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 그들의 깊은 사유와 ‘웃픈’ 삶 5 라이프니츠 (1)

철학자들, 그들의 깊은 사유와 ‘웃픈’ 삶 5 라이프니츠 (1)

 

라이프니츠, 컴퓨터 기술을 가능하게 만들다 (1)

 

1. 고등학생들을 미적분의 고통에 빠트린 철학자

독일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철학자 라이프니츠를 빵 만들던 제과 기술자로 알고 있다. 한 설문 조사는 독일인들이 버터 과자를 만드는 한 유명한 요리법이 라이프니츠에게서 유래된 것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이것은 틀린 생각이다. 마치 모차르트와 누가 사탕이 아무런 연관이 없듯이, 라이프니츠는 버터 과자와 전혀 상관이 없다. 다만 그의 이름이 빚은 오해일 뿐이다. 버터 과자 이름이 ‘라이프니츠’인 것이다.

이에 비해 그가 대단한 인기 상품이었던, 정밀한 휴대용 계산기를 개발한 발명가에 속한다는 사실은 극히 일부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3백여 년 전에 라이프니츠가 고안한 것들은 비단 곱셈과 나눗셈의 기능을 가진 최초의 계산기만이 아니다. 이밖에도 그는 단지 2개의 숫자-1과 0-만을 가지고서 모든 종류의 셈을 할 수 있는 자동기계를 구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철학자의 놀라운 계획은 실현되지 못한다. 그가 살던 바로크 시대는 그가 구상한 기계를 제작할 만한 정교한 기술을 갖고 있지 못했던 탓이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컴퓨터는 10진법 체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한, 저 계산처리방식에 따라 작동하고 있다. 이 때문에 라이프니츠는 컴퓨터 분야에서 그들의 ‘수호성인(Schutzpatron)’으로 추켜세워지기도 했다.

라이프니츠는 새로운 계산기를 통해 인간 정신이 그가 철학이라고 여긴 “보다 더 우월한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풀려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로 나타났다. 그 사이 많은 교육학자들은 계산기가 학생들의 지적 능력을 활발하게 촉진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무력하게 만들었다고 여기게 됐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보다 우월한 것들’,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궁극의 것들 말고도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늘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 자기 생각의 노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언젠가 “성인이 돼 나는 일일이 적기에는 하루 24시간도 부족할 만큼 너무나 많은 아이디어들을 갖고 있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그는 자물쇠의 성능을 개선하느라 골몰하기도 했고, 고아와 과부들을 위한 보험을 만들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또한 잠수함 제작을 구상했으며, 오늘날 바람의 속도를 재는 데 쓰이는 풍력계를 발명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프로이트보다 2백 년이나 앞서 인간에게는 의식 말고도 또 하나의 잠재의식이 있다는 점을 논리적으로 입증했다. 무엇보다도 만약 잠재의식이란 게 없다면 누군가 우리를 불러 깨워도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또한 광산에서 지하수를 끌어 올리는데 쓰는 기계의 성능을 개선시켰고, “환자의 규칙적인 체온검사”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지적한 바 있으며 오늘날에는 당연시된 “환자의 병상일지 기록”을 의사들에게 권고하기도 했다.

이밖에 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에게 독일을 공략하는 대신 이집트를 상대로 십자군 전쟁을 벌일 것을 제안했으며, 죽기(1716년) 바로 전까지는 자신의 고용주인 벨펜가家의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폰 하노버(Ernst August von Hannover)의 복잡한 가계사家系史를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일들은 그의 위대한 업적에 비교한다면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선 라이프니츠는 고등수학의 결정적인 창안자들 중 한 사람이다. 또한 그는 논리학이란 지적인 분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의 이 같은 업적은 비전문가들을 환호하게 하기보다는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것이다. 철학 전문가들은 라이프니츠를 철학의 한 분과인 논리학에서 “올바른 사유에 대한 이론”의 기초자인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가장 중요한 사상가라고 평가한다.

