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이야기 11회
‘최후의 로마인’ 아에티우스와 훈족
아드리아노플 전투 이후 로마 제국은 훈족을 동맹으로 삼아 게르만족의 침략을 막는 데 이용하였다. 울딘의 예에서도 보이듯이 훈족은 로마 제국에 군사력을 지원하고 그 대가로 공납을 받았다. 이러한 동맹관계는 서로마의 경우 아틸라 시기까지 이어졌다. 훈족과 서로마 제국의 밀접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425년에 일어났다. 후일 로마의 실권자가 되는 아에티우스(Flavius Aetius 391-454)가 훈족에게 파견되어 훈족 부대를 이탈리아로 데리고 온 사건이다.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일어난 권력투쟁의 양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423년 8월 15일 서로마 제국의 호노리우스 황제가 30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다. 그가 죽자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요한네스(Iohannes, 영어로는 John)라는 비서관 출신의 관리였다. 그를 황제의 자리에 앉힌 인물은 서로마의 장군(magister militum) 카스티누스였다. 그러나 동로마에는 죽은 황제의 조카인 테오도시우스 2세가 멀쩡히 살아 있었다. 그는 요안네스를 서로마 황제로 인정할 의향이 전혀 없었다. 자기 가문의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사촌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로서 아직 네 살밖에 되지 않은 발렌티니아누스는 그의 모친 갈라 플라키디아(Galla Placidia)와 함께 콘스탄티노플에 와 있었다. 정치적 야심과 의지가 있었던 갈라 플라키디아가 섭정을 맡는다면 얼마든지 어린아이인 발렌티니아누스를 서로마 황제로 옹립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자신의 허락도 없이 서로마 황제가 된 요한네스를 찬탈자로 여겼다. 요한네스가 황제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쫓아낼 것이다. 실제로 테오도시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를 카이사르로 임명하고 찬탈자 요한네스를 정벌하기 위한 군대를 출정시켰다. 그 원정군 사령관으로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능력을 발휘했던 노련한 장군 아르바두르와 그 아들 아스파르를 임명되었다.
동로마 제국 군대는 아드리아 해 맞은편의 살로나를 점령하고 수륙 양면으로 이탈리아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요한네스의 부하 장수들 중에서 인사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동로마 군대와 내통하여 합세하자 순식간에 세력은 동로마로 기울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요한네스는 외부 세력을 불러들이는 방법 밖에는 묘안이 없었다. 자신에게 남은 병력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심복인 아에티우스를 훈족에 급파하였다. 당시 아에티우스(Aetius, 391-454)는 ‘쿠라 팔라티’ (cura palatii)라는 황궁의 관리를 맡은 고위 관리였다.
아에티우스가 훈족에 파견된 이유는 단적으로 말해 그가 훈족의 지도자들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에서 파견된 ‘볼모’(obses)로서 수년간 훈족 왕자들과 함께 훈족 속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볼모라는 것은 고대에 국가들 사이에서 조약을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뜻으로 보내는 일종의 보장책이었다. 그러므로 비자발적인 인질이 아니라 일종의 자발적 인질인 셈인데 외교사절에 가까운 존재였다. 보통 조약과 관련이 있는 고위 인사의 자제들을 볼모로 보냈다. 상대방 국가는 이 볼모들에게 신분에 맞는 좋은 대우를 하였다. 훈족의 볼모 아에티우스는 훈족 왕자들과 함께 생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훈족에게 보내진 것은 408년과 410년 사이의 어느 때였다고 한다. 그 직전에는 알라릭의 동고트족에게 인질로 3년간 가 있었는데 이렇게 여러 나라에 볼모로 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부친 가우덴티우스(Gaudentius)가 서로마의 고위장교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십대의 소년 아에티우스가 훈족에 볼모로 보내진 것은 서로마 제국과 훈족이 새로운 동맹조약을 체결했음을 나타나주는 것이다. 아에티우스를 연구한 얀 휴즈는 그 조약은 알라릭이 이탈리아를 침략하는 경우 훈족은 서로마를 침입하지 않는다는 보장조약이었다고 한다. (Ian Hughes, 56)
당시 아에티우스가 훈족의 어떤 왕에게 보내졌던지는 확실하지 않다. 얀 휴즈는 울딘 왕일 것으로 추정한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울딘은 408년 트라키아 지방을 침략했다가 그 휘하의 병력이 동로마 측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동로마로부터 철수하였던 아픈 기억이 있었다. 그는 이러한 체면손상을 만회하기 위해 서로마 제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볼모를 교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에티우스는 호노리우스 황제가 병사한 423년까지 약 십여 년간 훈족 속에서 지냈다. 그는 말을 잘 타고 궁술도 뛰어났으며 통역이 없이 훈족과 대화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실력은 훈족과 함께 상당 기간 지내야 가능한 것이 다.
