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이야기 59회
크림 한국의 합병
러시아의 돌고루키 장군의 군대가 크림 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페레코프 요새를 점령한 것은 1771년 6월 25일이었다. 요새는 900 명 가까운 병력이 지키고 있었는데 러시아 군의 공격에 오래 견디지 못하고 항복하였다. 후방에 있던 3만 5천에 달하는 타타르와 오스만 군대는 혼란 속에서 반도 남쪽으로 도주하였다. 러시아 군은 7월 5일 남부의 케페(카파)를 점령하였다. 요새를 지키던 오스만 군의 장군과 1,300 명의 병력이 포로로 잡히고 2만 2천 명의 오스만 투르크 병사들이 160 척의 선박으로 도주하였다. 타타르 군사들은 대부분 집으로 돌아갔다. 큰 전투 없이 크림 반도가 점령된 것이다. 당시 칸의 자리에 있던 셀림 칸은 러시아 군에 항복하고는 칸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러시아의 압박 속에서 이번에는 오스만 제국이 아니라 크림 한국의 부족 지도자들에 의해 새로운 칸이 선출되었다. 사히브 칸이라는 인물인데 그는 샤힌 기레이를 한국의 2인자인 칼가로 지명하였다. 이 샤힌 기레이라는 인물은 크림 한국이 러시아에 합병되기까지 10여 년간 친러시아파 인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771년 11월 샤힌 기레이가 이끄는 크림 한국 사절단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였다. 사절단은 러시아와 크림 한국의 독립문제를 협의하였는데 크림 한국은 기레이 가문의 지배하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정식 조약은 1772년 11월 카라수 바자르에서 체결되었다. 그러므로 1774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쿠축카이나르자 조약은 이 카라수 바자르 조약을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카라수 바자르 조약에서는 칸은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의 간섭 없이 ‘전통에 따라’ 선출된다고 하였지만 러시아 군대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빼앗은 케페 주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켰다. 반러시아 사태가 벌어지면 언제나 출동할 태세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간섭에 반대하는 타타르 인사들은 1771년 여름 오스만 제국이 크림에서 패하자 대거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이슬람 성직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친오스만파로서 오스만 제국이 크림 한국에 개입하도록 압력을 행사하였는데 물론 이는 오스만 제국이 전쟁에서 이겨야만 현실성이 있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반러시아 망명객들뿐 아니라 크림 한국 내부에서도 러시아에 대한 반대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크림 한국의 지도층 내에서도 확실히 의견이 정리되지 않았다. 1773년 말에는 사히브 칸이 러시아 영사를 체포하고 카라수 바자르 조약 이전으로 돌아가려고 한 일도 일어났다. 그는 오스만 제국에 서한을 보내 오스만의 개입을 요구하였다. 물론 전쟁에서 패배한 오스만은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 전쟁 막바지에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칸 자리에 임명되었다고 주장하는 데블렛 기레이 — 우리가 앞에서 본 토트 남작이 만났던 인물 — 가 쿠반 지역을 무대로 러시아와 싸움을 계속하였다. 그는 쿠축카르자나이 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도 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아조프 해협을 건너 케페를 점령하였다. 그러자 사히브 칸이 이스탄불로 도주하였다. 오스만 제국에 의해 칸이 되었던 이 데블렛도 러시아의 지원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사히브 칸에 의해 체포되었던 러시아 영사를 석방는 등 친러시아적인 제스처를 썼다. 예카테리나 여제도 이 데블렛 칸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데블렛 칸이 공공연히 크림 한국을 오스만의 보호국으로 되돌리려고 하자 러시아는 데블렛 칸을 제거하고 친러시아파인 샤힌 기레이를 새로운 칸으로 정했다. 1777년 초 샤힌 기레이는 노가이 부족의 군대를 앞세워 케르치 해협을 건너 케페와 박티사라이를 점령하였다.
