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이야기 39회
윌리엄 루브룩의 몽골 선교여행
윌리엄 루브룩의 몽골 여행기는 카르피니의 여행기와 더불어 당시 몽골족에 대한 중요한 사료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루브룩은 프랑스령 플랑드르 출신의 프란체스코회 수사였다. 그는 1253년 5월 안티오키아를 출발하여 연말에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 도착하여 그곳에 약 7개월 정도 머물다 1255년 8월 지중해 동안에 있는 트리폴리로 귀환하였다. 그는 자신이 본 것과 들은 것을 자신의 왕인 프랑스 왕 루이 9세에게 보고하는 형식으로 서술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남아 있는 그의 여행기(Itinerarium)이다.
루브룩은 교황의 사절이 아니라 프랑스 왕의 사절이었다. 엄밀하게는 외교사절은 아니고 선교사로 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4년 전인 1249년 초 루이 9세는 앙드레 드 롱주모를 사절로 몽골에 파견한 적이 있었다. (이 앙드레는 수년 전에 교황사절로도 페르시아 주준 몽골군에 파견된 적이 있던 인물이다) 루이 9세가 십자군 원정을 위해 키프로스 섬에 주둔하고 있을 때 페르시아 주둔 몽골 장군 엘지기다이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 두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 놀라운 제안을 하였다. 그 사신들에 의하면 당시 대칸인 구육과 엘지기다이가 모두 세례 받은 기독교인이며 엘지기다이는 프랑스 왕이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하는 것을 도와줄 것이라는 약속도 하였다. 이는 물론 대칸의 생각은 아니고 이슬람 칼리프 제국과의 싸움을 앞두고 있던 엘지기다이가 전략적인 차원에서 한 말이었을 따름이다. 실제로 구육 칸은 유럽원정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엘지기다이는 루이 9세에게 보낸 서신에서 몽골인들이 “지금 이곳에 온 것은 오로지 기독교도의 이익과 안전을 위한 것”이라 선전하였다. 프랑스 왕은 이러한 엘지기다이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앙드레 수사를 몽골 대칸에게 사절로 파견했던 것이다.
예상할 수 있듯이 앙드레 사절은 프랑스 왕의 기대와는 달리 완전 실패였다. 왕은 구육 칸이 기독교도라고 믿고서 초원에서 사용할 수 있는 천막예배당과 성서 등 미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선물로 보냈다. 그러나 구육 칸은 사절단이 출발하기 수개월 전인 1248년 4월 중앙아시아에서 급사하였고 그 미망인 오굴카이미시가 섭정을 맡고 있었다. 사절단이 이리 강(오늘날의 중국과 카자흐스탄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강) 주변에 진을 치고 있던 오굴카이미시로부터 받아온 답서의 내용은 지극히 실망스런 것이었다. 프랑스 왕이 보낸 선물을 대칸에 대한 복속의 표시로 보내는 공납으로 간주하였을 뿐 아니라 “그대가 해마다 얼마간의 금과 은을 짐에게 보낸다면 짐은 그대와 벗이 될 것이다. 만약 그대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짐은 앞에서 말한 자들 모두를 절멸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그대와 그대의 백성들을 없애버리겠노라.”고 노골적으로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프랑스 왕이 몽골 장군 엘지기다이의 편지와 그 사절들의 말을 순진하게 그대로 믿었던 것이 잘못이었다. 앙드레 드 롱주모 사절은 외교적으로는 실패였지만 그가 보고 들은 것들은 모두 이후의 사절들을 위한 토대가 되었다. 루이 9세와 함께 십자군 원정에 동행하였던 루브룩에게 특히 그러하였다. 루브룩이 몽골에서 돌아온 앙드레 사절단을 만난 것은 루이 9세의 십자군 부대가 팔레스타인의 항구도시 카이사레아의 요새화 작업을 하고 있던 1251년이었다. 몽골에는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다는 것 뿐 아니라 심지어는 초대 칸 — 칭기스칸 — 이 기독교로 개종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남러시아에 영지를 갖고 있던 바투의 아들 사르탁이 기독교도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루브룩은 이러한 정보에 기대를 걸었다. 몽골의 대칸은 기독교도들을 박해하지 않고 선교의 자유를 준다. 그렇다면 몽골에 가서 선교를 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만일 몽골의 칸들이 기독교로 개종한다면 유럽은 몽골 제국의 침공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그들과 평화를 맺는 것도 가능하리라. 이것이 루브룩의 생각이었다.
