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이야기 46회
모스크바 대공국
타타르의 지배 즉 킵차크 한국의 지배를 떨치고 러시아에 해방을 가져다 준 것이 모스크바 공국이다. 모스크바 공국은 이후 러시아 역사의 주역이 된다. 모스크바 대공이 전 러시아의 차르(황제)가 되어 러시아를 통일시키고 대외적으로는 영토를 크게 확대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16세기 후반 남러시아 스텝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정복에 나서 몽골 제국의 뒤를 이어 엄청난 영토와 민족들을 지배하는 세계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가 처음 러시아 문헌에 언급되는 것은 1147년으로서 당시 모스크바는 수즈달 공국에 속한 작은 읍에 불과하였다. (《몽골제국과 러시아》, 347) 키예프 대공 유리 돌고루키가 모스크바를 세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손자가 블라디미르 대공 알렉산더 네프스키이다. 알렉산더 네프스키가 몽골에 대항하는 짓은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반서방, 친몽골적인 정책을 취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그가 죽었을 때 넷째이자 막내아들인 다니엘은 두 살짜리 어린애였는데 모스크바를 물려받아 모스크바 공이 되었다. 제1대 모스크바 공인 셈이다. 하지만 모스크바는 아직은 목책으로 둘러싸인 소도시에 불과하였다. 다니엘의 아들 유리는 블라디미르 대공 — 러시아의 대표와 같은 자리 — 자리를 놓고 트베르의 미하일과 싸웠다. 그는 사라이에 가서 2년이나 머물며 우즈벡 칸의 마음을 사로잡아 미하일이 갖고 있던 블라디미르 대공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는 또 칸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칭기즈칸 집안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그런데 그 칸의 여동생 아가피아(몽골 이름은 콘차카로 알려져 있다)가 모스크바와 트베르의 싸움에서 그만 포로로 잡혔다가 죽었다. 미하일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아 미하일은 사라이로 불려갔는데 그곳에서 심문을 받고 처형되었다. 미하일의 아들 드미트리는 자기 부친의 복수를 한다고 유리를 살해하였다. 물론 이러한 불법적인 행동 때문에 드미트리 역시 부친처럼 몽골 당국에 의해 처형되었다.
몽골의 사위로서 신임을 얻었던 유리는 러시아인들이 몽골에 바치는 세금을 거두는 임무를 맡았다. 이러한 몽골 당국을 위한 세금수납인 역할은 그 후 계속해서 모스크바 공들이 수행하였는데 상당한 금전적 이익을 가져다주었던 것은 물론이다.
유리의 아들 이반 1세는 모스크바 공국 흥기의 기반을 닦은 인물인데 특히 재정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후대 모스크바 대공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늘어나는 수입으로 땅을 사들였다. 파산한 공들의 영지도 통째로 사들이고 개별 촌락들도 사들였다. 또 몽골이 포로로 잡아갔던 러시아인들을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와 정착시켰다. 이렇게 경영자로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기 때문에 이반에게는 ‘돈주머니 이반’(이반 칼리타)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그의 치세기(1328-1341)에는 또 러시아의 수좌대주교 — 정식 명칭은 ‘키예프와 전 러시아의 수좌대주교’를 모스크바에 정착시킴으로써 모스크바는 명실상부한 러시아의 종교중심지가 되었다.
금장한국 입장에서도 충성스런 모스크바 공국은 여러 가지로 이용가치가 있었다. 특히 금장한국은 서쪽에서 흥기하여 러시아로 세력을 뻗쳐오는 리투아니아 공국 세력을 견제하는 데 모스크바를 동맹으로 적절히 이용하였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공국은 금장한국이 내란(1359-1381)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키예프를 점령하고 드네프르 강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 종교적인 면에서 러시아와는 달리 아직은 이교도 국가였던 리투아니아 공국이 모스크바 공국과 경계를 접하게 된 것이다. 리투아니아 공국은 중세 말 동유럽에서 혜성처럼 흥기한 정복국가였는데 그 근거지가 오늘날 리투아니아가 위치한 발틱 연안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독일기사단이 선교활동을 구실로 밀고 들어오자 리투아니아는 군사적으로 취약했던 러시아로 진출하게 된 것이다.
리투아니아 공국이 요가일라(폴란드어로는 야겔로) 대공 때 폴란드 공주와의 혼인을 기반으로 폴란드 왕국과 통합되어 동유럽 최강국으로 부상한다는 사실, 리투아니아는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 왕국과 통합되면서 가톨릭 국가가 되어 러시아와는 종교적으로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우리의 주제로 넘어가기로 하자.
