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이야기 36회
몽골 족의 서방 원정 2
주치의 차남 바투에게 주어진 땅은 엄밀하게는 경계가 확정되어 있지 않았다. “볼가 강 너머 몽골 군의 말발굽이 닿는 데까지”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적어도 서쪽 경계는 매우 막연한 영역이었다. 그것을 확실한 지배영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몽골 군이 가서 직접 정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투의 사촌들이 대거 참여한 이 서방 원정은 1236년 봄에 서시베리아를 출발하였다.
15만 명에 달하는 이 원정군이 처음 맞닥뜨린 것은 불가리아였다. 다뉴브 강변에 있던 불가리아가 아니라 볼가 강 상류에 있던 불가리아였다. 명장 수베데이가 지휘하던 몽골 군 우익은 이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쉽게 정복하였다. 볼가 불가리아는 투르크어를 하는 유목민들이 주민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던 유목국가였다. 물론 이슬람 지역으로부터 러시아 북부로 가는 통상로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도시도 없지 않았다. 수도인 ‘불가’는 오늘날 카잔 시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볼가 강과 카마 강 합류 지역에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몽골 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불가리아를 정벌한 다음 몽골 군은 러시아로 들어갔다. 당시 키예프 루스인들은 여전히 내분에 빠져 있었다. 14년 전에 몽골 군에 패했던 쓰라린 기억에도 불구하고 공들은 서로 싸우느라 하나의 단일한 군대를 건설하지 못했다. 결과는 몽골 군의 파죽지세. 모스크바 남동쪽 200 km 거리에 위치한 랴잔 공국, 그리고 랴잔 공국과 모스크바 사이에 있는 콜롬나 공국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그리고 북쪽의 블라디미르도 함락되었다. 당시 블라디미르 공국의 공이 대공의 지위를 갖고 있었는데 블라디미르는 대공이 다스리던 수즈달과 함께 모두 함락되고 대공의 가족을 포함한 많은 주민들이 학살되었다. 1238년 2월의 일이었다.
몽골 원정군 총지휘관 바투는 일부 부대만을 이끌고 다시 발틱 해 연안에 위치한 상업도시 노브고로드를 향해 북진하였다. 그러나 날씨가 갑자기 해동하면서 눈이 녹아 노브고로드 주변이 늪지대로 변해버렸다. 바투는 진군을 멈추고 군대를 남쪽으로 돌렸다. 돈 강까지 진출한 몽골 군은 돈 강 부근의 스텝 지역에서 너긋하게 휴식을 취하며 1239년을 보냈다. 그 동안의 전투에서 상실된 병력은 킵차크 족에게서 징집한 인원으로 벌충하였다.
당시 몽골 군 좌익은 칭기즈칸의 4남 톨루이의 장남인 몽케가 이끌었는데 몽케는 후일 4대 대칸이 되는 사람이다. 그의 부대는 남쪽의 볼가 하류로 향했다. 카스피 해 북쪽의 초원지대에는 우리가 앞에서 본 폴로베츠 즉 쿠만 족의 영역이었다. 이들을 몽골 인들은 ‘킵차크’라 불렀다. 그런데 이 킵차크 족은 쉽게 항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두머리인 바흐만이 도망 다니다 잡혀서 죽기까지 저항하였으며 일부 주민들은 산 넘고 물 건너 헝가리 평원까지 도주하였다. 당시 킵차크 연맹은 다른 유목민들이 그러하듯 여러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헝가리로 도망간 족속은 쿠툰(기록에 따라서는 쿠텐이라고도 되어 있다)이라는 사람이 이끌던 4만 명에 달하던 집단이었다. 헝가리인들은 예전에 자신의 조상들을 그 땅에서 쫓아냈던 킵차크 인들에게 기꺼이 피난처를 제공하였다. 그 이전에도 헝가리는 스텝 지역에서 이주해오는 소규모 유목민 집단들을 많이 받아들였는데 이 때도 그러한 전례를 따른 것이었다. 헝가리 왕 벨라 4세의 입장에서도 자발적으로 헝가리 땅으로 들어와 자신을 주군으로 섬기겠다는 킵차크 인들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충실한 병사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헝가리인들처럼 기독교도로 개종하겠다는 약속도 하였다. 벨라 왕은 그 약속에 감동하였던지 그들을 맞기 위해 몸소 국경까지 행차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몽골 군으로 하여금 헝가리를 공격할 정치적 명분을 제공하였다.
몽골 군의 좌우익은 다시 하나로 합쳐서 드네프르 강변에 위치한 루시의 수도 키예프를 공격하였다. 키예프는 항복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심지어는 사절까지 죽여버렸던 것이다. 몽골 군의 복수는 피할 수 없었다. 1240년 12월 키예프는 함락되었다. 일부 키예프 지도자들이 폴란드와 헝가리로 도주하였는데 이것이 또 폴란드와 헝가리의 침략 구실이 되었다.
키예프에서 몽골 군의 일부는 계속 서진하여 폴란드의 서부에 위치한 실레지아 지방까지 진격하였다. 리그니차 전투(1241년 4월 9일)에서 실레지아 공작 하인리히는 몽골 군에 참패하였다. 공작도 붙잡혀 살해되었다. 전사한 폴란드 군사들의 잘린 귀가 아홉 부대나 되었다고 한다. 남쪽 모라비아 지방도 공격을 받아 많은 곳이 폐허로 변했다.
