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출신 마지막 고려비 노국대장공주 천년의 사랑인가 정략적 통혼인가 3
정치인 노국대장공주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노국공주는 즉위가 불투명한 공민왕과 만나 교제하고 사랑에 빠졌으며, 혼인 후에는 우연찮게도 고려 대외정세의 급격한 변동으로 인해 공민왕의 즉위가 승인되면서 고려의 왕비가 되었다. 그러면서 자동적으로 그녀 또한 고려 왕실과 정계의 일원이 되었는데, 이 장에서는 1356년 공민왕의 개혁에 대한 노국공주의 입장을 통해 그녀의 정치적 입장을 헤아려 보고자 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종래의 연구는 1356년 공민왕의 개혁을 이른바 ‘반원개혁’으로 규정해 왔다. ‘원의 세력을 등에 업고’ 준동하던 기철세력을 제거하고, 제국의 만호부 폐지를 건의하며, 제국 정부의 공물 요구를 일축하고, 무엇보다도 쌍성지역을 군사적 방식으로 되찾아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공민왕의 이 개혁이 100여년에 걸친 원 간섭을 종식시켰다는 평가도 제기되었다. 최근에는 그에 대한 이론 및 재반론도 제기되어, 관련논의가 진행 중에 있다.
여러 다양한 견해들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개혁을 통해 고려내 기철세력이 제거되고, 원제국의 기황후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개혁에 대한 노국공주의 입장은, 공민왕의 기씨세력 응징에 대한 그녀의 입장에서 드러나는 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흥미롭게도, 노국공주 일가와 기황후세력 간에는 상당 기간 축적된 반감과 갈등관계가 존재했음이 확인된다. 노국공주의 일가와 관련해서는 앞서 소개한 아모가나 벌드투무르를 제외하고는 기록이 그리 많지 않지만, 노국공주의 선대 인사들 중 ‘만지’라는 인물이 확인된다. <원사元史> 종실세계표(宗室世系表)에 노국공주의 조부(祖父)인 위왕(魏王) 아모가(阿木歌, 아목가)의 ‘아들’들로 (앞서 소개한 4남 벌드투무르[孛羅帖木兒] 외에) 장남 터흐보하(脫不花), 차남 만지(蠻子), 3남 알로(阿魯), 5남 타노타이(唐兀台), 6남 다르마시르(答兒蠻失里), 7남 벌드(孛羅) 등이 기록돼 있어, 이 만지가 아모가의 아들이자 벌드투무르의 형이었음이 확인된다.
이 인물은 1363년 서슬란(搠思監, 삭사감)에 의해 숙청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서슬란(搠思監, 삭사감)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기황후의 측근으로, 기황후의 경제적 기반이기도 했던 자정원에서 활동하며 기황후를 적극 보필하였던 인물이다. 아울러 이 기록은 서슬란의 만지 숙청이 기황후의 아들 황태자(아유시리다르[阿猷識理達臘])의 뜻에서 비롯된 것임을 전하고 있다. 노국공주의 숙부 만지가 기황후·황태자세력과도 갈등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물론 이 숙청은 1360년대 전반에 발생한 것으로, 노국공주 일가와 기황후 세력이 ‘1360년 이전에 지녔던 관계’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만지와 함께 숙청당한 인물들(이하 ‘만지일당 [蠻子一堂]’)의 경력을 살펴보면, 양세력 간의 갈등의 원인과 그 시작 시점 등을 추정해 볼 수 있는 바가 있다.
만지와 함께 숙청당한 인물들, 즉 소위 ‘만지일당’은 노적사(老的沙), 안난달식리(按難達識理), 사가식리(沙加識理), 야선홀도(也先忽都), 탈환(脫懽) 등 5명이다. 이들 중 기록이 비교적 잘 확인되는 인물들은 노적사와 야선홀도 2명이다.
