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이야기 58회
토트 남작
18세기 후반 크림 한국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은 서양인이 있다. 프랑스 귀족인 프랑수아 드 토트(1733-1793)이다. 프랑수아 토트의 부친은 헝가리 출신이었는데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오스만 제국에 망명하였다가 프랑스로 귀화하였다. 16세기 이후 프랑스는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의 동맹국이었다. 이러한 사정이 작용하여 그의 부친이 프랑스로 오게 되었던 것 같다. 토트의 부친은 프랑스 군대의 장교로 복무하여 남작(baron)의 작위를 얻었는데 그 아들 프랑수아도 스물 한 살의 나이에 부친의 부대에 합류하였다. 프랑수아 토트는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755년 오스만 제국의 대사로 부임되어 가는 베르젠 백작의 수행원으로 콘스탄티노플로 가게 되었다. 주어진 임무는 투르크어를 배우고 투르크의 풍속과 통치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콘스탄티노플에서 8년간 지내다 유럽으로 돌아갔다가 1767년 다시 동유럽으로 파견되었다. 이번의 파견국은 오스만 제국이 아니라 오스만의 동맹국이었던 크림 한국이었다. 당시 동유럽에서는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러시아를 견제할 하나의 방책으로 크림 한국에 사절을 파견한 것인데 토트 남작이 그 임무를 맡게 되었다.
남작은 크림 한국으로 부임하는 길을 육로로 선택하였다. 비엔나로 가서 다시 그곳에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로 넘어가 그곳에서 6주 동안 머문 후 동쪽의 몰다비아로 향했다. 당시 폴란드와 몰다비아와의 국경은 오늘날과 같이 드네스트르 강이었다. 몰다비아의 수도인 야시를 거쳐 베사라비아로 넘어가 당시 오스만 제국의 주요 요새인 흑해 연안의 오차코프 요새를 둘러보았다. 프랑스 대사가 온다는 소식에 크림 한국에서도 사람을 보냈는데 그의 안내 하에 토트 남작은 크림 한국의 수도 박치사라이로 들어갔다.
토트 남작은 호기심도 많고 견문도 넓은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따뜻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 같다. 여행 도중에 영접임무를 맡은 오스만 관리들은 현지 주민들의 식량을 무상징발하곤 하였는데 남작은 그러한 무상징발에 반대하고 가난한 현지주민들에게 받은 식량의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주었다. 또 도중에는 노가이인들에게 붙들려가는 독일 출신의 노예들을 우연히 만났는데 모두 16명이나 되는 이 독일인 무리를 해방시켜 주기까지 하였다. (돈을 주고 풀려나게 하였는지 아니면 동반한 크림 한국 관리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그냥 풀려나게 하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남작은 그들을 박치사라이까지 데려가 고국으로 무사귀환 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는 곧 크림 한국의 칸과 친해졌는데 곧 러시아와 투르크 사이의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 발발 당시 칸은 키림 기레이 칸이었다. 키림 칸은 토트 남작을 매우 좋아하여 언제나 가까이 머물게 하였는데 전쟁이 일어나자 그를 데리고 전선으로 나갔다. 오스만의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투르크 젝구과 러시아 제국 사이의 전쟁에 크림 한국이 참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크림 한국은 러시아와 접경하고 있는 러시아의 적국이 아니었던가. 오스만 제국과 크림 한국 사이의 협의를 통해 크림 한국은 20만의 병력을 세 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러시아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누렛딘 술탄은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돈 강을 따라 북상하고, 크림 한국의 제 2인자인 칼가 술탄은 6만의 병력으로 보리스테네스 강(드네프르 강)을 따라 진격하기로 하였으며 칸 자신은 10만의 대병력을 이끌고 표트르 대제 때 설치되었던 ‘신新세르비아’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원정 직전에 폴란드 동맹의 특사가 도착하였는데 폴란드 동맹군과 협의를 위해 키림 칸은 토트 남작에게 폴란드 반군과의 협의를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남작은 키림 칸과 떨어져 폴란드 국경지대로 이동하였다.
