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둥글다
Ⅰ. 존재 ‘보다’ 존재의 의미를
하이데거는 Was heißt Denken? (『사유란 무엇인가?)』에서 존재가 자신을 고유하게 드러낼 때 그 발현發現의 장場이 사유되지 않는 한, 우리는 아직도 적절하게 사유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에 앞서 1929년에 출간된 Die Grundprobleme der Phänomenologie(『현상학의 근본문제들』 )에서 철학의 근본 과제를 존재 대신 존재 의미를 토의하는(erörtern) 것으로서 제기한다. 사실상 그는 이때도 이미 동일한 얘기를 하고 있다. “철학이 존재에 대한 학문이라면, 다음의 물음이 철학의 시원적이자 궁극적인 근본 물음으로 밝혀진다. ‘존재와 같은 것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가? 도대체 존재 이해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런데 존재 진리의 장을 강조하는 앞말과 존재의 의미에 대해 언급하는 뒷말은 어떻게 같다는 것인가?
Sein und Zein(『존재와 시간』)에 따르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의미는 “어떤 것의 이해가능성이 머무는”,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영역領域이나 지평을 가리킨다. 어떤 것의 의미를 영역으로 말하는 것은 우선은 생소할 수 있다. ‘의미’(Sinn)의 어원에 밝히는 그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의미는 하나의 사태가 내는 길이며 방향이다. … 의미는 하나의 사태가 자기 본질을 전개하고 동시에 머무는 밝게 트인 영역이다.”(Vorträge und Aufsätze『강연과 논문』) 어떤 것이 지닌, 때로 다소 멀어 보이고 심지어 무관한 듯한 여러 의미들의 범위는 그것의 본질을 지키고 간직하는 영역이란 얘기이다.
예컨대 ‘義[의로움]’란 사태는 「네이버 한자 사전」에 의하면, ‘옳다’, ‘착하다’, ‘맺다’, ‘섞다’, ‘간사하다’, ‘정의正義’, ‘우의友誼’, ‘뜻’, ‘용모’, ‘예절’, ‘인공적인 것’, ‘가짜’ 등 20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이 다양한 뜻의 스펙트럼, 즉 의미 영역은 의로움의 사태가 걸어온 역사며 길이다. 의로움의 본질은 거기에 머물고 있다. 이 영역은 우리 바깥에 실재하는 객관적인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지어낸 주관적인 것도 아니다.
이러한 의미 규정에 따르면 하이데거가 문제 삼는 존재의 의미란 존재가 그 자체로서, 즉 자신의 고유함이나 본질로서 머무는 영역을 가리킬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에서 존재 그 자체 또는 존재의 본질은 주지하다시피 은닉으로부터 밝음으로 들어서는 비은폐非隱蔽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진리이다. 다시 말해 본래의 존재는 자신을 열어 밝히며 우리 가까이(an) 머무는(wesen) 현존現存(Anwesen)으로서의 존재이다. 이에 상응하여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의미는 존재가 그 자체, 즉 비은폐로서 현성現成하는 영역으로서 보다 구체화된다. 비은폐로서의 존재 진리는 언제나 은닉과 발현의 “어디로부터(Wovon)와 어디로(Wofür)”(Beitgräge zur Philosophie『철학에의 기여』)라는 영역적 성격을 갖는다. 이는 다시 존재는 자신의 진리에서 밝게 트이며 스스로 영역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은폐에는 열린 장이 현성한다.”(Parmenides『파르메니데스』)
그렇지만 비은폐로서의 존재가 그와 같은 이행인 한, 존재는 언제든 다시 은닉 속으로 자신을 감출 수 있다. 그래서 존재가 그 자체를 드러내는 진리 영역은 밝음과 어둠이 투쟁하는 혹은 놀이하는 장이 된다. 여기서 위의 설명과 앞으로의 논의에 용이한 접근을 위해 비非하이데거적 문맥에서 존재의 영역 문제를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중용中庸』은 만물의 근본[天下之大本]인 중의 발현을 “나는 솔개, 뛰어오르는 물고기[鳶飛魚躍]”라는 『시경詩經』의 말[鳶飛戾天, 魚躍于淵]로써 표현한다. 그리고 이 구절에 대해 “이는 위, 아래에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言其上下察也].”라고 부연한다. 중국 송(宋) 나라 때 학자 정자程子는 이 구절을 『중용』의 저자인 자사子思(BC 492년 ~ BC 431년경)가 “사람들을 위하여 요긴하게 한 말로서 생동감 넘치는 대목”(『중용장구中庸章句』)이라고 설명한다.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존재에 해당하는 『중용』의 중은 때에 따라 머물 뿐[隨時而在], 실체적으로 있는 게 아니다[無定體]. 즉 그것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어떤 확정된 무엇으로서 있다고도 할 수 없다. 『중용』은 유무에 관한 ‘모호한’ 중의 참됨을 위 아래로 열어 밝히며 영역화하는 발현으로 본 것이다.