헝가리에 대한 공격은 훨씬 더 대규모 병력으로 이루어졌다. 세 방면으로 나뉘어 몽골 군은 수도를 향해 진격하였는데 결전은 부다페스트가 아닌 동북쪽의 ‘무히’라는 마을 부근에서 이루어졌다. 리그니차 전투가 있은 후 불과 이틀만인 1241년 4월 11일에 벌어진 전투인데 이 전투에서 벨라 왕의 군대는 바투와 수부타이가 지휘하는 몽골 군과 싸워 참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태반의 병력을 잃은 벨라 왕은 서쪽 오스트리아로 도망갔다. 그런데 오스트리아 공 프리드리히는 헝가리 왕의 곤경을 이용하여 오스트리아 영토를 넓히려는 속셈이 있었다. 영토를 요구하고 돈을 요구하자 벨라 왕은 오스트리아에 더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헝가리 남쪽의 크로아티아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로마 교황에게 십자군을 일으킬 것을 호소하고 또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게는 독일의 제후군을 조직하여 헝가리를 도워줄 것을 호소하는 서한을 발송하였다. 물론 이러한 외교적 노력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교황청은 기껏해야 이교도인 몽골 군에 대항할 십자군을 조직하라고 군주들에게 호소할 수 있을 뿐이었는데 십자군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8월에 죽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교황당과 싸우고 있었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 왕으로 있는 아들 콘라드에게 독일 제후군을 조직하여 도와주라고 했지만 소규모 독일군도 ‘타타르 군대’가 다뉴브 강에서 진격을 멈추었다는 소식에 해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12월에 몽골 군은 얼어붙은 다뉴브 강을 건너게 된다)
그런데 카단(차가타이의 아들) 휘하의 몽골 군 파견대가 벨라를 잡으러 오고 있다는 정보가 벨라에게 전해졌다. 벨라는 자그레브에서 달마치아 해안 지방으로 도주하였다. 쫓고 쫓기는 작전이 개시되었는데 몽골 군은 종내 벨라 왕을 체포하지 못했다.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해안 지방은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되었다. 몽골 부대는 왕을 붙잡지 못하고 풍광 좋은 이 해안을 따라 오늘날의 알바니아 국경까지 내려갔다. 뜻하지 않게 몽골 군은 초원의 전사들이 작전을 펼치기에는 초지도 없고 산지가 많은 달마치아 지방까지 온 셈인데 이곳이 몽골 군이 진격한 최남단이 되겠다. 벨라를 찾지 못한 카단 부대는 알바니아에서 발칸 반도 내륙으로 들어가 불가리아로 향했다. 필자도 헝가리에서 크로아티아, 알바니아, 마케도니아를 거쳐 불가리아로 육로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마치 우리나라 강원도나 경상북도 산골을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넓은 초원에 익숙한 몽골 군대가 어떻게 이 불리한 루트를 통해 불가리아까지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몽골 군은 헝가리 공격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서진하지 않았다. 물론 일부 전초부대가 독일까지 갔던 것은 사실이지만 본격적인 원정이라고는 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몽골 군이 서유럽을 공격하지 않아 서유럽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몽골 군이 서유럽 공격을 단념하고 헝가리에서 철수한 것은 1242년 봄에 전해진 대칸 오고타이의 사망소식 때문이었다. 오고타이 칸은 1241년 12월에 사망했는데 그 소식이 헝가리 주둔군에 봄에 전해졌던 것이다. 몽골 족은 대칸의 계승원칙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칭기스칸 집안의 사람들이 모여 쿠릴타이를 열고 대칸을 선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돌아가는 분위기가 오고타이의 장자 쿠육이 대칸으로 옹립될 가능성이 높았다. 오고타이 집안과 사이가 나쁜 바투의 입장에서는 원정 때문에 유럽에 머무는 것은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바투는 그 휘하의 몽골 군대를 볼가 하류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그는 더 이상 유럽을 상대로 원정을 계속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볼가 강 유역을 중심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남러시아 일대의 킵차크 초원 뿐 아니라 러시아도 그의 지배 하에 들어 왔기 때문에 이 광대한 지역을 공고히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돌아가 볼가 하류에 수도 사라이를 건설하였다. 이곳이 유럽인들에게 ‘금장한국(Golden Horde)’으로 알려진 바투 울루스의 중심지가 되었다.
독자들은 이쯤에서 섬으로 도주했던 헝가리의 벨라 왕이 어떻게 되었던지 궁금할 것이다. 그는 몽골 군이 퇴각한 후 헝가리로 돌아와 열심히 요새들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평지에서는 몽골 군과 싸워서는 이길 가망이 없지만 튼튼한 성벽을 가진 요새에 들어가서는 항복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다. 곳곳에 요새를 세우기 위해서는 지방 제후들의 협조를 얻어야 한다. 이러한 지방 제후들만이 요새건설에 필요한 인력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왕은 제후들에게 토지를 양여하고 많은 특권을 부여하였다. 또 헝가리인들은 유목민의 후손이라서 그런지 도시생활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왕은 외국인들을 불러들였다. 폴란드인, 슬라브인, 루스인, 루마니아인, 심지어는 헝가리인들에 의해 몽골의 첩자로 오해받아 쫓겨났던 쿠만 족들까지 널리 불러들였다. 데니스 시노르 교수는 헝가리인들의 인종적 다양성이 이렇게 몽골 침략의 한 결과였다고 지적한다. 좌우간 군사적으로는 몽골의 침략을 격퇴하지 못해 도망 다니던 수모를 겪었던 벨라 4세는 몽골의 2차 침입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나라 곳곳에 요새를 건설하는 바람에 헝가리 ‘제2의 건국자’라는 이름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몽골 족은 러시아는 계속 지배하였지만 헝가리로는 다시 오지 않았다.
참고서적
J. Saunders, The History of Mongol Conquests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01)
D. Sinor, History of Hungary (Greenwood Press,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