권력을 쥔 샤힌 기레이 칸은 즉각 크림 한국의 개혁작업에 나섰다. 그는 무엇보다 칸이 유력자들로 이루어진 쿠릴타이 회의에서 선출되는 제도가 칸의 권력을 약화시킨다고 보고 칸이 아들 가운데서 후계자를 지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칸 세습제를 도입하려 한 것이다. 그는 또 ‘베일릭’ 즉 베이(bey, 부족장)의 영지를 폐지하려고 하였다. 베일릭은 칸이 징세권과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는 준독립적인 영지였다. 그 보유자들인 베이는 자신들이 본질적으로는 기레이 가문에서 독점하고 있는 칸과 대등한 존재라고 자부하였다. 이러한 베이들이 모여서 칸을 선출하지 않았던가. 샤힌 칸은 베일릭을 관직에 대한 대가로 제공하는 ‘카딜릭’으로 대체하려 한 것이다. 또 칸의 권력강화를 위해 근대적 군대인 상비군의 도입도 시도되었다. 이전까지 크림 한국에는 상비군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유목민 국가의 전통에 따라 칸이 비상시에 소집하면 타타르 장정들이 모여 군대를 이루었던 것인데 이러한 전통적 군대를 진영에서 생활하는 상비군으로 대체하려 한 것이다. 그는 이 새로운 군대의 훈련을 위해 러시아에 고문관과 교관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는 또 러시아처럼 포병과 해병도 보유하고 싶어 하였다. 군복도 서양식 군복으로 바꾸려고 하였다. 이러한 군제개혁을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였는데 예전과 같이 크림 칸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돈을 받거나 또 러시아 주민들을 대상으로 노예사냥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칸에게는 돈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새로운 조세제도를 도입해야 하였는데 이는 새로운 행정관료들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샤힌 칸은 중세의 봉건제 국가를 근대 서구의 전제군주제 국가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상트페테르스부르크에 수개월간 체류한 적이 있었던 샤힌 칸은 강력한 전제군주에 어울리는 새로운 궁정도 갖고 싶었다. 그래서 러시아 왕궁을 모방한 건물을 짓기 위해 예카테리나 여제에게 서구식 건축에 능한 석공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러한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귀족계급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그는 지지세력을 반대세력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실책을 범했다. 바로 기독교도들과 유대인 등 이교도들을 무슬림과 법적으로 평등하게 대우하려고 한 것이다. 법적 평등은 근대국가라면 당연한 것이지만 크림 한국의 타타르 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태세가 아직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는 샤힌 칸의 새로운 정책은 이제까지 당연시되어 온 회교법과 회교도들의 우월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사태를 한층 더 어렵게 만든 것은 러시아가 크림 반도의 예전 오스만 영토였던 곳에 식민지를 세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새로이 정착한 사람들은 그리스인이나 슬라브인들로서 기독교도들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타타르인들은 극력 반발하였다. 1777년 타타르인들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크림 반도의 남부 산악지대에는 전에 자리에서 쫓겨났던 셀림 칸이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 쿠반 지역에서는 ‘베이 만수르’라는 이름의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 타타르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반러시아 투쟁을 이끌었다. 칸의 군대 내에서도 이탈자들이 속출하였는데 박티사라이의 궁전까지도 공격을 받았다. 샤힌 기레이 칸은 반란세력을 진압할 수 없었다. 1783년 러시아 군이 투입되어서야 반란은 진압될 수 있었다. 반란은 합병을 기다려온 러시아에게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곧 크림 한국에 대한 합병을 선언하였다. 1783년 여름에 공포된 합병선언문에서 여제는 오스만 정부가 끊임없이 크림 사태에 개입하여 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이에 호응한 타타르 인들이 그 독립의 소중함을 모르고 경거망동하여 적법한 통치자에게 반기를 든 것을 꾸짖고 러시아가 입은 많은 인명과 금전상의 손실을 지금이라고 막기 위해서는 합병이 불가피하다고 선언하였다. 샤힌 기레이 칸은 퇴위하고 크림 한국에 대한 그의 통치권은 러시아 황제에게로 이전된다고 선언되었다. 선언서를 들고 크림 반도로 돌아온 포템킨은 7월 29일 주요 도시의 성직자들과 귀족들(미르자)을 소집하여 러시아 황제에게 충성선서를 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저항하는 자들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포템킨은 저항하는 자들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을 가해 남녀노소를 포함하여 3만 명 이상의 타타르 인들이 처형되었다. 1783년의 합병선언으로 크림 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유럽 땅에 남아 있던 칭기즈칸 후손들의 마지막 국가였다.