먼저 노적사(老的沙)는 원황제 순제의 외삼촌으로서, 어사대부를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순제의 심복이라 불리는 10명 중의 한 명이었고, 순제가 외삼촌인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비밀령까지 내리는 등 기록상으로 황제와의 관계는 긴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노적사가 1363년 갑자기 황제의 명으로 유배를 가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당시 진조인(陳祖仁)이 상서를 올려 자정원사(資正院使) 환관 박불화(朴不花)와 선정원사(宣政院使) 탁환(槖驩)을 탄핵했으나 황제가 이를 듣지 않았고, 오히려 진조인을 비롯한 노적사 등 어사대부 전원을 유배형에 처했다는 것인데, 이때 황제가 노적사 등을 유배시킨 것은 본인의 뜻보다는 황태자·기황후의 뜻이 작용한 결과로 전하고 있다. 노적사의 이런 행적을 통해 그가 기황후와 갈등하던 황제의 측근이었고, 기황후와는 정치적 대척점에 있었으며, 그와 함께 숙청된 만지 또한 비슷한 이해관계를 공유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야선홀도(也先忽都)의 경우, 서슬란과의 갈등이 자신의 부친인 타이핑(太平, 태평)과 기황후·황태자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기황후가 내선(內禪)에 대한 허락을 얻기 위해 환관 박불화를 타이핑(당시 우승상)에게 보내 그 뜻을 전달했는데, 타이핑이 아무 대답이 없자 기황후가 그를 불러내 술을 대접하면서 내선의 뜻을 거듭 전달했음에도, 타이핑은 황후의 뜻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황태자는 황제의 측근들을 모두 척결하기로 작정하고, 황제의 최측근인 어사중승 승독로철목아(丞禿魯鐵木兒)부터 탄핵할 준비를 마쳤지만, 탄핵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황태자의 지시를 받아 탄핵을 준비하던 감찰어사가 좌천되고 말았다. 황태자는 탄핵 계획의 실패가 야선홀도(타이핑의 아들) 탓이라 여겨 타이핑 일파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서슬란 등에게 그 일을 맡긴 것으로 보인다. 서슬란이 1360년 무렵 재상직에 복귀하자 야선홀도를 등용하는 척하며 감찰어사들로 하여금 탄핵하게 하고는 즉시 그를 파면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아울러 이것이 앞서 언급한 서슬란의 1363년 만지일당 숙청으로 이어졌으니, 만지 등에 대한 정치적 박해는 기황후와 황태자가 자신들의 내선 계획에 걸림돌이 되는 인물들을 제거하는 과정의 일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야선홀도의 이 같은 행적은 ‘그와 기황후 세력간 갈등’이 이미 1350년대말부터 진행돼 오고 있었을 가능성을 상정하는 바, 그와 함께 숙청된 ‘만지와 기황후 세력 간 긴장’의 배태시점 또한 올려 잡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게다가 야선홀도의 부친 타이핑과 황태자·기황후 간의 갈등 상황이 1357년에도 확인되고, 그 역시 내선 문제와 유관했을 가능성이 기황후와 황태자가 1356년 이미 한차례 내선을 시도한 적이 있음을 근거로 상정될 수 있는 만큼, 야선홀도, 또는 만지일당 구성원들의 기황후세력과의 갈등 개시를 1350년대 중반으로까지 올려 잡을 여지도 확보되는 바가 있다.
물론 이렇게 확보된 ‘상한’ 자체는 공민왕의 1356년 개혁과 시기적으로 거의 중첩되고 있어, 앞서 살펴본 내용조차도 노국공주일가가 “1356년 이전”의 시기에 기황후세력과 갈등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데에는 미흡한 바가 없지 않다. 이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만지 개인의 경력에 대한 별도 검토가 필요하다. 그와 관련하여 <원사> 재상연표(宰相年表)에서 확인되는 만지와 서슬란의 ‘엇갈리는’ 행적을 환기해 본다.
