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이야기 60회
타타르 인
러시아는 크림 한국을 병합한 후 타타르 인들을 러시아에 통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무엇보다도 타타르 귀족(미르자)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원칙적으로 러시아 귀족(러시아어로 ‘드보리안스트보’라고 한다)과 대등한 존재로 만들려고 하였다.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대제 이후 귀족은 군대나 관직에 복무할 의무가 있었다. 물론 차르는 이러한 복무를 하는 귀족에게 ‘직전(職田)’을 하사하였다. 직전이라고 하면 어려운 말로 들리지만 관직에 대한 대가로 지급하는 토지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관직복무가 끝나면 당국에 다시 반환해야 하는 토지였다. 이러한 토지를 러시아에서는 ‘포메스티’, 그 토지를 받아 보유하는 사람을 ‘포메쉬치크’라고 하였다. 합병 이후 러시아의 관직에 종사하는 타타르 인들이 나왔는데 이들은 비록 전통적인 미르자 가문 소속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러시아 귀족에 속하게 되며 러시아 귀족이 누리는 것과 동등한 특권을 누리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도 모메스티가 주어졌다.
크림의 농민들은 농노제에 예속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던 땅이 포메스티로 어떠한 귀족에게 주어지더라도 그 토지보유자에게 일정한 액수의 지대만 납부하면 그것으로 의무는 끝이었다. 지주에 대해 바쳐야 하는 부담에 제한이 없고 토지와 함께 매매되던 농노와는 달리 자유로운 존재였던 것이다. 예카테리나 여제 때 러시아에 농노제(serfdom)가 완성되었지만 크림 한국의 농민들은 이러한 농노로 전락하지 않았다. 즉 포메스티를 국가로부터 받은 지주인 포메쉬치크는 그 땅에 살고 있는 농민을 자의적으로 쫓아내거나 또 자신이 마음대로 공납을 강요할 수 없었다. 물론 포메쉬치크가 농민에게 불법적으로 압력을 행사하여 내륙으로 이주하게 만들고 자신의 땅에 농노를 받아들이는 일도 없지 않았다. 또 러시아 당국의 식민정책으로 크림반도로 이주해온 슬라브 족 농민과의 갈등도 없지 않았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크림 반도를 떠나 아예 오스만 제국으로 이주한 타타르 농민들도 있었다.
19세기 중반 크림 반도를 답사한 영국 목사가 남긴 책이 있다. 토마스 밀너(Thomas Milner)라는 목사인데 이 사람은 목사로서보다는 작가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다. 천문학과 지구과학은 말할 것도 없고 역사와 지리, 신학에도 깊은 지식이 있어 다양한 분야의 저서를 남겼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당시에는 사르데냐 왕국), 러시아, 오스만 투르크 등 유럽의 강국들이 싸운 크림 전쟁 때문에 크림 반도는 일반인들의 큰 관심을 끌었는데 밀너 목사도 크림 반도의 역사와 지리에 관한 책을 썼다. 《크림 반도: 그 옛 역사와 근대사》 (The Crimea, Its Ancient and Modern History)에는 그가 목도한 타타르 인들에 대한 묘사가 있다.
그는 크림 반도의 주민들을 세 부류로 나눈다. 첫째는 스텝 지역에 정착하여 사는 농민들이다. 이들은 가난한데 그 원인은 관헌들의 가렴주구라고 저자는 보았다. 타타르 농민들을 보호하려는 러시아 당국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현지의 하급관료들이 농민들을 불법적으로 수탈하였던 것이다. 타타르 인들은 종교와 언어상의 차이로 인해 이러한 불법행위를 사법당국에 고발하기도 힘들어 그냥 참고 사는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스텝 지역의 타타르 인들은 가족생계 이상의 농사를 짓지 않는다고 하였다. 두 번째 부류는 구릉지대 주민들이다. 크림 반도 남부에 걸쳐 있는 구릉지대의 주민들은 이탈리아어가 섞인 말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이탈리아인들과의 혼혈이 상당히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크림 타타르 인들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 지역 타타르 인들의 피 속에는 옛 고트족, 알란족,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아르메니아인의 피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들의 외양은 서양인들과 상당히 닮아 있다. 필자는 몇 년 전 크림 반도 합병 사태가 벌어지자 이에 반대하는 타타르 인들의 시위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 모습이 대부분 동양인들보다는 서구적인 모습이라 의외라는 느낌이 들었었다. 구릉지대에 촌락을 형성하고 농업에 종사한 이들 타타르 인들은 포도, 아마, 담배 등 상업적인 작물을 재배하였는데 이곳에서 생산되던 포도는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맛이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무슬림인 이들 타타르 농민들은 자신들은 포도주를 마시지는 않지만 그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인근 지역으로 수출하였다. 밀너 목사에 의하면 구릉지대 주민들 가운데에는 귀족인 미르자의 후손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일반적으로 대토지 소유자였다. 세 번째 부류는 노가이 인들이다. 노가이 인들은 외모가 가장 동양적이고 그 수도 적었다. 이들은 수개월을 한 곳에 머무는 적이 없는 그야말로 순수한 유목민이었다. 이들은 “신은 우리에게 수레를 주었고 다른 민족에게는 고정된 주거와 쟁기를 주었다.”고 하면서 정착생활보다는 유목생활을 사랑하고 또 유목생활이 정착농업보다 우월한 생활방식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이들 노가이 족들 가운데에도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농업에 종사하는 인물들이 나왔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크림 반도의 동부에 위치한 케르치 반도에 많았다.
