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신고三一神誥」의 수행 (1)
생명활동의 균형을 잡는 법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는 지축이 23.5도 기울어진 채 자전自轉하면서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궤도로 공전公轉하고 있다. 지구에는 자전으로 인해 음양陰陽의 교체가 일어나고, 타원궤도의 공전으로 인해 사계절이 생긴다. 그래서 자전과 공전은 지구에는 편음편양偏陰偏陽의 환경이 조성된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지구의 운동변화, 나아가 천체의 운동변화에 직ㆍ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은 어쩔 수 없이 불비不備한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사람은 정신적인 갈등이나 영양 부조화 등으로 인해 정서가 파괴되기도 하고, 몸을 구성하는 생명활동의 기능은 원활하게 작용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지구상에 살고 있는 한 생명활동의 균형이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생명활동의 균형이 깨지게 되면, 사람은 누구나 쇠약해지거나 병이 들기 십상이다. 그렇게 되면 삶의 가치평가는 절하되기도 하고, 타고난 수명은 짧아질 수도 있고, 급기야 유명을 달리하기도 마련이다. 역으로 말하면 생명활동의 균형을 얼마나 잘 이루고 있느냐에 따라 인간의 삶은 강건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천수天壽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생명활동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몸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각기 그 기능機能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가를 주도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외적으로는 자신의 형체를 구성하는 골격骨格이 튼튼하게 잘 유지되고 있는지, 내적으로는 오장육부五臟六腑의 기능이 원활하게 발휘되고 있는지, 안정된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지 등이 잘 인지되어야 한다. 나아가 삶의 활동에 필수적인 영양조절 및 생리조절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천시天時에 맞추어 규칙적으로 수면睡眠하고 기상起床하여 피로가 누적되지나 않는지 등, 몸의 기능에 대한 세심한 주의가 또한 필수적이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아무리 조신操身하여도 자신도 모르게 생명활동의 균형이 파괴될 수도 있다. 결정적인 요인은 열악한 환경, 과욕過慾으로 인한 몸과 마음의 만성피로를 들 수 있다. 만성피로에 찌들어 생명활동이 균형을 잃게 되면 마음은 의욕이 퇴색退色되고, 몸은 나른하고 무겁다. 잠을 잘 자거나 휴식을 취해도 피곤하고, 정신도 혼몽하고, 활동하는 것조차 버거울 수 있다. 심지어 마음에서 불타는 의욕이 일어나도 그 욕망이 달성되지 못하면, 사람은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거나 화가 치밀어 몸이 상하기도 한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몸은 질곡桎梏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결국 생명활동의 균형이 깨져 고장이 나고, 심각한 병이 들어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몸에서 생명활동의 균형을 이루어 무병장수無病長壽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즉 인간으로 태어나 수명대로 천수天壽를 누릴 수 있는 현실적인 방도는 없는가? 있다. 결정적인 것은 바로 수행修行이다. 수행은 살아 있는 몸과 마음을 닦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몸과 마음이 없으면 생명활동이란 있을 수 없고, 생명활동이 없으면 수행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몸과 마음을 닦아 생명활동의 균형이 잘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수행의 기초이다.
그런데 몸과 마음은 ‘하나’이다. 왜냐하면 몸이 없는 마음은 공허하고, 마음이 없는 몸은 송장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생명활동의 균형에 직접적인 것은 몸이다. 그래서 동양의 한의학에서는 몸을 닦는 데에 가장 초보적인 단계로 ‘기혈氣血’을 말한다. 왜냐하면 ‘기혈’은 사람의 목숨을 전적으로 조종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의 몸에서 ‘기혈’이 원활하게 잘 순환되어야만 그 목숨이 붙어있을 수 있음을 함축한다.