‘일묘연一妙衍(판본에 따라 演).’ 한민족 전래의 경전인 「천부경天符經」에 나오는 구절이다. 「천부경」에서 일一 또한 존재자의 존재라는 성격을 갖는다. 「천부경」은 여기 일에 대해 “[모든 것의] 시작이나[一始無始一] 자신은 시작을 갖지 않으며 [모든 것의] 마침이나 스스로는 마침이 없다[一終無終一].”라고 밝힌다. 그런데 그러려면 일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동시에 유이면서 무이어야 한다. 단지 유라면 시작과 끝을 가질 터이고 반대로 무일 따름이라면 시작이 될 수 없고, 그러니 끝도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일이 묘하게 퍼진다[妙衍]는 것이다. 衍(또는 演)은 ‘퍼진다’, ‘부풀어 난다’, ‘통하다’, ‘스며들다’ 등의 뜻을 갖는다. ‘일묘연’ 역시 유무가 뒤섞인 일이 밝게 트이면서 스스로 영역화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철학의 시원적이자 궁극적인 근본 물음”으로 말하는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은 위, 아래에 밝게 열리는 또는 묘하게 퍼지는 존재의 비은폐나 밝게 트임(Lichtung)의 영역 자체를 묻는 것이다. 존재의 빛보다는 그것이 생기生起하고 머무는 장(Ort)을 토의하는(erörtern) 것이다. 다음의 말들은 하이데거 사유의 그같은 성격을 기술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어느 정도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 모든 나타남들을 위한, 폭넓게 이해된 영역, 장 혹은 공간에 대해 기술하는, 숙고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Heidegger and Buddism. On Non-nihilistic Experience of Groundness」)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존재의 진리를 운동으로서 그리고 결국에는 진행 중에 있는 길과 그때그때의 영역으로서 물었다.”(Heidegger and Asian Thought)
“존재의 토폴로지에 대한 논의는 주로 1940년대 후반에 나타나지만 그것은 하이데거 사유의 진행 속에 완성 단계를 나타내는 핵심 주제이다.”(『하이데거에 있어서 ‘존재의 토폴로지’에 관하여』)[이때 ‘토폴로지’는 존재의 ‘토포스’(장소, 위상)에 대한 위상학적 탐구를 말하는데, 보다 심화된 관심 속에 존재의 의미나 진리 영역을 다루는 그의 사유를 지칭한다.]
그럼에도 “밝게 트임은 이제까지 철학에서 사유되지 않은 것이고 그래서 철학의 역사적 종말에서 미래의 사유를 위한 과제를 의미한다.”(Zur Sache des Denkens『사유의 사태로』) 이와 함께 영역의 문제는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여기서는 하이데거 사유의 ‘키워드’를 차지하는 밝게 트임이나 토포스를 ‘영역’으로 옮기고 있다. ‘영역’은 측량, 계측할 수 있는 공간과는 달리 열린 개념으로 이해된다. 또 ‘영역’은 공간, 시간에 모두에 적용될 수 있다. 그 점에서 하이데거가 토포스로써 이해하는 사태와 어울린다고 본다. 우리는 또 영역이 이행이며 사건임을 보다 강조할 필요가 있는 문맥에서는 ‘영역화’라는 표현을 함께 쓰게 될 것이다.