밀너 목사는 벽지에 사는 타타르 인일수록 더 순수하고 정직하며 또 관대하였다고 덧붙이고 있다. 러시아 하층민들의 나쁜 영향을 덜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타타르 인 마을은 매우 깔끔하였다고 말한다. 집도 거리도 깨끗하고 거리에도 헐벗고 더러운 모습으로 뛰어노는 아이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 타타르인의 수는 급속히 줄어들고 있었다. 이는 이들이 근본적으로 피정복민으로서 “땅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중요성도 모두 박탈되었기 때문”이라 밀너 목사는 지적하였다. (Thomas Milner, p.376)
타타르 인들은 러시아에 합병된 이후 적지 않은 수가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망명자들의 공동체(디아스포라)를 형성하였다. 타타르 인들이 계속해서 크림 반도로부터 빠져나가는 대신 러시아 당국은 외부의 사람들을 크림 반도로 불러들여 정착하게 만들었다. 땅은 많지만 인구가 부족한 크림 반도에 대한 식민정책이었다. 크림 반도에 들어온 새로운 정착민 가운데에는 러시아 인 뿐 아니라 그리스 인, 아르메니아 인, 독일인, 불가리아 인 심지어는 스위스 인들도 있었다고 한다. 크림 전쟁기인 1854년에 25만 명의 전체 주민 가운데 타타르 인 15만 명에 비해 러시아인과 다른 외국계 주민들의 수가 도합 10만에 달하게 되었다. (A. Fisher, p.94) 이러한 정책을 통해 크림 반도는 시간이 갈수록 타타르 민족의 땅이라는 성격이 약화되었다. 2018년 통계로는 크림 반도의 주민 수는 220만 명에 달하는데 러시아계가 2/3를 차지하고 타타르 인은 10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완전히 타타르 인들이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데에는 스탈린 시대 소련당국의 정책이 결정타를 날렸다.
1941년 나치 독일군이 그 동맹국인 루마니아 군과 함께 크림 반도를 점령하였다. 나치의 점령은 1944년 5월 소련군에 의해 격퇴될 때까지 지속하였다. 나치 치하에서 일부 타타르 인들이 나치에 협력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는 소수에 불과하였다. 오히려 대다수 타타르 인들은 소련 측에 가담하여 싸웠다. 타타르계의 한 신문에 따르면 크림 반도의 전체 주민 30만 명 가운데 18세 이상의 주민이 95,000 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53,000 명이 소련군으로 전쟁에 참여하였고 12,000 명은 나치점령군에 저항하는 조직에 가담하여 싸웠고 전사자는 3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A. Fisher, p.163) 소련군이 크림 반도를 수복하자 나치협력자로 고발된 타타르 인들에 대한 즉결 처분이 이루어졌다. 심페로폴 거리에는 나무와 전선주에 시체들이 널렸으며 소련군 병사들이 무고한 타타르 인들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타타르 인들은 나치에 협력한 배반자라는 생각이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또 90여 년 전에 벌어진 크림 전쟁기에 타타르 인들이 러시아의 적국이던 영국과 프랑스에 동조하였다는 사실도 새삼 상기되었다. 종교, 문화적 차이도 타타르 인들에 대한 증오심을 부채질하였다.