3년 후인 1787년 예카테리나 여제는 이 새로운 남부 영토의 합병을 대내외에 자랑하기 위한 거창한 행차를 하였다. 궁정의 신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대사들이 남방 행차에 수행하였다. 1월에 상트페테르스부르크를 출발하여 오늘날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마차로 간 후 키예프에서 봄을 기다려 드네프르 강을 선박으로 내려가는 행로였다. 키예프에서는 포템킨 공이 여제를 영접하였다. 5월 초 키예프를 출발한 50 여척의 갤리 선단은 그야말로 해상궁전이나 마찬가지였다. 강변 곳곳에는 예쁜 마을들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여제에게 새로운 영토를 자랑하고 싶었던 포템킨이 꾸민 일종의 무대장치였다. 심지어는 마을의 농민과 가축까지도 다른 곳에서 데려왔다. 진짜 마을이 아닌 보여주기 위한 가짜 마을을 일컫는 ‘포템킨 마을’이라는 말은 이로부터 생긴 것이다. 또 여제가 내리는 부두에는 다른 곳에서 급히 들여온 상품들을 잔뜩 쌓아놓았다.
크림 행차에서 러시아의 힘이 여실히 과시되었다. 여제가 되기 전에 그녀의 연인이었던 포니아토프스키 즉 폴란드의 스타니슬라브 아우구스투스 왕도 여제를 보기 위해 달려왔다. 오스트리아 황제 요셉 2세도 남쪽으로 내려가던 여왕을 만나 케르손까지 여정에 동참하였다. 요셉 2세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도시 ‘예카테리노슬라브’로 가서 여제와 함께 도시의 초석을 놓았다. 당시 여제의 행차를 보기 위해 유럽 각처에서 많은 인사들이 쇄도하여 건설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군항이자 상업도시였던 케르손은 인파로 붐볐다. 포템킨은 여제가 통과하는 케르손 시의 관문에다 ‘비잔티움으로 가는 길’이라 새겨놓았다. 크림 한국의 정복을 넘어 오스만 제국까지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실제로 예카테리나 스스로 천명하였던 자신의 세 가지 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스탄불에서 대관식을 갖는 것이었다. 다른 두 가지 꿈은 폴란드 분할과 크림 정복이었는데 이 둘은 실현되었지만 오스만 제국 정복의 꿈은 영영 이루어지지 못했다.
여제 일행은 크림 한국의 수도였던 박티사라이로 가서 그곳의 예전 칸의 궁궐에 여장을 풀었다. 인근의 세바스토폴 만에서는 러시아 흑해 함대를 사열하였다. 함대는 25척의 전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예카테리나의 남행이 갖는 위협을 의식해서였는지 네 척의 전함을 드네프르 강 입구에 파견하였다. 여제도 타타르 인들의 불만이 위험한 행동으로 표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크림 반도에서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여제가 상트페테르스부르크로 돌아간 후 얼마 되지 않아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두 제국이 손을 잡고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려고 한다고 보고서 선수를 친 것이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에 대하여 크림 반도로부터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물론 러시아가 응할 리 없다. 당시 러시아의 대외정책을 주도하던 포템킴은 전쟁을 은밀히 바라고 있었다. 개전하자마자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에 연패하였다. 특히 다뉴브 하구에 위치한 요충지인 이스마일 요새가 함락되어 요새를 수비하던 투르크 병사들과 타타르 인들이 참혹하게 학살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강화조약에서 러시아와의 국경을 부크 강에서부터 서쪽의 드네스트르 강까지 옮겨야만 하였다. 그 땅에는 드네프르 강과 부크 강 두 강의 하구를 지키는 오차코프 요새도 있었다. 오스만 제국이 이렇게 러시아에 패하자 이제까지 러시아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유지하던 영국은 입장을 돌변하여 러시아의 세력 확대를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은 러시아에게 차지한 땅을 오스만 제국에게 돌려줄 것을 설득하였으나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는 화를 내며 단칼에 그 요구를 거부하였다.