존재 의미와 존재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둘은 각각 자유롭고 열려 있다는 의미의 ‘밝게 트임’과 그와 같은 열린 장으로써 드러나는 ‘밝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존재 의미와 존재는 환한 터와 그것을 채우는 빛과 같다. “밝게 트임은 현존하고 부재하게 되는 모든 것을 위한 개방된 영역이다.”(Zur Sache des Denkens) 나아가 그 장은 스스로 밝게 드러나는 “비은폐의 근거이고 본질 시원이다.”(Parmenides) 밝게 트임이 없으면 빛(Licht)도 밝음(Helle)도, 빛의 부재不在인 어둠도 없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빛을 넘어서 최상의 것은 환히 빛나는 밝게 트임 자체”(Erläuterungen zu Hölderlins Dichtung『횔덜린 시 해명』)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영역이 존재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근거와 같은 것으로서 있다는 말은 아니다. 영역과 존재[비은폐] 사이는 영역이 근거로서 앞서고 존재가 그 결과로 뒤따르는 인과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역은 근거가 닿지 않으며, 그곳에서는 근거가 사라진다. 영역은 근거를 삼킨다. 하이데거는 비근거로서 심연深淵처럼 벌려진 이 열린 영역을 괴테의 말을 빌려 “근원현상”(Urphänomen)(Zur Sache des Denkens)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영역성은 존재의 본질에 속한다. 영역은 존재가 비은폐로, 즉 자기의 본질이나 진리로 머무는 방식과 지평이다. 그 점에서 영역은 존재 자체이다.
하이데거는 나중에 가서 존재가 존재로서 머무는 영역을 “사역四域”으로 부른다. 이를 통해 그는 존재의 영역적 성격을 보다 분명히 전달한다. 아울러 하이데거는 ‘사역화’(Vergegnis)란 말로써 스스로 발현하며 사역으로 영역화하는 존재의 동사적動詞的 성격을 드러낸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그 존재 발현의 장을 하늘, 땅, 신적인 것들, 죽을 자들인 인간이 하나로 어울리며 펼쳐지는 ‘사방 세계’(das Geviert)라고 규정한다. 하이데거에게는 ‘사방 세계’가 어떤 외적 규정도 털어낸 세계로서의 세계 혹은 세계 자체이다. 존재는 비은폐하며 사역화하는데, 그것은 또한 하늘, 땅, 인간, 신적인 것들의 단일함인 사방으로 트이는 영역화라는 것이다.
또한 이때 분명히 새겨야 할 것은 영역은, ‘밝게 트임’이란 말의 일상적 쓰임새가 말해주듯, 시간과 공간을 다 같이 지시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밝게 트이는 시간이자 공간으로서 열린다. ‘사역’이나 ‘사방세계’ 또는 ‘토포스’ 등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그것은 존재가 그 자체로서 머무는 ‘동안’(Weile)의 ‘폭’(Weite)이고 ‘폭’의 ‘동안’이다. 즉 시간이며 공간, ‘시공간’(Zeit-Raum)이다. 여기서 ‘시공간’은 존재가 스스로를 열어 밝히는 생기의 사건으로서 파악되고 있으며, 그러한 성격에 주목하여 “시간–놀이–공간”(Zeit-Spiel-Raum)(Unterwegs zur Sprache『언어로의 도상에서』)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사역은 동안과 폭으로서 … 시간을 부여하는 동시에 공간을 연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후기의 저술들에서 사역을 존재의 ‘시간–놀이–공간’(Zeit-Spiel-Raum)으로 부르고 밝게 트임과 동일시한다.”(Nähe Das Denken Martin Heideggers) 이때 시간은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이해하듯, ‘지금’의 연속이 아니며, 공간 또한 뉴튼식의 물리적 공간(space-container)과 같은 것일 수 없다. 하이데거에게는 ‘동안’이자 ‘폭’, ‘때’이며 ‘곳’인 시공간이 본래적 시간을 형성한다.
