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이야기 7회 훈족에 대한 중요한 기록을 담고 있는 요르다네스의 《게티카》와 프리스쿠스의 《비잔틴사》

■유목민 이야기 7회

훈족에 대한 중요한 기록을 담고 있는 요르다네스의 《게티카》와 프리스쿠스의 《비잔틴사》

서양의 역사에서 큰 역사적 변화를 초래한 유목민 집단을 꼽으라면 훈족(로마인들은 Hunni, 비잔틴인들은 Chounoi라고 적고 이다)과 몽골족, 오스만 투르크족을 꼽을 수 있다. 그 가운데 훈족은 서로마 제국 말기에 갑자기 동유럽에 나타나 ‘게르만족의 이동’을 촉발하였다. 게르만족의 이동은 처음에는 대규모 난민사태로부터 시작했다가 로마 당국이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자 게르만 여러 족속들이 제국의 영토 내로 침략하여 들어와 마음대로 땅을 차지하는 사태를 초래하였다. 그 과정에서 서로마 제국이 멸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훈족은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된다.

당시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 국경인 라인 강과 다뉴브 강 너머에 살고 있었는데 가장 동쪽에 살던 게르만족이 고트족(Goths)이다. 고트족도 하나의 집단으로 통일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로이퉁기’(Greuthungi)와 ‘테르빙기’(Thervingi)로 나뉘어 있었다. 서양 역사가들은 흔히 흑해 북안에 살던 그로이퉁기 족을 ‘동고트족’(Ostrogoths)으로, 테르빙기 족을 ‘서고트족’(Visigoths)으로 파악해 왔으나 이는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피터 히더 교수에 의하면 훈족의 공격으로 인해 그로이퉁기와 테르빙기는 여러 집단들로 분열되어 훈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훈족의 지배를 받던 고트족은 아틸라가 죽은 453년 이후 훈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서유럽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테오도릭을 우두머리로 한 고트족 집단은 480년대에 이탈리아로 들어가 북부 이탈리아를 점령하였다. 테오도릭은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게르만 용병들의 대장인 오도아케르를 죽이고 동고트 왕국을 세웠다. 테오도릭이 세운 동고트 왕국의 주력이 그로이퉁기 족이었을 따름이다.

또 테르빙기 족을 주력으로 한 고트족 집단은 훈족을 피해 도주하였는데 이들은 알라릭을 우두머리로 하여 410년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로마를 약탈하였다. 이 무리는 이탈리아 남단으로 내려가 배를 타고 북아프리카로 건너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시도는 폭풍으로 배들이 파괴되는 바람에 실패하여 고트족은 방향을 돌려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로 갔다. 그곳에 정착하여 세운 나라가 오늘날의 프랑스 서남부 지역에 해당하는 서고트 왕국이었다. 그로이퉁기와 테르빙기는 훈족이 동유럽에 모습을 드러냈던 370년 전후 고트족의 두 정치적 집단이었는데 후일 동고트 왕국과 서고트 왕국을 세운 주력 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370년 경에는 아직 동고트, 서고트라는 이름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 제국 영토 안에서 정착한 후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 시기 고트족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 요르다네스(Jordanes)의 《게티카Getica》이다. 원제목은 ‘고트족의 기원과 업적’이지만 일반적으로 ‘게티카’리고 약칭으로 불린다. 이 책은 고트족의 초기 역사를 알려주는 유일한 사서로 평가된다. 551년경에 씌어진 이 책은 독창적인 책은 아니고 카시오도로스의 12권으로 된 《고트족사》를 요약한 것이다. 이 책에 의하면 고트족은 먼 옛날 ‘스칸자’라는 섬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스칸자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말하는 것인데 당시에는 섬으로 생각되었다. 《게티카Getica》는 고트족의 후손인 요르다네스가 자신의 자랑스런 선조들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지만 훈족에 대한 정보를 많이 담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로마사 책이 훈족에 쫓겨서 다뉴브 강을 건너온 고트족에 의한 난동사태와 그 사태를 촉발한 훈족에 대한 소문으로 끝나는 것에 비해 그보다 60여년 뒤에 찬술된 요르다네스의 책은 훈족이 세운 제국의 흥망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훈족 연구에서는 훨씬 중요한 사서가 된다.

요르다네스의 책과 더불어 훈 제국의 역사를 기록한 또 하나의 사서는 프리스쿠스의 《비잔틴사》이다. 이 책은 현존하지는 않는다. 470년 이전에 씌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책의 단편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은 10세기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틴 7세 황제 덕택이다. 어려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장인이 섭정을 하는 바람에 별다른 할 일이 없어 학문에 몰두하게 되었던 콘스탄틴 황제는 동서 로마의 역사를 통틀어 찾아보기 드문 학자 황제이다. 그는 로마 제국의 통치에 도움이 될 법령들과 외교교섭, 조약 등을 정리하여 여러 권의 책으로 남겨놓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프리스쿠스의 역사서의 일부분이 실려 있는 《외교사절 초록 Excerpta de Legationibus》이다. 프리스쿠스의 기록은 단편이라고는 하지만 그 분량이 상당하다. 도합 70여 쪽에 달하는데 무엇보다도 프리스쿠스의 기록은 그가 동로마 사절의 일원으로서 아틸라의 본영에 직접 가서 목도한 것을 적은 것이다. 그는 449년경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보낸 막시미누스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따라가 훈족의 왕 아틸라를 만나 그를 바로 옆에서 지켜 본 외교관이었다.

449년 당시 훈 제국의 세력은 절정에 달했다. 동로마 제국은 훈족에게 조공을 바치고 또 아틸라의 까다로운 요구들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동로마 황제는 군사력으로는 어찌하지 못하는 훈족의 아틸라 왕을 암살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황금으로 그 측근을 매수하였는데 그만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프리스쿠스는 사절에서 돌아온 후 그 내막을 알게 되어 자신의 비잔틴사 책에 아틸라 살해 음모의 전개과정을 낱낱이 기록하였다. 콘스탄틴 황제는 아틸라 왕과의 외교적 교섭을 후대의 통치를 위해서도 기록으로 남겨둘 필요성을 느꼈다. 프리스쿠스의 훈족 관련 기록이 외교교섭사를 정리한 책에 발췌되어 들어간 것은 그 때문이다. 프리스쿠스는 또 훈족 본영으로 가는 여정에 대해서도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을 뿐 아니라 아틸라가 사절단을 위해 베푼 만찬에 참가하여 아틸라와 그의 측근에 대한 생생한 기록도 남기고 있다. 로마인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훈족의 왕 아틸라와 그의 본영에 그만큼 가까이 접근하여 기록을 남겨놓은 사람은 없다.

참고서적

Jordanes, Getica. English tr. by C. Mierow, The Gothic History of Jordane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15.

R. C. Blockley, The Fragmentary Classicising Historians of the Later Roman Empire, Eunapius, Olympiodorus, Priscus and Malchus. Text, Translation and Historiographical Notes, Francis Cairns, 1983.

P. Heather, The Fall of the Roman Empire : A New History of Rome and the Barbarians,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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