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영감을 준 아름다운 불시(佛詩) 한 편
지난 3월 중순, 프랑스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기 시작했다. 신규 확진자 수가 14일에는 4,500명(3일 만에 두 배 증가), 15일에는 5,423명, 16일에는 6,633명을 기록했다. 이렇게 코로나 감염이 기하급수적 확산의 양상을 보이자, 마크롱 대통령은 16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전쟁 상황임을 선포하고 17일 자로 전 국민 이동제한령을 발효시켰다. 생필품 구매 등 필수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여행과 이동을 전면 금지하는 강력한 조치였다. 강요된 칩거는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자유를 중시하기로 유명한 프랑스인들에게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프랑스의 헌법에 명시된 3대 국훈(자유, 평등, 형제애) 중 첫 번째가 바로 ‘자유(liberté)’ 아니던가.
외출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집 안에 갇혀 지내게 된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인터넷, 페이스북, 유튜브 등의 사이버 공간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소통의 장이 되었다. 힘든 시간을 따로 또 함께 버텨내기 위해, 그곳에서 누군가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눈길을 끌었고, 또 누군가는 웃기면서도 슬픈 일명 ‘코로나 유머’로 폭소를 선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잠시나마 코로나를 잊어 보자’며 너도 나도 쏟아내는 동영상과 유머들 사이에서, 오히려 ‘집에 머물며 코로나 팬데믹에 대해 명상해 보자’, ‘이 사태를 계기로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 보자’라는 메시지로 깊은 울림과 감동을 자아낸 한 편의 글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그 미미한 것에 의해 요동치는 인류, 그리고 무너지는 사회”라는 제목의 이 글은 본래 Africk.com이라는 프랑스의 인터넷 일간지에 3월 24일 게재된 산문시 형식의 칼럼이었다. 이 글을 접한 누리꾼들은 ‘진실이 담긴 아름다운 시’라는 찬사와 함께 페이스북과 유튜브를 통해 이곳저곳으로 퍼 나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영어 등의 외국어로도 번역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서 국경을 초월한 공감을 이끌어 냈다.
사실, 무스타파 달렙Moustapha Dahleb이라는 필명으로 이 글을 기고한 사람은 20여 년째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차드 출신의 작가이다(본명은 Hassan Mahamat Idriss). 작가라고 해서 프랑스에서 저명한 문인이라거나 유명인사도 아니다. 경영학 박사(2010년, 프랑스), 프랑스·차드 상공회의소 소장(2012년~현재)이라는 그의 약력을 보더라도, 오히려 ‘글 잘 쓰는 지식인’, 아니 어쩌면 ‘글 솜씨가 뛰어난 누리꾼’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이처럼 특별한 유명인도 아닌 그의 시 한 편이 많은 프랑스인들의 관심을 끈 이유는 무엇보다 코로나 팬데믹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있었다. 공포와 절망을 부추기거나 소모적 언어유희로 사태를 희화화하는 일부 누리꾼들과 달리, 그는 누구나 가슴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진실들을 짚어 내며 각성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던 것이다.
한편,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차드라는 나라는 아프리카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한 불어권 국가이다(수도는 은자메나).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던 1960년, 차드 정부는 불어를 국가의 공식어로 선택했다. 유럽의 침략자들이 차드에 남긴 식민주의의 유산은 비단 그들의 언어뿐이 아니다. 차드의 국경 자체도 19세기 말 경쟁적으로 아프리카 정복에 나섰던 프랑스, 독일, 영국 간 협정의 산물이다.
세계 지도에서 차드를 찾아보면 국경의 상당 부분이 길고 곧은 직선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도 위에 자를 대고 그린 듯한 이런 형태의 국경선은 아프리카 국가들에 흔히 나타난다. 아프리카 정복 시대에 서로 땅을 차지하려 다투던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 지도를 펼쳐 놓고 임의로 땅을 나누어 가졌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종족간의 갈등과 유혈분쟁은 외부 침략자들에 의한 이 ‘지도상의 땅 나누기’에서 비롯되었다.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이 각기 다른 부족공동체들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국경선 확정으로, 혈연, 언어, 종교 등이 다른 여러 부족이 하나의 국가공동체로 묶이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동일 부족의 거주지가 여러 국가에 걸쳐 있어 부족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국가의 구성원으로 해체되고 그 국가 내에서 소수집단으로 전락하는 결과도 빚어졌다.