하이데거는 시간과 공간을 열어 주는 순수하게 밝게 트임이 고어古語 ‘die Heitere’가 가리키는 사태라고 해명한다.(Erläuterungen zu Hölderlins Dichtung) 오늘날 ‘heitere’는 주로 맑은 날씨를 가리키며, 그 형용사 ‘heiter’는 ‘갠’, ‘맑은’, ‘밝은’, ‘명랑한’, ‘시원한’, ‘찬연한’ 등의 뜻을 갖는다. 이 의미들을 횡단매개하는 공통적 함의는 ‘맑게 갬’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에서 ‘제색霽色’[비가 온 후 갠 모습]이 그와 같을 것이다. ‘인왕제색도’는 조선 후기의 화가 정선이 제색의, 즉 비 오고 난 뒤 밝게 트인 인왕산을 그린 작품으로서 보는 사람의 정감을 금세 밝음과 청량감으로 채우는 걸작이다. 그림을 보는 순간 우리의 기분은 제색으로 조율된다. 존재 진리인 ‘heitere’는 그러한 제색의 시공간에 유비된다.
한편 존재가 영역화한다는 것은 존재가 개방성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이미 지시한다. 자연의 햇빛이 밝게 빛나는 데는 투명한 공기가 있어야 하듯, 영역화하는 것은 본성상 언제나 그 생기와 머묾의 마당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컨대 하이데거 사유 초기에 존재가 비은폐된 존재 자체로서 열어 밝혀지는 장은 자기를 넘어[脫自] 초월적으로 존재자와 관계 맺으며 그것의 존재를 이해하는 인간 현존재의 개방성에서 구해졌다. ‘다만 존재 이해란 장이 있는 한 존재는 있다.’ 하이데거 사유의 전개 속에 초기의 존재 이해나 초월을 대신하여 ‘사유’, ‘내맡김’, ‘청종’ 등이 존재 진리가 일어나는 개방성의 자리에 들어선다.
그리고 인간이 그와 같이 다양하게 표현된 존재 진리의 장으로써 존재하는 방식은 그의 본질로서 사유된다.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고유함은 사유하며, 자기 바깥으로 나아가 존재의 진리를 지키는 데 있다. 하이데거는 그 인간 본질을 ‘실존’, ‘탈존脫存’, ‘존재의 이웃’, ‘존재의 목자’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이에 따르면 인간 본질은 존재 진리에 속한다. 인간의 고유함은 “영역화하는 것 안에 머묾”(Heidegger, Yoga and Indian Thought)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 자신인 인간이 존재의 필요에 따라 영역화의 자리로 전용專用되는 일은 그에게는 모든 것에 선행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이나 가능성이 거기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이제 앞으로 다가올 것을 준비하면서 이제까지의 논의를 요약해두기로 하자. 1) 존재의 영역은 은닉으로부터 발현하는 존재의 이행과 함께 열린다. 존재 발현은 사역, 사방 세계 등으로써 펼쳐진다. 2) 영역은 존재 자체인 비은폐에 속한다. 3) 영역은 시공간이다. 4) 영역은 그로부터 거기에 머무는 존재에 대해 인과적 의미의 근거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비근거이다. 5) 존재는 영역화의 본질로부터 열린 장을 요구한다. 6) 인간이 사유를 통해 자신을 존재 진리의 영역으로서 바치는 것은 다른 모든 존재자들과 구별되는 그의 특기함이다. 그 점에서 인간 본질은 존재에 유래를 둔다. 이 예비적 규정들은 다음의 논의들에서 구체화되고 또 풍부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