만지는 1345년 자정원사(資政院使)를 맡은 바 있고 1352년에는 평장정사(平章政事)에 임명됐으며, 그 해 8월에 회남(淮南) 행성우승(行省右丞)까지 역임하는 등 1350년대초 비교적 활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아울러 만지는 1353∼1354년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했고 1355년 우승의 자리에까지 올랐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이후에는 재상연표에서 사라지고 있어 오래지 않아 재상직에서 퇴출당한 듯하며, 실제로 <원사> 본기(本紀) 1355년 9월 기록에서는 그가 선정원사(宣政院使)로 재직했음이 언급돼 있을 따름이다. 이후에는 사료상 그 행적이 잘 확인되지 않으며, 그가 정치적으로 소외되기 시작한 1355년 중엽은 공민왕의 1356년 개혁 1년 전에 해당한다.
그리고 ‘재상연표’의 1356년 기록에 따르면, 밀려나던 만지와 반대로 승상으로 부상한 인물이 기황후의 측근 서슬란(搠思監, 삭사감)이다. 서슬란은 1350년부터 1355년까지 평장정사(平章政事)로 재직하다, 1356년 좌승상(左丞相)으로 승진했고 1357년 이후 1364년까지는 최고위직인 우승상(右丞相)을 역임했다. 만지와 서슬란의 이 같은 엇갈린 행적은 그 자체로 이 시기 양자 간에 긴장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시사한다. 만지가 재상직에서 밀려난 시점을 볼 때 양 세력간의 갈등은 적어도 1355년 ‘현존’했다고 하겠으며, 이전부터의 경쟁관계가 1355년의 만지 좌천으로 이어진 것일 가능성까지 감안하면 양자 간의 갈등은 1350년대 전반 어느 시점에 시작된 것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라 생각된다.
흥미롭게도 노국공주의 숙부들 중 만지 외에도 벌드(孛羅)나 알로(阿魯) 또한 유사한 정황을 보이고 있다. 이들 역시 재상직을 역임했으며 기황후세력과의 관계가 그리 좋지 못했을 가능성이 몇 가지 지점에서 포착된다.
벌드의 경우 (재상연표의 기록에 따르면) 1334년부터 1335년까지 우승(右丞)을 맡았다가 1336년부터 1340년까지 평장정사(平章政事)로서 재상직을 유지했으나, 1341년부터는 기록에서 사라진다. 아울러 재상연표상 벌도와 함께 나타나 함께 사라지는 인물이 승상 바얀(伯安, 伯顏)임이 눈에 띈다. 바얀이 1335년 다나시르(答納失里) 황후가 주살된 후 기씨(奇氏)의 황후 책봉을 불허했던 대표적인 반–기황후 인물이다. 그런데 재상연표를 보면 벌드의 재상 경력이 바얀정권과 동시에 시작하여(1334) 역시 동시에 막을 내리고 있어(1340), 벌드와 바얀이 동일한 정치적 이해를 공유하는 관계에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벌드 또한 기황후와는 대립했을 가능성이 상정된다.
다음 알로(阿魯)의 경우, 1340년 즉 바얀 정권 말년에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오르고 1341년 4월에 우승(右丞)으로 승진했으나 곧바로 재상직에서 퇴출당한 듯하다. 재상연표에서 그의 행적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된 1341~1342년 무렵은 원제국 내에서 권력 이동이 있었던 시기에 해당한다. 알로가 재상연표에 처음 나타난 시기가 바얀(伯顏)정권 때였다면(1340), 그가 재상연표에서 사라진 시기는 턱터흐(脫脫)가 정권을 잡기 시작한(1341-1342) 무렵이었다. 턱터흐의 경우 개혁적인 관료이긴 했으나 기황후세력과 전략적 제휴도 더러 했던 것으로 전하고 있어, 알로의 실각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뤄졌을 가능성을 제기해 본다.