‘기혈’은 무엇인가? 문자적인 의미에서 분석해 보면, ‘기’는 ‘원기元氣’를 함축하고, ‘혈’은 몸에 있는 혈액을 말한다. ‘원기’는 생장의 근본이 되는 타고난 기운으로 몸과 마음의 활동력으로 작용한다. 반면에 ‘혈액’은 혈관을 통해 생명활동에 필수적인 영양과 에너지를 몸 안의 구석구석에까지 실어 나른다. 그럼에도 ‘기’와 ‘혈’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왜냐하면 ‘원기’는 심장 박동을 통해 순환하는 ‘혈액’과 함께 하면서 ‘혈액’을 끌고 다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이 말과 자신이 한 몸이라는 이치와 같다. 말은 사람을 등에 태우고 가지만, 사람은 원하는 대로 말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기 때문이다.
몸에서 ‘기혈’이 탁해지거나 부족하게 되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 ‘기혈’은 ‘하나’이기 때문에, 만일 ‘원기’가 탁해지면 ‘혈액’도 탁해지고, ‘원기’가 맑아지면 ‘혈액’도 맑아진다. 기혈이 탁해지면 몸에는 독기毒氣가 쌓이게 된다. 몸에 독기가 쌓이면 ‘원기’는 쉽게 훼손되거나 약해져서 급기야 몸에 병이 들어올 수 있고, ‘혈액’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반면에 만일 ‘기혈’이 부족하면 몸에 두통, 현기증, 권태倦怠, 이명耳鳴 등의 병증이 발생하게 된다. 즉 몸에 ‘혈액’이 부족하면, 영양공급이 제대로 배분되지 않아 적혈구나 혈색소가 감소하고, 혈액을 끌고 다니는 ‘원기’도 약해서 몸은 노폐물을 배출하지 못하고 독소가 적체積滯되어 나른하고 무겁고 피곤하고 무기력해진다. 이로 인해 몸은 생명활동이 둔화되어 정신이 혼몽昏懜해지고 병증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몸에 병증이 생겨 누적되면 몸은 결국 망가지게 된다. 몸이 망가진다는 것은 병이 들었다는 것이고, 병이 들었다는 것은 곧 목숨을 조종하는 ‘기혈’이 망가지게 됐음을 의미한다. 수행은 바로 자신의 ‘몸’을 닦아 근본적으로 정화淨化하는 것에서 출발하는데, 이는 몸에 축적된 독해毒害를 뿌리 뽑아 곧 ‘원기’를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즉 수행의 일차적인 목적은 망가진 ‘기혈’을 되살려 원래상태로 돌아가 본연의 생명과 하나 된 조화로운 몸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身]을 닦아 근본적으로 정화한다는 것은 정신적인 의미의 마음[心]과 물질적인 의미의 기운[氣]을 닦는 것이다. 왜냐하면 몸은 ‘마음’과 ‘기운’이 융합되어 ‘하나’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마음의 쓰임이 나오는 성性, 생명과 사명의 기운을 유지하는 명命, 현실적인 몸을 이루는 정精을 닦아 ‘삼진三眞’으로 돌아감을 함축한다. ‘진성’, ‘진명’, ‘진정’의 ‘삼진三眞’은 본래 조물주 삼신三神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를 『단군세기』 서문에서는 조화신이 내려와 ‘성性’이 되고, 교화신이 내려와 ‘명命’이 되고, 치화신이 내려와 ‘정精’이 된다고 한다.
수행은 ‘삼진’을 회복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수행에 임하는 사람은 맨 먼저 편안한 마음으로 몸을 똑바르게 하고 앉아야 한다[정좌正坐].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분산되어 각성覺性이 잘 안되고, 생명의 기운이 흩어져 ‘진명’이 잘 유지되지 못하여 몸에서 ‘기혈’의 순환 또한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정좌하여 수행하는 방법을 「삼일신고」에서는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觸’이라고 했다.
