는 뜻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럼 「삼일신고」에서 말하는 ‘금촉’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올바른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상제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자. “보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볼 것이요, 익히 본 후에는 마음에 걸어 두지 말라. 사물의 보고 들음이 마음에 걸려 있으면 복장腹藏에 음식이 걸림과 같으니라.”(『도전』9:217:1~2). 이 말씀의 핵심은 자아의 ‘주체主體’가 외부의 물리적인 대상과 접촉을 하되, 감각을 통해 발생하는 일체의 정보나 관념들에 현혹되지도 말고, 이것들을 ‘마음에 담아두지도 말라’는 뜻이다. 만일 자아의 ‘주체’가 외부의 대상들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받아 마음에 걸어두게 되면, 이는 자아가 그 관념에 편승하여 그것이 곧 주체가 되고, 결국 본연의 자아는 그 관념의 노예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금촉’은 자아의 ‘주체’가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발생하는 관념들에 현혹되지도 말고, 그것들을 자신에게 담아두지도 말라는 뜻이다. 만일 자아의 ‘주체’가 외부와의 접촉으로 발생하는 성聲 ㆍ 색色 ㆍ 취臭 ㆍ 미味 ㆍ 음淫 ㆍ 저抵의 관념들을 자신에게 담아둔다면, 자아의 ‘주체’는 그 ‘6경’에서 비롯되는 관념들에 편승하게 되고, 곧 ‘6경’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자아가 생명활동을 하는 근원인 ‘진정’을 교란하고 파괴하게 됨을 뜻한다. 왜냐하면 ‘6경’은 삼신하느님의 ‘진정’에서 비롯되는 ‘돈후’함이 아니라 모두 ‘망정妄精’에서 비롯되는 ‘천박淺薄’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만일 자아가 ‘6경’에 편승하여 ‘천박’함이 자아의 ‘주체’가 된다면, 이는 곧 삼신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진정’에서 비롯하는 ‘돈후한 몸[厚身]’을 교란하여 소모시키고, 결국 본연의 ‘진정’을 고갈시킴으로써 천박한 몸[薄身]으로 전락하게 되어 병들고 단명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삼신하느님으로부터 품부된 본연의 정기를 굳건하게 지키고 보호해야 인간의 생명은 무병장수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자아는 ‘진정’에서 비롯된 ‘돈후’함이 주체가 되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6경’에 대해 ‘금촉’하고, 삼신하느님의 ‘진정’이 원활하게 운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럼 ‘진정’의 ‘돈후’함이 주체가 되어 성聲 ㆍ 색色 ㆍ 취臭 ㆍ 미味 ㆍ 음淫 ㆍ 저抵의 ‘6경’을 금지하라는 뜻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밝혀보자.
먼저 ‘소리[聲]’에 대한 금촉은 무엇을 뜻하는가? 소리는 듣기도 하지만 내기도 한다. 소리는 생명체의 육성과 파괴를 동반하며, 변화와 행동을 유발한다. 즉 화음和音을 갖춘 소리나 은은한 소리는 생육을 도모하기도 하지만, 파열음과 굉음은 생명을 파괴하기도 한다. 그러나 외부의 접촉을 통해서 나오는 소리는 ‘진정’의 ‘돈후’함이 주체가 되어 듣거나 내는 것이 아니다. ‘돈후’함이 주체가 되어 듣거나 내는 소리는 바로 ‘소리 없는 소리[無聲之聲]’이다. 한마디로 ‘성즉시공聲卽是空’이다. 그렇다고 소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공즉시성空卽是聲’이다. 이는 ‘소리 없는 소리’가 본연의 마음에서 듣고 내는 소리요, 본연의 맑은 기운으로 듣고 내는 ‘돈후’한 소리이다. 따라서 외부의 자극으로 듣고 내는 모든 소리를 멈추고, ‘돈후’함이 주체가 되어 내는 듣는 소리만이 진정한 소리이다. 이는 내적으로 마음의 평온과 생명을 보존하고, 외적으로 ‘말없는 말[無言之言]’로 솔선수범率先垂範하게 되며, 모든 이들에게 행복감을 주는 색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색色’에 대한 금촉은 무엇을 말하는가? 외부의 자극으로 생겨나는 색깔은 시각을 자극하여 마음의 안정성安定性과 광분성狂奔性을 일으키고 생명의 변화를 준다. 즉, 온유하거나 은은한 색은 마음의 안정을 도모하지만, 강렬하거나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색은 마음의 광분을 일으킨다. 그러나 외부의 자극에서 나오는 모든 색은 ‘진정’의 ‘돈후’함이 주체가 되어 내보이는 것이 아니다. ‘돈후’함이 주체가 되어 내는 색은 ‘색이 없는 색[無色之色]’이다. 한마디로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그렇다고 색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이는 ‘색이 없는 색’이야말로 본연의 마음에서 보는 색이요, 본연의 맑은 기운으로 느끼는 ‘돈후’한 색이다. 따라서 외부의 자극으로 들어오는 모든 색을 멈추고, ‘돈후’함이 주체가 되어 내는 색만이 진성한 색이다. 이는 내적으로 마음의 안정과 생명을 보호하고, 외적으로는 색감을 자유자재로 표현하게 되며, 모든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좋음을 느끼는 색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냄새[臭]’에 대한 금촉은 어떤 의미인가? 외부의 자극으로 생겨나는 냄새는 후각을 자극하여 마음의 쾌락과 불쾌감을 일으켜 생명을 온화하게도 하고 격하게도 한다. 그러나 외부의 자극으로 생겨나는 냄새는 ‘진정’의 ‘돈후’함이 주체가 되어 나는 것이 아니다. ‘돈후’함이 주체가 되어 나는 냄새는 ‘냄새 없는 냄새[無臭之臭]’이다. 한마디로 ‘취즉시공臭卽是空’이다. 