엄밀한 지성의 소유자인 라이프니츠는 세상의 모든 오류들, 그릇된 방식의 사유결합들은 한결같이 언어의 오류들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바로 언어로써 사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자는 우리의 언어 자체가 오류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라고 결론지었다. 그에겐 특별히 언어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고 모호했으며, 충분할 만큼 객관적이지도 않았다. 예를 들어 ‘모든 인간은 형제이다’란 문장이 있다고 하자. 이 문장은 모든 인간은, 따라서 여자들 역시 남자의 형제들이다란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이 의미하는 것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이 같은 언어의 불명료함이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혼란을 주는 일이란 드물다. 그러나 과학적인 정보의 전달이 문제될 때는 언어의 애매함은 매우 빈번하게 혼란을 야기한다. 수학의 명료함에 반한 라이프니츠가 언어에 의한 일체의 오류들을 제거할 수 있는 어떤 확실한 방법을 찾고 싶어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때 그는 우리의 오성은 자연을 지배하고 있는 법칙과 똑같은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비가 온다.’는 문장을 완성하게 될 때 작용하는 사유법칙은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게 되는 자연법칙과 폭넓게 일치한다는 것이다. 철학자가 보기에 이는 사유법칙과 자연법칙이 똑같이 하나의 논리적 원천(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믿음은 사유가 하나의 은폐된 계산이란 사실을 깨닫게 됐을 때 더욱 확고하게 굳어졌다. 그는 예를 들어 ‘꽃이 핀다.’와 같은 주장들에서 술어(핀다)는, 마치 3이 9안에 들어 있는 것과 같은 유사한 방식으로, 이미 주어 안에 포함돼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와 달리 ‘이 사람은 불사不死한다.’와 같은 문장은 오류임에 틀림없다. ‘불사한다’란 술어는 ‘사람’이란 개념 안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세계를 혼동에 빠뜨리는 오류들이 비단 불명확한 언어에서 기인하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무엇보다도 논리적으로 그릇된 문장들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이 사람은 불사한다.’와 같은 문장이 바로 그런 예이다). 이 같은 믿음에서 그는 암호와 같은 기호언어(Symbolsprache)를 기획했다. 만약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다면, 언어가 서로 다른 나라들 사이에 있기 마련인 소통의 어려움 또한 자연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인공언어(Kunst Sprache)”는 수학의 엄밀한 법칙을 따르도록 돼 있다. 라이프니츠는 단어의 자리에 부호, 예를 들면 숫자를 집어넣어 모든 부호가 마치 1이 동시에 1.1을 의미하지 않듯, 하나의 명백하고 고정된 의미를 갖게끔 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라이프니츠는 기호언어를 완성하지 못했다. 기호언어를 연구하는 도중 자신의 몇 가지 결론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2천 년 전에 제시했던 논리적 법칙들에 위배된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사상의 교황’이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자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아보려 했지만, 밝혀낼 수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라이프니츠는 기호언어를 구상함으로써 오늘날 컴퓨터 기호언어의 기초를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술세계에서 필수불가결한 “수리논리학”의 기초를 세웠다.

그는 한편으로 휴대용 계산기-논리학을 통해 고등학생들의 부담을 덜어준 만큼이나 또한 그들에게 괴로움도 안겨 주었다. 사유의 거인, 라이프니츠는 오늘날 모든 교과과정에 들어 있는 미적분을 발견했던 것이다. 영국인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은 라이프니츠의 방식과 유사하지만 보다 복잡한 계산방식을 발견했으며, 또한 그보다 뒤늦게 이를 발표했다.

우리는 미적분 계산을 통해 복잡한 기하학적 도형들에 접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눈종이에 생긴 잉크 얼룩의 면적을 계산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미적분 계산(극한값계산)을 통해 얼룩 평면의 면적은 수치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이다.

잉크로 적셔진 모눈들을 하나씩 세어가려고 하면, 이내 어떤 모눈들은 단지 잉크 자국이 비스듬하게 걸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모눈의 단위가 밀리미터의 모눈종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단지 부분적으로만 잉크 자국이 져있는 모눈들은 남아있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얼룩의 면적은 정확하게 계산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미적분 계산은 모눈들을 무한히 작은 것으로, 그래서 약간의 잉크 얼룩이라도 져있는 모눈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도록 축소시킨다. 다시 말해 미적분 계산은 시각적으로는 더 이상 지각되지 않는, 다만 수학적으로만 파악될 수 있는 (무한히) 작은 모눈을 상정하는 것이다. 이 같은 방법은 결국 잉크 얼룩의 면적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게 해준다.

미적분의 발견은 자연과학에서 그 전이나 그 후에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독보적인 것이다. 이 발견 이후 이제 자연의 진행들은 눈앞에 명료하게 드러나게 됐기 때문이다. 자연의 경과들은 수치상으로 파악가능하게 됐고, 또 그럼으로써 계산을 통해 통제 가능한 것이 됐다.

라이프니츠 이후 대상의 모든 운동과 상태의 모든 변화는 그 각각의 임의의 국면들에서 수학적으로 파악가능하게 됐다. 강철이 녹스는, 혹은 물이 얼음이 되는 변화속도들과 또한 우주가 확장되는 차별적인 속도들이 그렇다.