유럽 열강에 의한 아프리카 정복은 유럽인들에게는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위대한 사건이었지만, 정복당한 원주민들에게는 이처럼 현재까지도 진행형인 고통과 비극의 역사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아래에 소개하는 달렙의 시(필자 번역)에는 차드 출신 작가의 글답게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느껴진다.
그 미미한 것에 의해 요동치는 인류, 그리고 무너지는 사회
무스타파 달렙
코로나 바이러스라 불리는 극도로 작은 미생물이
지구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나타나서
제멋대로 세상을 지배한다.
그것은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기존의 질서를 뒤엎어 버린다.
모든 것이 다르게, 새롭게 제 자리를 찾는다.
서양의 강대국들이
시리아, 리비아, 예멘 등지에서 할 수 없었던 것을
이 미미한 것은 해냈다. (휴전, 정전…)
알제리 군대가 할 수 없었던 것을
이 미미한 것은 해냈다. (‘히라크’ 시위가 끝났다.)
[역자 주: ‘히라크Hirak’는 2019년 2월 22일부터 알제리에서 진행되어온 전례 없는 대대적 시민봉기이다. 아랍어로는 ‘하라크’로 발음하며 ‘운동’이라는 의미이다.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반정부 시위인 히라크는 1년 만에 코로나19로 인해 멈춘 상태이다.]
반집권세력도 할 수 없었던 것을
이 미미한 것은 해냈다. (선거의 연기…)
기업들이 할 수 없었던 것을
이 미미한 것은 해냈다. (감세, 면세, 무이자 신용대출, 투자자금 지원, 전략자원의 시세 인하 등을 얻어 냈다.)
프랑스에서
노란 조끼 시위대와 노조들이 할 수 없었던 것을
이 미미한 것은 해냈다. (유류세 인하, 사회보장 강화…)
갑자기,
서구 세계에서는
연료비가 내리고 대기 오염이 감소했다.
사람들은 시간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고,
시간이 너무 많아지자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몰랐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에 대해 알아가게 되었고,
아이들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일은 삶에서 우선순위일 수 없고,
여행이나 여가 활동이 성공한 인생의 척도가 될 수 없다.
갑자기,
우리는 조용히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고
‘나약함’과 ‘연대’라는 단어의 가치를 이해하게 되었다.
갑자기,
우리는 부자이든 가난하든
모두 한 배에 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전처럼 상점의 물건들을 마음껏 살 수도 없고,
병원은 만원으로 넘쳐나서,
돈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서
우리는 모두 그저 똑같은 인간일 뿐임을 깨달았다.
아무도 밖에 나갈 수 없으니
고급 승용차들도 차고 안에 꼼짝없이 멈춰 있음을
우리는 깨달았다.
상상이 불가능했던 사회적 평등이 세상에 구현되는 데
단 며칠이면 충분했다.
공포는 모두를 덮쳤다.
공포는 이제는 방향을 바꿔
힘없고 가난한 자들에게서
돈 많고 권력 있는 자들에게로 옮겨갔다.
공포는 이들에게 자신이 인류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고
이들 안에 내재해 있던 인도주의를 일깨워 주었다.
지금 이 상황은,
화성에 가서 살 방법을 찾고,
영생을 위해 복제인간을 만들어내면서
스스로를 강력한 존재로 착각했던
우리 인간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은,
하늘의 힘에 맞서려는 인간 지식의 한계를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단 며칠 만에,
확신은 불확실성으로,
강한 존재는 나약한 존재로,
권력은 연대와 협조로 바뀌었다.
단 며칠 만에,
아프리카는 안전한 대륙으로 바뀌었고,
꿈은 환상으로 바뀌었다.
단 며칠 만에,
인간이 다만 한 점의 바람, 한 점의 먼지일 뿐임을
인류는 실감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얼마나 가치로운 존재인가 ?
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맞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늘의 뜻을 기다리며
명백한 현실을 직시하자.
코로나 바이러스에 맞서야 하는 이 ‘세계적 시련’ 속에서
우리의 ‘인류적 정체성’에 대해 질문해 보자.
집 안에 머무르며 이 병란에 대해 명상해 보자.
살아 숨 쉬는 동안에 우리 서로를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