1768-1774년의 러터 전쟁 이후 러시아의 크림 정책을 주도한 인물은 앞에서 언급한 그리고리 포템킨(1739-1791) 공이다. 러시아에서는 영웅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포템킨은 남성편력으로 유명한 예카테리나 여제의 남편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다. 물론 정식 결혼은 한 것은 아니다. 폴란드와의 국경 근처 스몰렌스크의 하급귀족 출신인 포템킨은 16세에 근위기병대에 들어갔다. 기병대 장교로 러터 전쟁에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운 그는 여제의 눈에 띠었다. 전쟁 말기부터 여제와 애정을 나누는 관계로 발전하였는데 여제는 그를 행정장교로 임명하여 궁정으로 불러들였다. 이후 포템킨은 승진을 거듭하여 러시아군 참모총장과 코사크 군 총사령관, ‘흑해, 아조프해, 카스피 해 함대 대제독’ 등 높은 직위에 올랐다. 여제는 포템킨을 무척이나 아꼈다. 여제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긴 후에도 둘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는 깨지지 않고 유지되었다. (여제 뿐 아니라 포템킨도 여러 젊은 여자들과 애정행각을 벌였다)
전쟁이 끝난 후 포템킨은 옛 크림 한국의 영토를 관할하는 총독이 되었다. 이 새로운 영토를 러시아인들은 옛 그리스 지명을 따서 ‘타우리스’라고 불렀다. 크림이라는 타타르식 이름을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던 것이다. 포템킨은 이 새로운 영토에 여러 도시들을 세웠다. 신도시들은 건설인력과 주민을 필요로 하였다. 건설과 동시에 다른 지역으로부터 정착민들을 이주시키는 식민사업이 함께 진행되었다. 포템킨이 세운 도시들은 모두 현재 러시아의 중요 도시로 발전하였다. 그 도시들은 대부분 흑해로의 진출을 위한 군항이거나 남부의 방어를 위한 군사도시였다. 그가 처음 건설에 착수한 도시는 케르손이다. 케르손은 드네프르 강 하구에 가까운 곳에 건설한 흑해 함대의 기지로 세웠다. 연이어 크림 반도 서남단의 세바스토폴이 건설되었다. 세바스토폴은 케르손을 이어 흑해 함대의 기지가 된다. 크림 한국의 수도 근처에는 심페로폴이라는 신도시가 세워졌고 그 외에 아조프 해의 출입을 감시하기 위한 예니칼레, 케르치 등에도 여러 요새도시들이 만들어졌다. 물론 군사도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예술에도 일가견이 있던 포템킨은 1784년에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영광을 기린다는 의미로 ‘예카테리노슬라브’라는 도시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 도시는 대학과 음악학교, 미술학교 등을 갖춘 일종의 문화도시였다. (현재는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라 불린다) 또 케르손의 조선소를 이전한 부크 강 연안의 니콜라예프, 오스만의 예전 요새에 세운 오데사 등도 역시 포템킨의 머리에서 나온 도시들이다.
포템킨은 표트르 대제 이후 러시아 제국의 숙원이었던 흑해로의 진출을 달성한 후 흑해 함대를 조직하였다. 함대를 위한 전함건설에 엄청난 자금이 투입되었다. 당시 전함들은 보통 60 여문의 함포를 갖추었으니 크기도 상당하였다. 1783년 진수된 ‘예카테리나의 영광’ (슬라바 예카테리니) 호의 경우 4년간의 공사 끝에 완성되었는데 크기가 길이 50m, 폭 13m, 높이 6m 정도에 달했다. 이 배는 흑해함대 여러 전함의 모델이 되었다. 당시 러시아 선원들의 능력과 전함건조 능력이 떨어져 이 배들은 대부분 오래 사용되지 못하고 퇴위하였다고 한다. 좌우간 흑해 함대의 건설은 러시아가 세계열강의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포템킨은 이러한 전함을 이용하여 보스포로스 해협으로 쳐들어가 오스만 투르크를 정복하고 기독교 제국을 부활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른바 ‘그리스 프로젝트’이다. 이 계획을 위해 예카테리나의 손자 콘스탄틴 왕자에게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를 공부시켜 부활한 그리스 제국의 왕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의 이름을 빌려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을 차지하려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실현되지 못했다. 러시아와 함께 계획을 세웠던 오스트리아의 요셉 2세 황제는 1790년 1월 병사하였다. 그 동생인 레오폴드 2세는 오스만 제국을 해체시키는 것이 오스트리아 제국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인물인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빼앗은 영토로 모두 돌려줄 정도였다. 포템킨 역시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791년 10월 몰다비아의 수도 야시 근처 초원에서 병사함으로써 그리스 프로젝트는 그 주인공을 잃어버렸다. 아마 그가 살아서 그 계획을 추진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영국과 프랑스 같은 유럽의 강대국들이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고 그 자리를 러시아가 차지하는 것을 그냥 지켜보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세기 중반의 크림 전쟁(1853-1856)이 그것을 입증해주었다.
참고문헌
Thomas Milner, The Crimea : It’s Ancient and Modern History (18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