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둥글다
Ⅲ. 사방四方으로, 둥글게 트이는 존재
전통 형이상학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처럼, 하이데거에서도 존재는 존재자와 관련해서는 ‘존재하게 함’이다. 즉 존재는 “모든 존재자를 존재하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경우에는 존재의 본질이 ‘밝게 드러남’의 비은폐인 만큼, ‘존재하게 함’의 사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일어난다. 존재는 자신을 열어 밝히면서 그 빛 안에 존재자를 간수하여 비로소 존재자로서 있게 한다. 여러 존재자[多]는 그 하나의 존재 진리[一] 안에서 비로소 존재자로서 들어선다.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존재하게 함’은 존재가 자신을 환히 드러내는 밝게 트임 안에서 그리고 그 밝게 트임으로부터 끊임없이 존재자에게 고유하게 존재하도록 수락하고 베푸는 방식으로 수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존재하게 함’은 당연히 창조나 제작, 산출 등 인과론적 문맥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비은폐론적으로 이해돼야 한다. 그에게서 존재는 없던 것을 처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가 본연의, 그러나 숨겨진 자기됨으로 새롭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존재자는 존재의 존재하게 함에서 비로소 그 자신으로 자유롭게 된다.
심지어 하이데거는 존재 문제를 이해하는 첫 번째 관건은 존재가 마치 존재자인 양 그것의 근거를 구하고, 다시 이 근거의 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얘기하지 않는 데 놓여 있다고 말한다.(Sein und Zeit) 달리 말하면 ‘무엇은 무엇이 낳고 이 무엇은 또 다른 무엇이 낳고 … ’ 하며 계보를 따지는 논리를 가지고서는 자신의 사유를 올바로 적중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에서 산과 집은 존재의 광휘 안에서, 말하자면 그 빛의 ‘은총’ 안에서 ‘왜’란 물음을 거부하며 각기 산과 집으로서 고유하게 머문다. 뜰의 잣나무도 그렇게 ‘이유 없이’ 서 있다.
하이데거는 비은폐론적 존재하게 함에 대해서 Identität und Differenz(『동일성과 차이)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존재자의 존재란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존재(Sein, welches das Seiende ist)를 가리킨다. 이때 ‘ist’(‘존재하게 하는’)는 타동他動, 이행(넘어옴)의 의미로 말한다. … ” 한편 존재는 언제나 존재자에 속한다는 의미로 존재자의 존재이다. 그래서 “[존재의 이행은] 마치 존재자가 존재 없이 있다가 비로소 이 존재에 의해 관여되는 것처럼”, 존재가 따로 떨어진 그의 자리를 떠나 존재자로 넘어오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존재자]를 넘어서, 탈은폐하며 [존재자로] 넘어온다. 그러한 넘어옴을 통해 존재자는 비로소 그 스스로부터 비은폐된 것으로서 도래한다(ankommen). 이때 도래란 존재의 비은폐 안에 간수됨, 그렇게 간수된 채 가까이 머묾, 존재자로 존재함(Seiendes sein)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자로부터 존재자로 넘어오는 존재의 이행은 존재가 자신을 열어 밝히면서 영역화하는 사건을 말한다. 존재자의 존재는 밝게 트임의 영역 안으로 존재자를 감싸 현존하도록 하는(entlassen in das Anwesen) 것이다. 다시 말해 열어 밝혀지며 영역화하는 존재의 환한 ‘조명’ 아래 존재자는 비로소 이러저러한 무엇이 아닌 그 자체로서 들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영역적 존재는 불러 모으는 장(Ort)으로서 “스스로에게 불러 모으고 그렇게 모인 것을, 꿰뚫어 비추고 밝히면서, 간수하여 그것을 비로소 본질로 있도록 한다.”(Unterwegs zur Sprache『언어로의 도상에서』)
이와 같이 존재는 자신을 열어 밝히며 존재자로 향하고, 존재자는 그 존재의 탈은폐 안에 간수돼 존재자로서 존재하는 방식으로 둘은 동시에 서로를 향한다. 그럼으로써 존재자의 존재와 존재의 존재자는 서로로부터 나뉘면서도 서로에게 속하며 단일함, 동시성을 이룬다. 이 단일함, 동시성의 사태 혹은 그 단일함이 일어나는 사이 영역이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에서 정작 사유돼야 할 ‘차이 자체’이다.
“존재자 전체 한 가운데는 하나의 개방된 자리가 현성한다. 밝게 트임이 있다. 이 밝게 트임은, 존재자로부터 사유해보면, 존재자보다 ‘더 있다’(seiender). … 이 환히 트이는 중심 자체가 마치 무(Nichts)와 같이 … 모든 존재자를 둥글게 감싼다.”(Holzwege『숲길』)
하이데거는 탈은폐의 밝음인 존재가 스스로를 중심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하나로 불러 모으는, 또 그렇게 불러 모여 하나를 이룸을 “모든 존재자를 둥글게” 감싸는 사태라고 말하고 있다. 존재의 밝게 트임은 원만한 원圓으로 영역화한다는 것이다. 또 Identität und Differenz에서도 존재와 존재자의 함께 속함을 붙잡고 있는 사이 영역은 원으로 표현된다. “하나의 원을 이룸, 존재와 존재자가 서로를 향해 번갈아 돎”
하이데거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가 서구 시원에 벌써 탈은폐하는 현존이란 의미의 존재를 영역적, 위상학적으로 이해하면서, “둥근 공”이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파르메니데스는 본래적인 존재로서의 현존을 “어디서나 동일한 것 것으로서 고유한 중심에 있으며 이 중심으로서 원”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원은 “포괄해나가는 회전이 아니라 현존하는 것을 환히 밝히면서 간수하는 탈은폐의 중심에 존립한다.” 즉 둥근 존재는 “탈은폐하며 밝게 트임”(Holzwege)의 사건을 말한다.