아에티우스는 훈족 왕자들과 함께 그러한 교육을 받으며 그들과 친분을 쌓았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도량이 넓고 활달한 그의 성격은 장래의 훈족 지도자들과 친분을 쌓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외모와 성격에 대해서는 투르의 고레고리우스가 쓴 《프랑크족의 역사》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친분관계를 고려해서 찬탈자 요한네스는 아에티우스를 훈족에게 급파했던 것이다.
요한네스는 또 훈족의 부대를 이용하여 동로마 군대가 이탈리아에 들어온 후 그 후위를 공격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그런데 아에티우스가 훈족 부대를 이끌고 이탈리아에 도착한 것은 요안네스가 처형된 지 3일이 지나서였다. 요한네스의 부하들이 배반하여 요한네스를 갈라 플라키디아 측에 넘겨주었다. 자신의 상전 요한네스가 플라키디아 측에 의해 처형된 것도 모르고 이탈리아로 들어온 아에티우스는 동로마군을 공격하였다. 양측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은 후 아에티우스는 요한네스 황제와 자신의 부친 가우덴티우스가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에티우스는 곧 자신이 반란군의 수괴가 되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자 그는 대담하게 도박을 하였다. 막강한 훈족 부대를 이용하여 갈라 플라키디아 측과 협상을 벌인 것이다. 토벌의 대상이었던 아에티우스는 협상을 통해 플라키디아 측으로부터 갈리아 군사령관 직을 받았다. 물론 이탈리아로 데려온 훈족들을 돌려보내는 일은 자신이 처리해야 하였다. 불만을 토로하는 훈족을 적지 않은 돈을 주어 무마하였다. 아에티우스와의 흥정이 끝나자 갈라 플라키디아는 여섯 살짜리 어린 아들 발렌티아누스 3세를 로마로 데려가 서로마 황제의 대관식을 치렀다.
425년 아에티우스의 손에 이끌려 이탈리아에 들어온 훈족 부대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당시대를 살았던 역사가 필로스토르기우스(Philostorgius)는 아에티우스가 데려온 훈족 용병들의 수가 무려 6만에 달했다고 한다. 훈족 용병들은 자신들의 출동에 대한 대가로 황금을 받은 후 “분노와 무기를 내려놓고 볼모와 선서를 교환한 뒤 자신들의 고향으로 귀환하였다.”(필로스토르기우스, 《교회사》 12권 13-14) 훈족 때문에 반란군의 우두머리로 목숨을 잃을 뻔했던 ‘최후의 로마인’ 아에티우스는 그 목숨을 지킬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단번에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로 부상하였다. 또 432년 그는 다시 한 번 권력투쟁에 휘말리게 된다. 서로마 제국의 또 다른 실력자 보니파키우스 장군과의 무력을 통한 권력투쟁에서 패한 후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던 그가 달아났던 곳도 바로 판노니아에 있던 훈족 본영이었다. 훈족은 그를 두 번이나 살려냈던 것이다. 훈족은 아에티우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친구였다. 432년 이후 아에티우스는 갈라 플라키디아와 그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 황제의 보호자 역할을 하면서 서로마 제국을 위협하는 여러 적들과 싸워 서로마 제국을 지켜내었다. 이러한 아에티우스의 업적은 그의 훈족 친구들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참고서적
Ian Hughes, Aetius, Attila’s Nemesis (Pen & Sword, 2012)
Photius, Ecclesiastical History of Philostorgius, tr. by E. Walford (18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