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위서론 비판 3
『세조실록』의 『삼성기』 기사 검토
1. 『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환단고기』 위서론을 주장하는 강단사학의 일부가 제시하는 근거 중의 하나는 『조선왕조실록』 의 한 기사다. 사실(facts)은 역사의 출발이다. 진실은 항상 사실이라는 주춧돌 위에 세워지는 집과 같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과 다름이 없어야 하며, 사실만을 서술해야 한다는 역사의식, 이 역사의식은 바로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1795∼1886)로부터 비롯되었다(조지형,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랑케 & 카』). 굳이 랑케 역사학의 배경이 된 실증주의에 유의할 때, 우리나라의 옛 역사문헌 자료 가운데 그 중 머리 부분을 차지하는 문헌사료 중의 하나는 『조선왕조실록』일 터다. 이 『조선왕조실록』 중 세조 3년(1457) 5월 26일자(이하 『세조실록』으로 줄임) 기사에 『삼성기』라는 책명과 함께 저자 혹은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이 주장하는 책명 중의 인명이 밝혀져 있다. 전문을 인용한다.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로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 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밑줄–인용자)
기사는 조선 제7대 왕 세조(재위 1455~1468)가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 19종의 책을 개인이 간직해서는 안 되므로 거두어들이라는 내용이다. 일종의 금서령禁書令 혹은 수서령收書令에 대한 내용이다. 기사에 나오는 제목을 일별하면 주로 사서와 도참서에 대한 수서령임을 확인할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으로 줄임) 조선왕조실록에 공개되어 있는 이 기사에서 본고의 주제와 관련하여 눈길을 끄는 것은 『삼성기』와 그 저자에 관하여 “《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라고 표기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의 지적과 관련된 부분을 잠시 보류하고, 국편의 번역 실태부터 먼저 검토한다. “【태백산사고본】 3책 7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7책 200면”을 인용한 것으로 출처를 밝히고 있는 위 번역문은 물론 ‘원문’까지도 몇 가지 문제점이 발견된다. 우선 원문이라고 밝히는 부분부터 문제적이다. 여기서 원문은 ‘원본’이라고 해서 이미지 형태로 제공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편에서 제공하는 ‘원문’은 편집자에 의해 일부 가공된 것으로 엄밀한 의미에서원문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은 곧 밝혀질 것이다.
본고의 주제와 관련하여 『세조실록』의 원문은 “安含老元董仲三聖記” 부분이다. 물론 국편에서 원본으로 제공하는 이 원문 역시 동일하다. 1911년 계연수가 『환단고기』 「범례」에서 밝힌 그대로 ‘안함로·원동중, 『삼성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문헌자료다. 그런데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은 바로 이 부분에서부터 문제를 제기하였다. 앞장 인용문 1에서 “『안함·노원·동중 삼성기』 즉, 안함과 노원과 동중이라는 세 성인의 기록이라는 책 이름을 잘못 끊어 읽어서 만들어진 이름”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즉, “安含老元董仲三聖記”에서 인명 부분이 2인이 아니라 3인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동조하는 입장도 있다.
위의 국편에서 제공하는 ‘원문’은 “《安含 老元 董仲三聖記》”라고 편집되어 있다. 그러니까 1차 문헌자료인 원본 이미지가 가정 정확한 자료라고 한다면, 국편에서는 원본을 인위적으로 편집(물론 독자로 하여금 읽기가 편리하도록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하여 ‘원문’이라는 항목에 “《安含 老元 董仲三聖記》”으로 편집해 놓았다. 단순한 것 같지만 이 부분부터 몇 가지 문제점이 발견된다. 먼저 원문 “安含老元董仲三聖記”에 기호(《》) 표기를 한 부분이다. 국편 편집진이 인식하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으나 이런 기호는 책명이라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번째, “安含 老元 董仲三聖記”로 띄어쓰기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동중’과 ‘삼성기’가 붙어있기는(“董仲三聖記”) 하지만, 이 경우 “安含老元董仲”을 3인으로 독해하고 있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번역 역시 이 의도에 따라 이루어졌다. “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가 그것이다. 원 사료가 한문 자료의 경우, 번역하는 과정에서 띄어 쓰고, 표점을 찍기도 하고 때로는 현토를 붙일 수 있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한 수고이므로 굳이 이런 노력을 폄훼할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정확성이다. 한문에 대한 충분한 소양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원본을 건드리게 될 경우, 많은 문제점들이 생기게 된다. 국편의 경우,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원본을 자기 의도에 맞추어 변형한 것을 넘어서 편집상의 표기 오류까지 드러나고 있다. “安含老元董仲三聖記”를 “《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로 표기한 것이 근거다. 이런 번역·표기의 의도는 앞장의 인용문 3에서 조인성의 지적과 같이 “안함·노원·동중 세 성인에 관한 기록(이 경우, 『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라는 책의 저자가 따로 존재한다는(누구인지 밝혀져 있지 않았으나) 점도 유의해야 한다.) 혹은 안함·노원·동중 3인이 지은 ‘삼성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과 일부분 일치한다. 과연 그럴까. 다음 장에서 『세조실록』의 기사 원본 “安含老元董仲三聖記”를 『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 즉, ‘안함·노원·동중’ 3인과 ‘안함로·원동중, 『삼성기』’ 가운데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보다 심도 있는 논의를 전개한다.