존재와 존재자의 공속성[혹은 둘의 차이 자체]은 존재를 세계로, 존재자를 사물로 사유하는 곳에서도 반복된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사물’이라는 것을 ‘존재자로서의 존재자’, 즉 이러저러한 자기 외적인 견해나 관점들을 모두 떨친 순수한 존재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그리고 세계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들의 총체가 아니라 세계로서의 세계를 말한다. 하이데거에서 세계 그 자체, 즉 본연의 세계란 하늘, 땅, 죽을 자들인 인간, 신적인 것들이 각자의 고유함을 견지하는 가운데 하나로 어울리면서 밝게 열리는 사방四方으로서의 세계다. 이 세계는 “존재의 진리가 비대상적으로 머무는”(Vorträge und Aufsätze ), “존재의 진리를 인간 본질에 접근시켜주는”(Die Technik und die Kehr『기술과 전향』) 열린 장이다.
반면 사물의 본질이란 세계를 자기 곁에 불러 모아 깃들게 하는 데 있다. 사물의 사물성은 ‘세계 사방’이 펼쳐지도록 하는 데, 그런 의미에서 세계의 분만分娩에 있다는 것이다. 존재 진리는 사물을 ‘장소’로 삼아 세계 사방으로 영역화되는 것이다. 동시에 사물의 편에서는 사방의 단일함으로 밝게 트이는 “세계의 광휘 안으로”(Unterwegs zur Sprache) 간수됨으로써 비로소 사물이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물과 세계는 사방으로 환히 트이는 존재 진리에서, 그 장을 중심으로 서로 나눠지면서도 서로에게 향함으로써 함께 속하며, 각기 그 자체로서 존립하는 것이다. 이로써 존재 진리는 존재자와 존재 또는 사물과 세계가 서로 구별되면서도 하나로 있는 단일함을 떠받치는 둘 사이의 ‘사이’가 된다. 하이데거에게 게오르그 트라클의 ‘어느 겨울 저녁’이란 시, 특히 2절의 마지막 두 행은 바로 그러한 존재 진리를 말하고 있다.(Unterwegs zur Sprache)
<어느 겨울 저녁>
눈이 창문에 내리고,
저녁 종이 길게 울리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식탁이 차려지고
집은 잘 정돈된다.
방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어두운 좁은 길 위의 문에 이른다.
대지의 서늘한 수액樹液으로부터
은총의 나무는 금빛으로 무성하게 피어난다.
방랑자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선다;
아픔은 문지방을 석화石化시켰다.
거기 순수한 밝음 안에서
식탁 위의 빵과 포도주는 환하게 빛난다.
“대지의 서늘한 수액樹液으로부터 / 은총의 나무는 금빛으로 무성하게 피어난다.” 나무는 ‘땅’에 굳건하게 뿌리박고 있으며, 그것의 무성한 개화開花는 햇빛, 비, 바람 등 ‘하늘’의 축복을 향해 열려 있다. 나무의 활짝 핀 꽃에는 열매가 간직돼 있다. 그 열매는 죽을 자들인 ‘인간’을 먹여 살리는 ‘성스러운’ 것이다. 금빛으로 피어난 “은총의 나무”에는 이렇듯 하늘, 땅, 신적인 것들 그리고 죽을 자들의 어울림인 “세계–사방”이 불러 모여 있는 것이다. 동시에 금빛 광채와도 같은 세계의 밝음은 하나의 사물인 나무를 감싼다. 나무는 그 품 안에 간수되며, 참됨으로 고요히 머문다.
세계와 사물이 하나로 어울리는 혹은 서로에게 향함이 교차하는 ‘중심’인 ‘사이’는 금빛 광채의 세계로 열리는 존재 진리이다. 그리고 이때 둥글게 트이며, 존재와 존재자, 세계와 사물의 단일성, 동시성을 실어 나르는 ‘사이’ 영역은 존재가 그 자체로서, 다시 말해 비은폐로서 머무는 ‘동안의 폭’이자 ‘폭의 동안’으로서 ‘시공간’의 성격을 갖는다. 존재는 “존재와 존재자의 시공간적 동시성”(Beiträge zur Philsophie)으로 발현하는 것이다. 존재와 그 진리에서 간수되는 존재자 사이 “하나의 원”은 “시공간적 동시성”으로써 이뤄지는 것이다. 이 시공간적 동시성이 본래적 의미에서 시간의 힘이며 시간 자체이다. 그래서 존재자의 존재는 시간으로부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하이데거 대표작의 제목이기도 한 ‘존재와 시간’에서 둘 사이 ‘와’의 형세가 어떤 것인지 눈짓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