만지가 아닌 노국공주의 다른 두 숙부 또한 기황후세력과 대척점에 선 듯한 정치행보를 보였던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만지 개인의 기황후세력과의 갈등은 1350년대 전반에 시작되었을지언정, 만지를 포함한 노국공주 일가 전체의 기황후세력과의 긴장은 이미 1340년대부터 시작됐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황후가 제2황후가 된 것이 이 무렵이었던 점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결과를 감안할 때, 노국공주일가와 기황후세력간의 갈등은 이미 1340년대 배태됐고, 1340년대 후반 및 1350년대 전반 쌓여오다가, 1355년 ‘만지의 실각’이라는 형태로 전면화된 것이 아닌가 한다. 냉전이 열전으로 바뀐 상황에 견줄 만하겠는데, 그 전 과정을 예의주시하던 노국공주 또한 일가의 운명에 대한 위기의식, 기황후세력에 대한 적대감 등을 키워갔을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벌드와 알로만 하더라도 그들의 정치적 불운을 조카로서 실감했을 따름이겠으나, 만지의 실각에 이르러서는 뭔가 대응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됐을 법하다. 소극적, 수동적으로 관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필요할 경우 능동적으로 개입하거나, 상황에 따라 선제 대응을 도모할 필요성을 느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공민왕이 고려내 기씨세력을 정조준한 1356년은 공교롭게도 상기한 갈등 전개과정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사실 즉위직후부터 이어진 기씨세력의 전횡으로 공민왕은 왕위마저 위협받고 있었는데, 그것은 또한 노국공주의 고려왕비 자리도 불안정한 상태였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던 바, 노국공주는 일신상의 사유로도 기씨세력의 척결을 원했을 개연성이 농후하다. 그에 더하여 숙부 만지가 최근 실각하는 등 몽골의 자기 일가 또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제국내 기황후세력에 대한 경고효과도 지녔을 공민왕의 기철세력 척결은 제국내 노국공주 가문의 정치적 이익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에 노국공주도 ‘공민왕이 자신의 남편’이라는 이유로 1356년의 개혁을 그저 묵묵히 지켜보는 것으로 일관한 것이 아니라, 공민왕의 개혁이 자신과 자기일가의 정치적 이익 증대에도 기여하는 것이었기에 그를 지지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상정된다.
그런 각도에서 보면 1356년 공민왕의 개혁은 고려내부 기씨세력들의 준동에 대한 공민왕의 응답이었던 동시에, 숙부(만지)의 실각으로 위기에 처한 노국공주 일가가 서슬란 및 기황후세력의 도발에 대응하는 측면 또한 내포했던 셈이다. 심지어 공민왕의 1356년 기철세력 척살에 공주가 모종의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공민왕을 겨냥한) 기황후세력의 재반격이 1360년대 전반 덕흥군 책봉으로 본격화된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노국공주일가를 포함해 반 기황후세력 전체를 겨냥한 듯한) 앞서 언급한 ‘만지일당’ 숙청(1363)도 발생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상의 논의는 당시의 여러 정황증거들을 한데 조합하여 도출한 추정에 해당한다. 노국공주의 정치적 발언 자체가 사료를 통해 전하지 않는 이상, 이러한 가정만 갖고 노국공주가 스스로 하나의 정치인으로서 1356년 개혁을 적극 지지한 것이라 추단하기는 어렵다. 현재로서는 공민왕의 1356년 개혁을 반원개혁으로 규정한 후, 정작 공민왕이 원공주와 혼인한 상황에서도 그러한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이유의 해명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문제를 지적하고, 어찌 보면 가장 가까이 있는 가장 가까운 견제세력으로서의 노국공주가 공민왕의 여러 정책에 제동을 걸지 않은 이유를 정치학적 견지에서 해명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시각이 노국공주의 일거수일투족을 새로운 관점에서 살펴보게 함으로써, 14세기 정치사에 있어 종속변수이자 객체로만 간주돼 온 노국공주를 능동적 정치주체로 새로이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