그렇다고 냄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공즉시취空卽是臭’이다. 이는 ‘냄새 없는 냄새’야말로 본연의 마음에서 나는 냄새요, 본연의 맑은 기운으로 느끼는 ‘돈후’한 냄새다. 따라서 외부에서 들어오는 냄새를 멈추고, ‘돈후’함이 주체가 되어 내는 냄새만이 진정한 냄새이다. 이는 내적으로 무취의 향기로 마음의 안정과 생명을 보호하고, 외적으로 생명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되며, 모든 이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고 생명활동에 좋은 냄새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맛[味]’에 대한 금촉은 무엇을 말하는가? 외부의 자극으로 발생하는 맛은 우리의 미각을 자극하여 쾌락과 불쾌, 고통과 행복을 주기도 하며, 생명의 안전과 위협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외부의 자극으로 느끼는 맛은 ‘진정’의 ‘돈후’함이 주체가 되어 나는 맛이 아니다. ‘돈후’함이 주체가 되어 느끼는 맛은 ‘맛이 없는 맛[無味之味]’이다. 한마디로 ‘미즉시공味卽是空’이다. 그렇다고 맛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공즉시미空卽是味’이다. 이는 ‘맛이 없는 맛’이야말로 본연의 마음에서 나는 맛이요, 본연의 맑은 기운으로 느끼는 가장 ‘돈후’한 맛이다. 따라서 외부의 자극으로 느끼는 맛을 멈추고, ‘돈후’함이 주체가 되어 내는 맛이야말로 진정한 맛이다. 이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무미의 경지에 이르게 되어 안으로는 생명을 보존하는 데에 기여하게 되고, 외적으로는 생명에 진정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낼 수 있게 되며,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느끼는 좋은 맛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음란[淫]’에 대한 금촉은 어떤 의미인가? 외부의 자극으로 일어나는 ‘음란’은 성적 감각을 자극하여 음흉한 마음과 과격한 성적 행위를 일으킨다. 이는 종족 보존에 기여하기도 하지만, 생명의 정기를 소모하기도 하고, 불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외부의 자극으로 일어나는 ‘음란’은 ‘진정’의 ‘돈후’함이 주체가 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돈후’함이 주체가 되어 일어나는 ‘음란’은 ‘음란이 없는 음[無淫之淫]’이다. 한마디로 ‘음즉시공淫卽是空’이다. 그렇다고 ‘음란’의 마음이나 성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공즉시음空卽是淫’이다. 이는 ‘음란이 없는’ 경지에서 나오는 ‘음란’이야말로 본연의 마음에서 나오는 ‘음란’이요, 본연의 맑은 기운으로 행하는 ‘돈후’의 성적 행위다. 따라서 외부의 자극으로 발생하는 음함을 멈추고, ‘돈후’함이 주체가 되어 일어나는 음욕이나 성적 행위여야 한다. 이는 내적으로는 생명의 기를 돋우고, 외적으로는 모두에게 조화와 통일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저항[抵]’에 대한 금촉은 무엇을 뜻하는가? 외부의 자극으로 일어나는 ‘저항’으로의 ‘살닿음’이다. 이는 우리의 피부를 자극하여 생명의 안정성을 주기도 하지만, 폭력성과 위협이 되기도 한다. 생명의 안정성은 애정으로 드러나고, 폭력성과 위협은 각종 싸움으로 번지게 된다. 그러나 외부의 자극으로 일어나는 ‘살닿음’은 ‘진정’의 ‘돈후’함이 주체가 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돈후’함이 주체가 되어 발생하는 ‘살닿음’은 ‘부딪침이 없는 부딪침[無抵之抵]’이다. 한마디로 ‘저즉시공抵卽是空’이다. 그렇다고 외적인 살닿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공즉시저空卽是抵’이다. 이는 ‘부딪침이 없는’ 경지에서 나오는 ‘살닿음’이야말로 본연의 마음에서 나오는 ‘살닿음’이요, 본연의 맑은 기운에서 행하는 ‘돈후’의 ‘살닿음’이다. 따라서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발생하는 ‘살닿음’을 멈추고, ‘돈후’함이 주체가 되어 일어나는 ‘살닿음’이야말로 진정한 부딪침이다. 이는 내적으로는 생명의 정기가 순환하도록 하고, 외적으로는 타인의 기운을 돋우며, 사회적인 화합의 장이 열리게 함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삼일신고」는 수도자가 성聲 ㆍ 색色 ㆍ 취臭 ㆍ 미味 ㆍ 음淫 ㆍ 저抵의 ‘6경’과의 저촉抵觸을 금禁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왜냐하면 ‘금촉’의 대상이 되는 ‘6경’은, 전적으로 자아의 ‘주체’가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발생되는 허망하고 천박한 것들이고, ‘진정’에서 비롯하는 ‘돈후한 몸[厚身]’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의 ‘돈후’함이 주체가 되어 ‘6경’과의 접촉을 금하고,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면, 자신의 ‘주체’는 그 안에 내장된 근본적인 생명의 근원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생명의 원천은 곧 삼신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본연의 정기精氣이다. 본연의 정기는 삼신하느님의 ‘진정’이기 때문에, 자신의 ‘주체’는 그 원기元氣를 온전하게 보존하고 운용할 수 있게 된다. 즉 우리는 내적으로는 ‘진정’을 보호하고 생명활동이 온전하게 운용되도록 할 수 있고, 외적으로는 ‘진정’의 ‘돈후’함으로 인덕과 덕망을 갖춤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평등과 화합과 화평을 베풀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