‘지감’은 의식에서 비롯되는 감정적인 마음, 즉 ‘기쁨[喜], 두려움[懼], 슬픔[哀], 성냄[怒], 탐욕[貪], 증오[厭]’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의식작용으로 인해 ‘진성’을 혼란스럽게 하는 생각들, 즉 식신識神에서 비롯된 모든 관념들을 정화하는 일에 몰입함을 중시한다. 그래야만 식신의 활동을 멈추고 각성이 되어 내재된 ‘원신元神’을 깨울 수 있기 때문이다. ‘원신’은 ‘삼신’의 다른 이름이다. 창조의 근원으로 말하면 ‘원신’이고 그 작용으로 말하면 ‘삼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행을 통해 ‘진성’으로 돌아가야 ‘원신’을 일깨울 수 있고, 진리에 대한 눈이 트이게 된다.
‘지감’은 정정靜定한 마음과 정서의 유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지감’의 극단적인 방식은, 마치 선禪 수행자들이 하는 것처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의식적인 감정들을 끊어버리고 적정寂靜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선정주의禪定主義가 대표적일 것이다. ‘지감’의 수행목적은 의식의 활동으로 표출되는 식신 때문에 잠들어 있던 ‘원신’을 일깨워서 곧 삼신하느님의 마음으로 거듭나게 됨을 함축한다.
‘조식’은 호흡을 통해 거친 숨을 고르게 함으로써 ‘원기元氣’에 묻어 있는 ‘향기로운[芬], 문드러진[爛], 차가운[寒], 뜨거운[熱], 마른[震], 습한[濕]’ 기운과 같은 탁한 기운을 몸 밖으로 내보내어 몸에 적체된 독해를 뿌리 뽑는 것이다. 이는 몸에 잠재되어 있는 본연의 생명[眞命]의 기운을 회복하여 몸에 맑은 기운이 충만하게 운행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지감’에 몰입함과 동시에 목숨을 유지하는 맑은 ‘기혈’이 몸에서 원활하게 순환하도록 의식적으로 힘써야 한다. 그러면 ‘원기’가 되살아나게 되고, ‘원기’가 회복되면 ‘기혈’이 균형을 유지하게 되어 무병장수의 천수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인성론의 비조라 불리는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설파했다.
‘금촉’은 몸이 외부와의 접촉을 금한다는 뜻이다. 이는 몸에 딸린 감각기관, 즉 귀를 통해 들어오는 ‘소리[聲]’, 눈으로 보는 ‘색감[色]’, 코를 자극하는 ‘냄새[臭]’, 혀를 통해 아는 ‘맛[味]’, 욕망에서 비롯하는 ‘음란[淫]’, 신체적인 ‘부딪힘[抵]’을 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몸에 딸린 감각기관을 자극하는 것은 ‘진성’에서 나오는 본연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진명’에서 나오는 생명의 기운을 탁하게 함으로써 결국 ‘진정’을 소모시키거나 퇴락頹落시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외부와의 신체적인 접촉은 정정한 마음과 맑은 생명의 기운의 운행을 저해하고 방해하기 마련이다. ‘금촉’의 극단적인 수행방식은 마음[心]과 신체[身]를 이원화하여 참 생명이란 오직 마음뿐이라는 주장에서 볼 수 있다. 서양 스토아학파(Stoicism)에서 말하는 견인주의堅忍主義, 혹은 인도의 고행주의苦行主義가 대표적이다.
수행을 통해 ‘마음’이 안정되고 ‘기운’이 맑아지게 되면, 몸이 정화되어 균형이 잡힌 ‘기혈’이 순환하게 되기 때문에, 정신이 점차 상쾌해지고 몸이 활기를 되찾게 된다. 이는 의식을 통해 일어나는 마음[識神]의 활동이 정지되면서 잠들어 있던 ‘원신’이 깨어나 작용하기 시작하고, 원기를 되찾아 몸에서 생명활동의 순환이 막힘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수행이 잘 되면, 수행자는 자연과 일체가 될 수 있고, 자연과 하나 되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원신’과 ‘원기’가 되살아나 식신으로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되고, 초목들이 대화하는 것까지도 영기로 느껴 알게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