2. 안함·노원·동중인가, 안함로·원동중인가
『삼성기』는 안함·노원·동중 세 성인에 관한 기록인가? 아니면 안함·노원·동중 3인이 지은 『삼성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가? 결론적인 얘기지만,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이 제기하는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본고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이유는 많다.
먼저 『세조실록』 관련 기사 가운데 “《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와 같은 국편의 번역·표기는 같은 기사에 있는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과 모순된다. 이 번역· 표기를 그대로 독해한다면 “문태산·왕거인·설업 등이 기록한 『삼인 기록』”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번역의 원문은 다음 내용인 《수찬기소(修撰企所)》까지 포함하여 “文泰山ㆍ王居仁ㆍ薛業等三人記錄、《修撰企所》”로 되어 있고(역시 국편에서 편집하였다), 원본은 “文泰山王居仁薛業等三人記錄修撰企所”로 되어 있다. 같은 내용을 두고 원본, 원문, 번역이 각기 다르다.
문제는 현재 번역되어 있는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이다. 이 기사를 그대로 읽는다면 책명은 『삼인기록』이 되고, 이것을 기록한 이는 ‘문태산·왕거인·설업 등’인데, 이 책의 편자는 별도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경우 ‘문태산·왕거인·설업 등’ 3인은 무엇이고 책명에 나오는 3인은 또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따라서 이 경우는 ‘원문’ 표기인 “文泰山ㆍ王居仁ㆍ薛業等三人記錄、 《修撰企所》”가 정확해 보인다. 다시 표기하면 ‘문태산ㆍ왕거인ㆍ설업 등 삼인 기록、 『수찬기소』’가 된다.
물론 다른 경우도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安含老元董仲三聖記”에 대한 국편 번역(“《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와 같이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으로 번역할 경우, 전체를 책명이 되고 편자가 별도로 있는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三人), 『기록(記錄)』”으로 번역할 경우다. 이 경우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三人)’이 저자가 되고 책명은 『기록(記錄)』으로 번역하는 것인데 책명이 아무래도 어색하다. 역시 ‘원문’에 맞추어 “문태산·왕거인·설업 등 3인 기록, 『수찬기소』” 즉, ‘문태산·왕거인·설업 등 3인이 기록한 『수찬기소』’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세조실록』 관련기사에서 다른 부분에서도 문제점이 발견된다. 먼저 “安含老元董仲三聖記”를 《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와 같은 번역·표기상 오류는 ‘원문’ 《表訓三聖密記》、 번역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에서도 지적할 수 있다. 역시 한 권의 책명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표훈, 『삼성밀기』” 즉, ‘표훈이 편찬한 『삼성밀기』’의 오류가 분명하다. 왜냐하면 저자인 표훈은 역사상 실재했던 인물이고, 『삼성밀기』는 현재 전하지 않지만, 그 내용 중 일부가 『환단고기』 즉, 『삼성기』, 『태백일사』 등에 비중 있게 인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환단고기』에는 『밀기密記』, 『표훈천사表訓天詞』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두 책명은 『삼성밀기』을 가리킨다.” 안경전 역주본, 『환단고기』). 『삼성밀기』 저자 표훈이 누구인가? 표훈은 신라 경덕왕 대에 활동한 고승이다. 751년(신라 경덕왕 10) 김대성이 불국사와 석불사石佛寺(석굴암의 전신)를 짓고 표훈ㆍ신림神琳 두 스님을 청하여 주석하도록 하였다. 말하자면 표훈은 불국사의 초대 주지승이었다. 그는 의상義湘대사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인 화엄학자이며, 또한 신라 10성新羅十聖 중 한 사람이다.