크림 수복 후 2주간의 끔찍한 테러가 자행된 후 소련 당국은 타타르 인들을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1944년 5월 18일 모든 타타르 인들을 느닷없이 소집하여 가축수송용 열차에 태웠다. 그 가운데에는 공산당원도 있었고 빨치산 활동을 한 사람도 있었다. 남녀노소, 성분을 불문하고 크림 타타르 인이라면 모두 강제추방의 대상이었다.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을 향해 3, 4주간이나 소요되는 여행이었다. 굶주림과 갈증, 더위 속에서 노인과 아이들, 신체가 약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식수와 음식 배급을 위해 열차가 역에 잠시 정차하면 시체는 그곳에 그냥 두고 출발하였다. 시체를 묻는 여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무려 23만 명에 달하는 인원이었는데 당시 크림 전체 인구의 1/5에 달했다.
추방에 이어 1921년부터 크림 반도가 누리던 자치공화국의 지위가 박탈되었다. 이제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한 주로 그 지위가 낮아졌다. 일년 뒤인 1946년 6월 28일에 관영지인 《이스베챠》 지에 타타르 주민들의 강제추방과 자치공화국 폐지의 사실이 공식적으로 공개되었다. 쫓겨난 타타르 인들은 주로 우즈베키스탄으로 갔는데 그들에게는 자유로운 이주가 허용되지 않았다. 후르시초프 하에서 이러한 제약은 풀렸지만 크림으로 돌아갈 권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추방 시에 빼앗긴 재산을 되찾을 수도 없었다. 중앙아시아의 크림 타타르 인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은 소련이 붕괴하기 직전인 1989년이 되어서였다. 20만 명이 넘는 타타르 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소련 당국은 이들의 재산환수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미 러시아 인들이 그 땅을 차지하고 있어 땅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타타르 인들은 19세기에 나름대로의 민족운동을 통해 그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그 정체성의 근간에는 크림 반도가 조상들이 살아오고 일구어온 자신들의 조국이라는 인식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인들은 크림 반도는 원래 러시아 땅이었으며 예카테리나 여제에 의한 1783년의 합병은 점령이 아니라 타타르에게 잃어버렸던 땅을 통일한 것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1954년 후르시초프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합병된 300주년을 기념하여 선심 쓰듯 이 보석 같은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넘겨주었다. 당시 소련이라는 하나의 큰 테두리 안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형제 같이 함께 산다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지 조처였다. 러시아의 흑해함대가 크림 반도에 주둔할 수 있도록 양해가 이루어진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1991년 갑자기 여러 공화국들로 이루어진 소비에트 연방 즉 소련이 붕괴하였다. 2004년 우크라이나에서 소위 ‘오렌지혁명’이 일어나 반러시아, 친서방 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이 친서방 정권은 유럽연합과 나토에도 가입하기를 원했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의 흑해 함대가 크림 반도에 주둔하는 것은 어려워질 것이 명백해졌다. 2014년 드디어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크림 반도의 지역민병대를 내세워 크림 자치공화국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주민투표를 통해 러시아에 합병되는 수순을 밟도록 하였다. 크림 반도는 다시 러시아의 수중으로 되돌아갔다. 물론 타타르 인들은 대부분 러시아와의 병합에 반대하였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말할 것도 없고 국제사회는 러시아에 의한 크림 반도의 강제합병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유럽연합과 미국 등 서방진영은 러시아의 크림 합병을 무효라고 선언하고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다. 크림 반도 내에서는 타타르 인들이 잃어버린 땅과 집을 되찾기 위한 운동을 벌이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힘든 유배생활을 하였던 타타르 인들에게 크림 반도는 조상들이 묻혀 있고 자랑스러운 크림 한국의 역사가 아로새겨진 소중한 땅이 아니던가? 그러나 크림 반도가 타타르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타타르 인들이 러시아 인들에 비해 수가 적다는 것도 문제지만 대다수 러시아 인들이 갖고 있는 타타르 인에 대한 적개심이다. 러시아 인들은 크림 반도가 원래 러시아 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이고 타타르 인들이 러시아 영토를 빼앗고 러시아 인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한 약탈행각을 자행하였던 야만적 유목민의 후예라고 믿기 때문이다. 문화와 종교, 역사적 정체성을 달리하는 양자 간의 공존과 상생의 길을 찾는 일은 참으로 어려워 보인다. 포템킨이 지상낙원이라고 한 이 크림 반도가 어쩌면 카프카즈 지역의 체첸과 같이 피로 얼룩진 땅이 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끝〉
참고문헌
Thomas Milner, The Crimea, Its Ancient and Modern History (1855)
Alan Fisher, The Crimean Tatars (Hoover Institution Press, 1978)
Bryan Glyn Williams, The Crimean Tatars : The Diaspora Experience and the Forging of a Nation (Brill,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