토트 남작이 후일 남긴 비망록에는 키림 칸의 원정을 따라 나가 목도한 일들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원정은 원정이었지만 러시아 군과의 큰 전투는 없었다. 키림 칸의 군대는 오스만의 기병(시파히) 부대와 함께 러시아 촌락을 약탈하고 마을들에 불을 지른 정도였는데 토트 남작의 말에 의하면 150 개의 마을들이 불탔다고 한다. 무엇보다 주민들을 포로로 잡은 것이 칸의 군대과 오스만 군대의 큰 소득이었다. 대부분 러시아 주민들이었다. 일부 통제를 이탈한 병사들이 동맹국인 폴란드 국경을 넘어가 폴란드 촌락을 약탈한 일이 있었는데 키림 칸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면서 당시 약탈에 참여한 병사들을 직접 징계하였다. 동맹국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신경을 썼던 것이다. 약탈을 자행한 타타르 병사 가운데 한 사람은 본보기로 처형되었다. 병사들이 노획한 물건이나 포로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10분의 1세가 적용되었다. 칸에게 전리품의 1/10을 바쳐야 했던 것이다. 당시 키림 칸에게 바쳐진 포로가 2천 명이었다고 하니 전체 포로로 잡힌 사람들의 수는 모두 2만 명에 달했던 것이다. 물론 전투가 없었으니 러시아 군인은 없었고 대부분 불운한 민간인들이었다. 키림 칸은 자신의 수중에 들어온 이 노예들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선심을 쓰는 선물로 이용하였다. 토트 남작에게도 여섯 명의 러시아 인 노예를 주었는데 토트 남작은 거절하였다. 전쟁에서 노획한 물건이나 포로는 모두 그것을 차지한 승자의 권리인데 칸은 토트 남작의 거절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토트는 자신의 종교를 내세우면서 같은 기독교인을 노예로 삼을 수 없다고 변명하였다.
그런데 원정 중 갑자기 칸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당시 의사로 왈라키아 출신의 그리스인 기독교도 의사를 고용하였는데 이 사람이 준 약을 의심하지 않고 복용하여 키림 칸은 결국 죽고 말았다. 토트 남작은 기독교도인 그 의사를 믿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였지만 사람 좋고 낙관적인 키림 칸은 그 충고를 듣지 않았다. 칸이 죽자 원정도 중단되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키림의 조카인 데블렛이라는 인물을 새로운 칸에 임명하였다. 그는 오스만 제국 내에 있는 칸의 영지에 살고 있었다. ‘세라이’라고 불린 이 도시는 17세기 초 크림 한국의 셀림 1세에게 주어진 영토였다. 당시 셀림 1세가 유럽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오스만 제국을 구원하자 오스만의 병사들이 그에게 술탄 자리에 오를 것을 권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천성이 겸손하였던 이 인물은 그 제안을 거절하고 메카 순례를 할 수 있는 특권만을 받았다. 이 세라이 영지는 오스만 제국이 신민들에게는 외국의 영토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죄를 짓고 여기로 도망가는 도피성의 역할을 하였다. 이곳으로의 도피 내지 망명은 칸에게는 상당한 수입이 되었다고 한다. 망명자는 영지의 주인인 칸에게 돈을 바쳐야 하였기 때문이다.
토트 남작은 키림 칸의 사망으로 원정이 중단되자 크림 한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콘스탄티노플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그곳에서 프랑스 정부의 훈령을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비서와 하인을 데리고 다뉴브 강과 발칸 산맥을 넘어 오스만 투르크로 들어갔다. 떠나기 전 크림 한국의 관리가 충고한 대로 세라이에 머물고 있던 새로운 칸인 데블렛 칸도 만나볼 작정이었다. 세라이 궁에 간 토트 남작은 데블렛 칸과 면담하고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외교관인 토트 남작의 눈에는 이 젊은이는 그의 삼촌과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능력이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나이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어린 나이였을 뿐 아니라 크림 한국이 직면한 어려움들을 헤쳐 나가기에는 지나치게 유약한 인물이었다. 토트 남작의 기록에 의하면 그 삼촌인 키림 칸은 서양문화에도 관심이 많아 몰리에르에 대해서도 자신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심지어는 그 작품 가운데 하나를 타타르 말로 번역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또 음악을 좋아하여 궁정에 악단을 두었는데 죽기 직전 악사들에게 음악을 연주해 줄 것을 부탁하고는 그 음악을 들으며 장엄하게 운명하였다고 한다.
토트 남작은 오스만 제국에 와서는 오스만 군을 도와 다르다넬스 해협을 방어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전쟁 후에는 오스만 군대의 근대화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프랑스로 귀국해서는《투르크와 타타르에 대한 토트 남작의 비망록 (Mémoires du Baron de Tott Sur les Turcs et les Tartares)》이라는 제목으로 네 권으로 된 비망록을 간행하였다.(1784-1785) 이 가운데 제2권이 크림 한국에 관한 비망록이다. 같은 책이 영어로도 거의 동시에 간행되었는데 번역자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고 그냥 ‘파리의 한 영국 신사’라고만 되어 있다. 저자인 토트 남작이 직접 영역본을 감수하였다고 나와 있다. 필자가 그 가운데 제2권을 검토해본 결과 철자오류는 말할 것도 없고 번역이 틀린 곳이 더러 있었다.
참고문헌
Baron de Tott, Mémoires du Baron de Tott sur les Turcs et les Tartares, (Amsterdam, 1784-1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