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이야기 30회
비잔틴과 투르크의 첫 접촉
로마제국의 운명은 북방유목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서로마 제국은 훈족에 의해 밀려난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했다고 한다면 그 이후 천년이나 살아남았던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 제국은 동양에서 이주한 투르크족에 의해 멸망하였기 때문이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투르크의 출현 훨씬 이전에 비잔틴 제국은 투르크인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568년 ‘마니악’이라는 이름의 소그드인이 이끄는 투르크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플에 온 것이다.
투르크 사절단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은 ‘메난드로스 프록티토르’(Menandros protiktor)로 알려진 역사가이다. 그는 마우리키오스 황제(Maurice 재위 582-602) 때 군문에 있다가 황제의 후원으로 역사를 쓰는 역사가의 길을 걷게 된 사람이다. ‘프로틱토르’는 근위병을 뜻한다. 그러니까 근위병 출신의 메난드로스라는 사람이다. 그의 역사책은 현존하지 않지만 프리스쿠스처럼 그 단편들이 《외교사절초록》과 비잔틴 백과사전인 《수다(Suda)》에 전해지고 있다. 아바르인들에 대한 기록 뿐 아니라 페르시아와의 관계 및 투르크인들과의 접촉에 관한 기록들이 《외교사절초록》에 실려 있다.
투르크인들과의 접촉을 기록한 단편은 투르크에 대해 서양인들이 남긴 최초의 기록일 것이다. 유스티노스 황제 4년 (569) 초에 “투르크족의 카간 시자불(Sizabul)이 파견한 사절이 구름이 닿는 높은 산을 넘고 들과 숲을 가로지르고 늪지와 강을 건너 먼 길을 왔다.” 시자불은 돌궐 제국의 건설자인 토문의 동생으로서 서돌궐의 통치를 맡은 사람인데 중국 사료에서는 ‘실점밀室點密’로 기록되어 있다. (고마츠 히사오 외, 《중앙아시아의 역사》 p.80.) 6세기 중엽 몽골 고원과 중앙아시아 일대를 지배했던 유목제국 유연의 지배 아래에 있던 토문이 이끌던 투르크족은 552년 유연을 멸망시키고 돌궐 제국을 세웠다. 돌궐 제국의 건설자인 토문(투르크어로는 부민)은 스스로를 ‘이리 카간’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건국자를 뜻한다.
토문은 그 다음해에 죽고 돌궐 제국은 두 사람의 후계자에 의해 계승되었다. 동쪽은 아들 무한이 카간의 칭호를 갖고 통치하였으며 서쪽 절반은 토문의 동생 이스테미(Ishtemi)가 ‘야브구’라는 칭호를 갖고 통치하였다. 중국의 사서들은 ‘야브구’를 ‘엽호葉護’로 표기하였다. 물론 한자의 뜻이 아니라 음을 나타낸 것이다. 역사가들은 이 이스테미가 위에서 말한 시자불이라고 본다. 투르크식 이름인 이스테미가 한자 및 그리스식 이름과 크게 다른 것은 투르크어의 독특한 표기 방식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투르크인들이 비잔틴 제국에 사절을 파견하여 비잔틴과 우호관계를 맺으려고 한 이유이다. 그것은 메난드로스의 기록에 의하면 실크 교역을 놓고 일어난 페르시아와 투르크 사이의 외교적 갈등 때문이었다. 당시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들이 투르크인들의 지배 아래 있었는데 이들은 페르시아로 왕래하면서 비단을 수출하여 큰 이익을 보았다. 그러나 당시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는 소그드인들의 상업활동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페르시아인들은 그들도 비단교역의 이익에 참여하기를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페르시아에서 비단을 판매하는 사업이 어려워지자 소그드 상인들은 비단의 중요한 소비처인 비잔틴 제국과 직접 외교관계를 터줄 것을 시자불에게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마니악이라는 이름의 소그드인이 이끄는 사절단이 569년 험준한 카프카즈 산맥을 넘어 콘스탄티노플까지 온 것이다.