이반 칼리타의 손자가 ‘드미트리 돈스코이’라고 하는 드미트리 대공이다.(재위 1359-1389) 돈스코이라는 것은 ‘돈 강의 사람’이라는 뜻인데 1380년 돈 강 부근의 쿨리코보에서 금장한국 군대와 싸워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 승리 때문에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시성되어 성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전까지 몽골 세력에 대한 도전은 꿈도 꿀 수 없었으나 이 드미트리가 처음으로 몽골 세력에 도전한 것이다. 당시 블라디미르 대공 자리를 놓고 모스크바는 트베르와 격렬하게 경쟁하였는데 당시 금장한국의 실력자 마마이 장군이 트베르의 미하일에게 대공 자리를 주었다. 그러자 드미트리는 반기를 들고 그 결정을 무산시켜 버렸다. 이렇게 금장한국의 권력에 반기를 둔 드미트리를 마마이는 용서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일어난 쿨리코보 전투는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첫걸음처럼 여겨져 왔으나 그렇다고 모스크바 측의 일방적인 승리는 아니었다. 마마이의 군대가 종국적으로는 러시아 매복부대의 기습으로 패해서 달아났지만 모스크바 측의 피해도 대단히 컸다. 전투가 끝나자 많은 왕자들과 장수들이 전사하였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드미트리 공도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몽골군과 동맹을 체결하였던 리투아니아 대공 야겔로의 군대가 이틀이나 늦게 도착한 것도 드미트리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야겔로는 모스크바가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는 싸우지 않고 군대를 돌려 퇴각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 이후 러시아인들은 환호하였다. 드미트리는 타타르의 압제에 대항하는 러시아의 수호자로 부각되었다. 일부 공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러시아 공들이 드미트리의 편에서 타타르와 싸울 의향이 있음을 드러내었다. 이제 모스크바는 급속히 러시아의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또 몽골군은 불패라는 전설이 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타르의 지배는 그로부터 100년 더 지속되었다. 왜 1380년 쿨리코보 전투를 계기로 러시아는 해방되지 못했을까?
금장한국의 내전이 계속되었더라면 아마 러시아의 해방은 그 때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곧 금장한국은 새로운 권력자 밑에서 급속히 정치적 안정을 되찾았다. 마마이 장군과 대립하던 동부의 톡타미쉬 칸이 동서로 분열되어 있던 금장한국을 통일한 것이다. 1381년 칼카 강 전투에서 톡타미쉬 칸의 군대가 마마이 군대를 격파하고 자신이 러시아의 통치자임을 모든 러시아 공들에게 과시하였다. 그는 러시아 공들에게 사절을 보내 그 사실을 통지하였다. 거의 모든 공들이 그를 상전으로 인정하였다. 신흥 각국 리투아니아의 대공 야겔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이번에도 몽골 세력에 도전하였다. 톡타미쉬가 보낸 사절들을 가로 막은 것이다. 톡타미쉬는 즉각 징벌군을 모스크바로 파견하였다. 랴잔, 니즈니 노보고로드, 수즈달 공들은 타타르 군에 대하여 적극적인 협력은 하지 않았지만 중립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1382년 8월 모스크바는 성문을 닫아걸고 포위공격에 맞섰다. 그러나 결국 타타르 군에 성문을 열어주어야만 하였다. 타타르 군대는 모스크바를 약탈하고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약탈과 살해가 끝난 후 드미트리 공이 수습한 시신만도 24.000 구에 달했다고 한다.
이제 타타르의 지배에 대한 저항은 부질없는 짓이 되었다. 러시아의 공들은 사라이로 가 톡타미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야를릭을 받아왔다. 칸은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트베르와 모스크바에게는 충성을 담보하기 위한 볼모를 요구하였다. 트베르의 미하일 공과 모스크바의 드미트리 돈스코이 모두 자신의 아들을 볼모로 보내야 하였다. 러시아의 시련을 계속되었다. 러시아인들은 내전 때보다도 높은 세율의 세금을 바쳐야 하였다. 또 칸이 요구할 때에는 언제나 러시아 청년들을 병사로 보내야 하였다.
러시아에 대한 타타르의 지배는 1480년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이반 대제, 재위 1462-1505)가 금장한국에 대한 일체의 공납과 선물을 폐지해 버렸을 때 찾아왔다. 이반 3세는 북부의 부유한 노브고로드 공국, 모스크바의 오랜 경쟁자 트베르, 남부의 체르니고프 등을 합병하여 모스크바 공국의 영역과 세력을 크게 확대하였는데 그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였다. 물론 몽골군은 모스크바가 조공을 폐지하자 원정군을 파견하였지만 모스크바 남방 100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오카 강도건너지 못하고 스텝 지역으로 퇴각해버렸다. 이제 힘의 균형이 러시아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던 것이다. 이반 3세의 이러한 승리는 고려가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몽골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지 100년 이후에 찾아왔다.
참고문헌
게오르기 베르나드스키, 《몽골제국과 러시아》
니꼴라이 랴자노프스키, 《러시아의 역사 I, 고대-1800》 (이길주 역, 까치,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