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이야기 29회
마자르 정복사를 담고 있는 《헝가리인들의 행적》
마자르족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소개한 비잔틴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포르퓌리게네토스의 ????제국통치론???? 외에도 13세기 초에 헝가리인 관료가 저술한 책이 있다. 라틴어로 된 이 책의 제목은 ‘Gesta Hugarorum’인데 우리말로는 ‘헝가리인들의 행적’ 정도가 될 것이다. 책의 저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헝가리 왕 벨라 3세(1172-1196) 때 공증관으로 일했던 사람이라고만 밝히고 있다. 그 수사본은 17세기에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서 발견되었다.
《헝가리 행적》은 마자르인들의 옛 거주지였던 스키티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스키티아의 주민들은 ‘덴투모게르’라고 불렸는데 그 초대 왕은 성서에 나오는 인물 야벳의 아들 마곡이었다. “스키타이인들은 마곡이라는 이름을 좇아 ‘모게르’라고 불렸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서술이 그 뒤를 이어 나온다. “그 혈통에서 나온 가장 유명한 인물이 아틸라 왕이다.” 그러나 익명의 이 저자는 약간의 시대착오를 범한다. 아틸라가 451년에 스키티아에서 나와 판노니아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는 다뉴브 강 옆의 온천 위에다 왕의 처소를 지었다. 그곳에서 발견한 모든 오래된 건물들을 복구하라고 명했는데 원형의 튼튼한 성벽 안에 건물들을 지었다. 이 성벽을 오늘날 헝가리어로 ‘부다바르’ 혹은 독일말로는 ‘에첼부르크’라고 부른다.” 저자는 헝가리의 정복자 아르파드 가문이 바로 이 아틸라 왕가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서 고대 스키타이족의 용맹을 자랑한다. 스키타이인들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과 퀴로스 대왕은 말할 것도 없고 알렉산더 대왕까지 물리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스키타이의 후손인 헝가리인들이 왜 좋은 땅 스키티아를 버리고 판노니아로 오게 되었는가? 스키티아는 넓은 곳이기는 하지만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일곱 명의 지도자 즉 ‘헤투모게르’가 모여서 의논한 끝에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하였다.
우리의 저자는 또 헝가리라는 이름이 나오게 된 연유를 설명한다. 마자르인들이 슬라브족을 정복한 후 처음으로 판노니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며칠 간 머문 곳이 ‘훈구’(Hungu) 성이었다는 것이다.
판노니아로 가는 여정 중에 일곱 족장들은 알모스를 마자르 전체의 우두머리로 추대하고 그와 그 후손들에 대한 충성을 선서하였다. (아르파드는 바로 이 알모스의 아들이다) 일곱 족장들은 후대의 유력 씨족들의 조상이 되었다.
저자는 884년에 고향 땅을 출발한 마자르 조상들이 지나간 여정을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먼저 에틸 강(오늘날의 볼가 강)을 건넌 후 러시아 땅인 수즈달을 거치고 드네프르 강을 건너 키에프 땅으로 들어갔다. 키에프 공은 알모스가 그들의 조상들이 매년 공납을 바치던 아틸라 왕의 후손이라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혔다. 키에프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힘만으로 당할 수 없어 주변에 살던 유목민인 쿠만족을 불러들였다. 당시 쿠만족 역시 마자르족처럼 일곱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 같다. 일곱 부족의 우두머리 명단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저자의 기록은 신빙성이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루테니아인들과 쿠만족 연합군은 마자르족을 이길 수 없어 키에프 성으로 도망가서 농성을 하였다. 마자르족이 사다리를 이용하여 성을 공략하려고 하자 루테니아인들과 쿠만족은 알모스에게 강화를 요청하였다. 알모스는 그들의 아들들을 볼모로 보내라는 요구와 함께 돈과 식량, 의복 등을 공물로 요구하였다. 패자들은 이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루테니아인들은 마자르족에게 판노니아가 원래 아틸라 왕의 땅으로서 비할 바 없이 좋은 곳이라고 하면서 그곳으로 갈 것을 권유하였다. 그런데 당시 판노니아에는 스클라비인, 불가르족, 블라크족 뿐 아니라 목축을 하는 로마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스클라비는 슬라브 족이고 블라크족은 라틴어에서 나온 로망스어를 사용하던 주민들을 일컫는 명칭으로 생각된다. ‘목축을 하는 로마인’이라는 말은 판노니아에 정착하여 유목민 방식으로 가축을 사육하던 로마인들의 후손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쿠만족의 일곱 족장들은 알모스가 루테니아인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아 알모스를 주군으로 섬겨 그가 가는 어느 곳이건 따라가겠다고 맹세하였다. 쿠만족 뿐 아니라 일부 루테니아인들도 판노니아 정복에 따라 나섰다고 한다.
이후 이 책의 대부분은 판노니아 정복사 서술에 할애되어 있는데 구체적인 지명을 들면서 정복과정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정복은 알모스의 아들인 아르파드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는데 그는 다뉴브 강 가에 있는 ‘아틸라의 도성’에 들어가는 감격을 맛보았다. 그곳에는 아틸라의 궁전이 일부 남아 있었다고 한다. 20일 동안 아르파드 휘하의 헝가리 군사들은 아틸라의 도성에 머물며 정복의 성공을 축하하는 큰 축제를 벌였다.
헝가리인들이 성공적으로 판노니아를 정복하고 안정된 통치를 확립했다는 소문이 나자 여러 나라 사람들이 그곳에 터전을 잡기 위해 몰려왔다. 헝가리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목민 전사들이었던 페체네그인들 뿐 아니라 놀랍게도 회교도들도 있었다. 헝가리의 제 4대 통치자 토크순(탁소니) 때 ‘이스마엘 후손들“의 많은 무리들이 왔는데 그 우두머리인 빌라와 보크수라는 사람에게 토크순은 헝가리 여러 곳의 땅과 페스트 성을 주었다고 한다. 오늘날 헝가리 정부는 유럽으로 몰려오는 이슬람 난민들에게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헝가리인들은 헝가리가 근대에 들어와 오랫동안 투르크족의 공격으로 시달렸고 또 헝가리 땅의 일부가 투르크의 직접 지배를 받았던 쓰라린 역사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중세 때 판노니아를 성공적으로 정복한 그 조상들은 오늘날의 후손들과는 달리 중동에서 들어온 회교도들을 크게 환대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참고문헌
Anonymus Belae Regis Notarius (tr, by Martyn Rady) Gesta Hungarorum (Central European University Press,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