루브룩 일행은 1253년 5월 7일 콘스탄티노플을 출발하여 바닷길로 크림 반도의 주요 상업항인 수닥(그리스인들은 수달리아라 불렀다)으로 갔다. 그곳에서 콘스탄티노플 상인들을 만났는데 이들은 여행에 필요한 실제적인 정보와 조언을 해주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프랑스 왕의 공식적인 사절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공식사절이 아닌 신분으로는 몽골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말에 짐을 싣고 가기보다는 소가 끄는 수레를 여러 대 구입하여 그곳에 물건을 싣고 가는 것이 편하다고 하였다. 수레는 덮개가 있는 수레여서 거기서 잠도 잘 수 있고 한낮에는 그 밑에서 햇빛을 피할 수도 있다.
일행은 바르톨로메라는 이름의 동료 수사 한 사람, 선물 관리인으로 고용한 고쎄라는 급사, 통역, 또 콘스탄티노플에서 구입한 젊은 청년 노예 한 명 등 모두 다섯 명에다가 콘스탄티노플 상인들이 붙여준 수레몰이꾼 두 사람을 더해 모두 일곱이었다. 이들이 타고 갈 ‘승용차’ 즉 수레는 현지에서 구입한 것이 네 대, 빌린 것이 두 대 등 모두 여섯 대였다.
사절단은 해안으로 난 길을 따라 크림 반도 북쪽의 페레코프 지협을 지나 사르탁 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사르탁의 진영에 도착한 것은 7월 31일, 수닥을 출발한 지 두 달만이었다. 다음날 사르탁 칸을 알현할 때 사절단은 성서와 여러 가지 성물들을 보여주었는데 사르탁은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아랍어와 시리아어로 번역된 프랑스 왕의 서신을 전했다. 물론 서기들이 이 서한을 사르탁이 읽을 수 있도록 다시 몽골어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서한에는 사르탁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는 내용이 있어 사르탁은 사절단을 다시 자기 부친인 바투에게 보냈다.
바투에게 간 루브룩은 곧 바투를 면담할 수 있었다. 루브룩은 과감하게 바투에게 지상의 행복보다 천상의 행복이 낫고 천상의 행복을 누리려면 기독교를 믿고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루브룩의 말에 바투는 반박하거나 화를 내지 않고 그냥 미소만 지었다고 한다. 아마 바투가 알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프랑스 왕이 누구와 전쟁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또 바투는 프랑스 왕이 자신에게 사절을 파견한 적이 있는지를 물었다. 루브룩은 없다고 대답하였다. 면담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온 후 바투의 결정이 전달되었다. 자신은 이들의 기독교 선교를 위한 루브룩 일행의 체류여부를 결정할 권한이 없으니 몽케(기록에 따라서는 ‘망구’라고 되어 있다) 대칸에게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루브룩과 통역 두 사람만 가라고 하였으나 루브룩은 동료 바르톨로메 수사의 동행을 주장하여 세 사람이 카라코룸으로 가게 되었다. 급사 고쎄와 젊은 종은 사르탁에게 돌아가 루브룩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였다. 루브룩 일행은 35일 정도 바투와 함께 지냈다. 바투의 무리는 오백 명 약간 안 되는 수로 이루어졌는데 이들과 함께 루브룩 일행도 에틸리아 강(볼가 강)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천호(千戶)의 직책에 있는 몽골인이 와서 그에게 카라코룸으로 가는 여행을 자신과 함께 곧 떠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여정이 무려 4개월이나 걸린다고 하면서 자신이 없으면 여행을 포기하라고 하였다. 9월 15일 볼가 강변을 출발하여 12월 27일에 도착하였으니 실제로도 석달 반이 걸린 여정이었다. 물론 전처럼 소가 끄는 수레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몽골 제국의 역참을 이용하여 말을 갈아타고 가는 여정이었다.
참고서적
Willam Rockhill (tr.), The Journey of Willam Rubruck to the Eastern Parts of the World 1253-1255 (1900)
김호동 역주, 《몽골제국기행》 (까치,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