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객 분리의 ‘망령亡靈’
2. 최고의 행복은 숙고에
앞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확인했다. 현존하는 것의 대상성이 존재로 이해되면서 현존하는 존재자가 인식 주체를 마주한 대상이 되는 운명은 사물과 접하는 통로가 표상함으로 축소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현실적인 것의 현실성 자체도 또한 그 현실적인 것에 대한 인간 인식의 본질 전체도 대상성 안에 움직인다. 사물을 대상적으로, 객관적으로 대하는 대표적 시선은 학문의 ‘이론’일 것이다. 이제 여기서는 엄밀한 형태의 표상함인 이론으로부터 소급하여 어떻게 인간이 대상화에 상응하여 표상의 주체로 협소화되고, 또 이를 통해 주객분리에 의해 휘둘려 왔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이론(theory)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theory’는 희랍어 동사 ‘테오레인’(θεωρεῖν)에서 유래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동사 ‘테오레인’과 그것의 명사인 ‘테오리아’(θεωρία)에는 사실은 드높고 비밀스런 의미가 담겨 있다. ‘테오레인’은 ‘테아’(θὲα)와 ‘호라오’(ὁράω)라는 두 어간으로 구성돼 있다. 먼저 ‘테아’는 ‘어떤 것이 순전히 자신을 내보이는 모습’이다. 이 의미는 극장, 관객을 가리키는 ‘theater’란 말에 여전히 남아 있다. 테아의 비은폐는 스스로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이기에 참[진리]이다. 여기서는 우리에게 드러난 현상과 사물 그 자체가 구별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즉사즉진卽事卽眞, 바라보이는 사태 그대로가 참이다. 그리고 ‘호라오’는 어떤 것을 바라보는 것, 어떤 것을 시야 안에 두는 것이다. 그리하여 테오레인은 현존하는 것이 스스로를 내보이는 모습을 주시하고 그렇게 바라보면서 머무는 것을 말한다. 즉 희랍적으로 사유된 이론이란 마음을 모아 진리를 지키며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테오레인’으로부터 규정되고 그에 헌신하는, 다시 말해 현존하는 것의 순수한 나타남을 바라보며 사는 삶의 양식을 ‘비오스 테오레티코스(βίος θεωρητικός)’라 불렀다. 그리고 이를 최상의 활동으로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지성의 관조觀照에서 진정한 행복에 이른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러한 희랍적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시원의 희랍인들이 테오리아를 가장 높은 삶의 양식으로 여긴 까닭은 단순히 그것이 주는 내적 기쁨이나 충만감 때문만은 아니다. 희랍인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테오리아에서 또 다른 것을 듣고자 했기 때문이다. ‘테아’와 ‘호라오’는 강조가 달라지면 ‘테아(θεά)’와 ‘오라(ὤρα)’로 발음될 수 있다. 이때의 테아는 여신女神을 의미한다. 이는 희랍 시원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에 의해서도 확인되는데, 그에게서는 존재자의 존재인 비은폐가 여신으로 나타난다. 현존하는 것은 비은폐로부터 비은폐 안에서 현존한다. 이같은 테아의 또 다른 의미는 희랍인들이 어떤 것이 스스로 그 자체를 내보이는 ‘현존하게 됨’ 혹은 비은폐를 동시에 현존이 신성神性과 성스러움의 아우라 속에 발현하는 사건으로 이해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오라’는 그것을 향해 우리들 자신인 인간이 취하는 고려, 주의, 경의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때의 ‘테오리아’는 현존하는 것의 현존이나 비은폐를 성스러움과 경의 속에 오롯이 유의함이다. 희랍인들이 지고의 삶으로 믿은 테오리아는 “현존하는 것의 모습들에 대한 순수한 관련이다. 그것들은 그 자체의 나타남들을 통해 신들의 현재를 비춰줌으로써 인간에 관여한다.”(Vorträge und Aufsätze『강연과 논문』)
테오리아라는 시원적 만남의 양식은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것은 또 현실적인 것이 대상으로 변질되는, 존재자 편에서의 변화와는 어떻게 관련되는가?
하이데거는 테오리아가 로마의 ‘컨템플라리’(contemplari), ‘컨템플라치오’(contemplatio)를 거쳐 독일에서 ‘Betrachtung’으로 번역된다고 밝힌다. 독일어 ‘Betrachtung’의 동사 ‘betrachten’의 어간은 ‘trachten’이다. 라틴어 ‘tractare’에 어원을 두고 있는 ‘trachten’은 ‘무엇에 대해 준비하고 그것을 뒤따라가 확실하게 앞에 세운다’는 뜻이다. 그래서 ‘Betrachtung’으로서의 ‘이론’(theorie)이란 현실적인 것을 뒤쫓아가 대상으로서 확보하는 작업을 가리키게 된다.