비잔틴 황제는 사절이 가져온 시자불의 서한을 읽고 사절에게 많은 질문을 하였다. 직접 국경을 접하고 있지는 않은 이 투르크가 어디에 있는 나라이며 통치제도는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사절은 투르크 제국은 네 개의 통치영역(hegemonia)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전체 인민들에 대한 통치권은 시자불에게만 있다고 대답했다. 현대의 전문가들에 의하면 네 개의 통치역역은 킵차크, 칼라크, 캉클리, 카를룩의 네 집단이다. (Blockley, p.263) 아마 투르크 제국을 구성하는 투르크계 족속들을 기반으로 나눈 단위일 것이다. 유스티누스 황제는 또 페르시아인들과 싸웠던 에프탈인들에 대해서도 궁금했다. 에프탈은 2년전에 투르크인들과 페르시아의 협공에 의해 멸망했는데 과연 완전히 투르크에 복속이 되어 있는지 궁금하였다. 투르크 사절은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 황제는 또 얼마 전에 다뉴브 강 너머에 나타나 골칫거리가 된 아바르인들에 대해서도 물었다. 얼마나 되는 아바르인들이 투르크의 지배를 피해 도망쳤으며 남아 있는 세력은 어느 정도인지 물은 것이다. 사절은 2만 명 정도가 도망했다고 답했다.
비잔틴 황제는 아바르를 쳐부순 투르크인들이 비잔틴과 공수동맹을 체결하자는 제안에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는 동부 전선의 장군 제마르쿠스로 하여금 마니악 일행과 투르크제국으로 갈 준비를 하라고 명했다. 이리하여 569년 비잔틴 황제가 보낸 제마르쿠스 사절단이 먼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가게 된 것이다. 메난드로스에 의하면 투르크 카간의 본영은 ‘에크탁’이라는 산에 있었는데 이 말은 ‘금산金山’이라는 뜻이라 하였다. 중앙아시아사 전문가들에 의하면 서돌궐 카간의 본영은 천산산맥 북쪽의 율두스 초원 지대에 있었다고 한다.(고마츠 히사오 외, 《중앙아시아의 역사》, p.81)
투르크로의 사절단은 그 후로도 거의 매년 보냈다. 사절단이 돌아올 때마다 여러 투르크 부족들이 보낸 투르크인들이 사절단을 따라 콘스탄티노플로 왔다. 576년 발렌티아누스 사절이 투르크로 출발할 때에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에 와 있던 106 명의 투르크인들을 모두 데리고 출발하였다고 한다. 발렌티아누스 사절은 서돌궐로 하여금 페르시아와 전쟁을 하고 있는 비잔틴 제국을 도와서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나서도록 만드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투르크로 가서 직면한 분위기는 싸늘하였다. 얼마 전 시자불이 죽고 그 아들 투르칸투스(Turxanthus)가 시자불의 자리를 계승하였는데 그는 비잔틴이 아바르와 조약을 체결한 것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투르칸투스의 말에 따르면 이 아바르인들은 투르크의 적이자 노예였던 자들인데 이들과 우호적인 동맹을 체결한 것은 투르크인들을 배반한 것이며 협정위반이라는 것이었다. 서돌궐은 비잔틴의 이러한 배신에 대한 응징으로 크림반도의 보스포로스를 점령하였다. 오늘날 케르치 시가 있는 곳으로 당시 크림반도의 중심지였다. 이곳의 점령으로 크림반도 일대가 위험에 처한 것은 물론이다.
서돌궐의 보스포루스 공격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서돌궐이 우티구르 훈족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비잔틴 제국에 맞서 북방 유목민의 연합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 연합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이룩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참고문헌
R. C. Blockley, The History of Menander the Guardsman (Francis Cairns, 1985)
고마츠 히사오 외, 이평래 역, 《중앙아시아의 역사》 (소나무,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