불교의 고승으로 화엄학자인 표훈이 우리 상고사―엄밀하게 말하면 우리 고유의 신앙인 신교 관련 책이라고 할 수 있다―를 내용으로 하는 『삼성밀기』와 같은 책을 편찬했다는 점에 쉽사리 수긍하지 않는다면, 『삼국유사』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조의 다음과 같은 표훈 관련 일화를 볼 필요가 있다.
표훈은 불국사에 있으면서 천궁天宮을 왕래하였다. 어느 날 경덕왕이 표훈에게 천국의 상제에게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표훈이 왕의 청을 받고 천상을 올라가 상제에게 청하였다. 그때 상제는, “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표훈이 하계로 내려오려고 할 때 상제가 불러 말했다. “하늘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게 할 수는 없는데 지금 대사께서는 이웃 마을을 왕래하듯이 천기를 누설하고 다니니 금후엔 아예 다니지 말라.”
그 후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으니 왕은 기뻐하였다. 태자가 여덟 살 때 왕이 세상을 떠나니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혜공왕이다. 왕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태후가 임조臨朝하였는데 정사를 잘 다스리지 못하여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 막아낼 수 없었다. 표훈대사의 말이 맞은 것이다. 표훈은 이후에 신라의 성인이 되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삼국유사』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조).
《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와 같은 오류는 《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에서도 발견된다. 이 문장의 ‘국역’ 번역은 《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로 되어 있으나 ‘원문’은 “道詵《漢都讖記》”로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편집상의 실수로 보이지만, 굳이 시비를 가리자면 ‘원문’표기가 정확할 것이다. 번역·표기를 한다면 “도선, 『한도참기』” 즉, ‘도선이 편찬한 『한도참기』’로 번역, 표기되어야 한다. 도선道詵(827~898)이 누구인가? 호는 연기烟起. 자는 옥룡자玉龍子·옥룡玉龍. 성은 김씨. 신라 말기 구산선문 중 하나인 동리산문銅裏山門의 개조 혜철慧徹(785~861) 문하에서 수학한 도선은 옥룡산파의 개창자라고 불릴 만큼 독자적인 세력을 이룬 선사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풍수도참설의 비조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황인규, 「先覺國師 道詵의 宗風 계승 및 전개」). 72세의 나이로 죽자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고려의 숙종은 대선사大禪師를 추증하고 왕사王師를 추가하였으며,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하였다.
문제는 도선의 저서 가운데 『한도참기』의 존재 여부다. 현재 도선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 책은 11편이 있는데, 대부분이 명당기, 비결서, 밀기와 같은 풍수도참과 같은 관계있는 내용이거나 제목들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한도참기』는 보이지 않는다. 현재 도선이 편찬한 책들은 대부분 전하지 않고 있으며, 후대 사람들이 기록한 문헌 가운데 그 책의 이름만 인용되고 있다. 또한 근대로 내려올수록 도선은 풍수의 신승神僧처럼 우상화되어 풍수도참과 관계되어 있는 책이면 그의 이름을 가탁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도선비기』 1권1책, 『도선비결기』 1권1책, 『삼전운기비록三轉運氣祕錄』 3권1책, 『선각국사참서先覺國師撰書』 2권1책, 『도선답산기』 1책, 『도선비기』 1책, 『옥룡집玉龍集』, 『도선명당기』, 『삼각산명당기』, 『옥룡자문답』, 『도선산수기』 등이다(서윤길, 「도선국사의 생애와 사상」).
『한도참기』 역시 그 제목이나 도참서라는 책의 성격으로 보면 도선의 저작 군에 들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세조실록』에 나올 정도이고 보면, 조선 7대조 세조 때까지도 이 책이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살펴본 선각국사 도선의 행적으로 보았을 때, 『세조실록』의 “道詵漢都讖記”를 마치 한 권의 저술인 것처럼 《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로 번역, 표기한 것은 오류가 분명하다.
따라서 『세조실록』에 기록된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가 ‘표훈, 『삼성밀기』’의 오류이며, 《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역시 ‘도선, 『한도참기』’의 오류라는 점이 인정된다면, 《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역시 ‘안함·노원·동중, 『삼성기』’ 혹은 ‘안함로·원동중, 『삼성기』’의 오류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