라이프니츠가 숫자에 대해 가졌던 애정은, 비전문적인 사람들에게는 놀랍게도 종교적인 정서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예를 들면 그는 컴퓨터의 계산에 사용되는 1과 0을 각각 신神과 무無의 상징이라고 여겼다. 1이 비로소 다른 모든 숫자를 가능케 하듯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을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이 없다면 무(Nichts, 0)일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플라톤이나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스스로를 피타고라스학파라고 불렀던, 일련의 뛰어난 사상가들 중 한 사람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BCE 550년 경에 수학을 철학의 중심주제로 삼았던 희랍 철학자의 정신적 후예라고 여겼다.

‘수란 대체 무엇인가?’란 소박하게 들리는 물음에 대해 이들은 최종적인 해답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다음의 세 가지 방향에서 유효한 해명을 시도했다.

첫 번째 ‘실용적인’ 설명은 ‘장인匠人 철학자’라고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비롯된다. 이 설명은 간결하고 명쾌하게 셀 수 있는 사물들이 있기 때문에 수가 있다고 한다. 이 경우 수는 사물들에 의존한다. 사물들이 더 이상 실재하지 않고 셀 수 있는 사물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수는 사라진다.

두 번째 설명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셀 수 있기 때문에 세계의 사물들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셈할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혼돈 속에 빠질 것이다. 계산 능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우리가 지니고 있고 또한 사물들에 적용하는 사유형식(범주)이다. 이렇게 본다면, 수란 인간 오성의 고안물이며, 오성에 매어져 있으며, 우리의 죽음과 더불어 소멸하는 것이다(인간이 없으면 수도 없다).

가장 의미심장한 것이기도 한 세 번째 설명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에게서 연유한다. 이들의 입장에 따르면, (신이 수를 없애지 않는 한) 수는 영원하며 인간이나 사물들과 무관하게 실재한다.

나아가 수는 모든 존재자들-인간과 사물들-을 지배하고 있다. 우주 전체가 수학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고, 또한 수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진행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주의 비밀 또한 데모크리토스(BCE 460-370)가 설파하듯 근본질료(원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원리 안에 숨어 있다.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가 이 근본원리에 관한 이론이 얼마만큼이나 현대적인 이론인가를 입증해줬다. 그는 자신의 세계공식을 통해 우주가 그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근본법칙을 기술한 바 있다.

한편 수학은 라이프니츠 같은 이들이 희망을 걸고 있는 한 우월한 특성 때문에 그 밖의 다른 과학들과 구별된다.

박테리아를 연구하는 과학자는 현미경에 몸을 숙여 자기의 눈을 이용한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의 지각에 의존하여, 예를 들어 ‘박테리아는 분열에 의해 증식한다.’와 같은 지식들을 얻는 것이다.

농부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농부는 경작지가 비옥한 토지로 유지되려면 얼마만큼의 비료가 필요한지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관찰을 통해 안다. 곧 농부나 과학자의 지식은 한결같이 감각, 여기서는 시각을 통해 이뤄진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

이에 비해 산술적인 결과들은 다른 방식을 통해 얻어진다. 2+2=4란 결과를 알아내기 위해 우리는 감각에 의지하지는 않는다. 이 덧셈의 결과를 산출하기 위해 우리는 농부나 박테리아를 연구하는 과학자처럼 관찰이나 그 밖의 다른 어떤 경험을 할 필요가 없다. 설사 셈을 하는 동안 사과를 하나하나 더해간다 하더라도 이것이 곧 우리가 사과들을 통해 덧셈의 합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수를 합산하는 우리의 능력을 사과에 적용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4란 덧셈의 합에 이르게 되는 과정은 전적으로 우리 지성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즉 셈의 과정은 “순수사유”로만 이뤄져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수학적 계산들이나 명제들(예를 들면, 2+2=4와 같은)은 어떤 경우에도, 또한 영원히 타당하다는 우월한 특성을 갖고 있다. 이에 비하면 앞서의 농부의 지식(경작지는 얼마만큼의 비료가 필요하다)은 단지 하나의 특수하고 잠정적인 경험에서 나온다. 토양은 다른 어떤 조건에서는 비료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 비료 때문에 오히려 황폐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엔 농부의 지식은 이미 그릇된 정보가 될 것이다. 박테리아는 분열에 의해 증식한다는 주장 역시 지금에 이르러서는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박테리아의 성적 교합을 입증하는 것이 성공한 이후, 이제 그 주장은 더 이상 순수한 형식으로는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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