이렇게 되면 과학은 더 이상 현실적인 것에 대한 순수한 ‘이론적’ 파악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Betrachtung’이란 의미에서의 이론인 근대 과학은 현실적인 것을 섬뜩할 정도로 개입하여(eingreifend) 다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론’의 시원적 의미가 일러주는 학문은 현실적인 것을 바꿀 요량으로 그리로 침입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테오리아’는 현실적인 것이 우리에 있어서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부터 스스로를 내보이도록 마음을 모아 지키는 것이고 그 발현을 기다리는 바라봄이다. 말 그대로 학문은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이론으로서의 근대 과학은 당연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근대 과학은 현실적인 것의 달라진 근본 특성에 대한 상응으로서 대두된 것이다. 지난 회에 살펴보았듯이 현존하는 것은 그 사이 그의 존재인 현존을 대상성에 두는 방식으로 ‘근대적으로’ 자신을 내보인다. 대상(Gegenstand)으로서 존립하는 현실적인 것은 어떤 것을 뒤따라가 앞에 세우는(vorstellen) 접근 양식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과학의 본질은 바로 그 표상함(Vorstellung)의 이론으로써 수행되는 데 있는 것이다. 과학은 현존하는 것의 요구에 부응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편에서 대상화를 더욱 더 강화하고 가속화한다. 어떤 분야의 과학이든 공통적인 것은 자연, 인간, 역사, 언어 등 그것들이 다루는 현실적인 것들이 ‘뒤쫓아가 확보하는 표상함’의 작업 앞에 먼저 자신을 세워둬야 한다는 점이다. 현실적인 것들과 그것들의 연관은 그것 자체로서가 아니라 해당 학문의 영역 안에서 표상을 위한 대상으로서 탈은폐된다.
이와 함께 과학은 현실적인 것을 작용된 것으로서, 즉 앞선 원인으로부터 예측 가능한 결과로서 자기를 내보이게 강요한다. 그렇게 해서 현실적인 것은 그 결과에서 추적 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것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확보된 것이 곧 사물 자체인지 여부는 과학의 물음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것, 즉 자연, 인간, 역사, 언어를 대상성으로 끄집어내는 일은 그리스 사유에는 물론이려니와 중세 인간들에게도 낯선 것이다. 다시 말해 사물과 만나는 표상함이란 특정 양식은 불과 3, 4백 여 년 이래의 역사적인 것이며, 또 본래 지역적인 것이었다.
한편 이러한 표상함은 내용상 일종의 계산함으로써 수행된다. 계산함은 본질적 의미에서 ‘셈에 넣다’, ‘고려하다’, ‘기대하다’를 말한다. 현실적인 것을 붙잡아 앞에 세워두는 표상함은 인과적으로 설명하며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뒤에 놓든, 형태론적으로 대상을 넘어 스스로를 형상(Bild)에 두든 모두 모종의 셈법에 따른 계산함이다. 이러한 계산적인 표상함의 밑바탕에는 인간이 스스로를 주체나 중심으로 놓으면서 모든 것을 대상화하여 파악하고 장악 가능한 것으로서 존립하도록 하는 의지가 숨어있다. 다시 말해 근대적 사유방식인 표상함은 “모든 현실적인 것의 무제약적 대상화”(Gelassenheit『내맡김』)의 욕망으로부터 추동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 본질이 표상의 주체로 변질되는 것과 사물 자체가 저 표상의 대상으로 축소되는 사건은 서로 얽혀 있다. 말하자면 인간의 본질 소외와 사물의 본질 소외는 주객분리와 함께 시작된 동일한 서구의 숙명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로부터의 전향은 새롭게 자기 본질에 이르게 하는 사유에서 이뤄질 것이다. 하이데거는 독일의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극작가인 레싱(Lessing, 1729~1781)과 함께 구원의 의미를 ‘본질로 있도록 자유롭게 놓아둠’으로서 이해한다. 이에 따르면 새로운 혹은 ‘또 다른 사유’는 구원의 사유가 될 것이다. 사물을 살리고 나를 살리는 사유는 새롭되, 또한 동시에 어떤 시작보다도 앞선 본성을 실현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옛 것 중의 옛 것이다. 그것은 우리 뒤로부터 우리를 향해 다가온다.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