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 그들의 깊은 사유와 ‘웃픈’ 삶 6 라이프니츠 (2)

철학자들, 그들의 깊은 사유와 ‘웃픈’ 삶 6 라이프니츠 (2)

2. 삼단논법의 타당성을 의심하다

라이프니츠와 같은 철학자들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수학의 결과들로부터 신, 전능한 자 또한 2+2=4가 따르고 있는 논리학과 무관하지 않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이 명제를 보다 일반적으로 표현하면, 수학 안에서 인간의 사유와 신의 사유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인식은 라이프니츠나 또 다른 철학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셈의 활동에서 기능하는 것과 같은 “순수한 혹은 이론적 사유”를 수학 밖의 영역에서도 또한 활용할 수 있고, 그 결과로 완전한 진리 전체에 이를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날카로운 지성을 가지고서 그 같은 작업을 하였는데 후일 스페인의 오르테가 이 가세트를 “소름끼치게” 만들었고 또한 18세기 프랑스 학자들을 감동시켰다. 독일에서 라이프니츠가 갖는 명성의 크기란 “희랍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르키메데스가 누렸던 명성을 모두 합한 것과도 맞먹는 것이다.”

모두 70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기획된 라이프니츠 유고 전집의 맨 마지막 권은 이번 세기의 중반에나 나올 예정이다. 특히 미국의 논리학자들이 큰 관심을 갖고 이 독일 천재의 작품들이 출간돼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들은 라이프니츠를 그를 뒤이은 위대한 사상가들인 칸트, 헤겔, 마르크스 등을 능가할 21세기의 철학자, 미래의 인간이라고 여기고 있다.

또한 라이프니츠 사후 2백년인 1900년경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버트런드 러셀 역시 그에 대해서 비슷한 평가를 내렸다. 그 후로 이 영국인은 독일인 사상가 라이프니츠를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사람”으로 꼽았다. 하지만 인간 라이프니츠에 대한 그의 평가는 가혹하다.

“놀랍지 않은가!”라고 감탄하면서 러셀은 기술하기를, 작센 지방 출신의 사상가[라이프니츠]야 말로 모든 주인들이 총애할 만한 사람이라고 했다. 러셀이 보기에 라이프니츠는 조롱거리가 되는 독일 하인정신의 모든 덕목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는 근면하고 검소한 한편, 절제를 지킬 줄 알았고 금전문제에 관해서는 정직했으며 또한 인색했다. 예를 들어 하노버 궁에서 결혼식을 올린 신부들에게 그가 준 유일한 선물이란 전혀 돈이 안드는 충고였다. 그는 식을 올린 이후에도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가벼운 경고성 충고를 신부들에게 결혼선물로 주었다고 전해진다.

러셀은 또한 이 독일 사상가가 인색했을 뿐만 아니라 용기 또한 크게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라이프니츠가 중요하고 획기적인 의미를 지닌 자기 사상의 일부를 발표하지 않은 채 혼자서 간직했던 것은 비판과 적대적인 반발을 두려워해서였기 때문이었다고 믿었다.

라이프니츠의 행운은 동료들에게서보다는 권력자들, 세속의 군주들에게서 왔다. 귀족들은 물론 라이프니츠 사상의 일부만을, 그것도 그들이 선호하는 부분만을 알고 있었다. 특정한 라이프니츠 사상이 권력자들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가 지닌 사상의 기조가 ‘낙관적’ 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작센 출신의 이 사상가는 신의 땅에서는 선이 악을 훨씬 능가한다고 믿었다. 잘 알려진 바처럼, 이런 이유로 그의 철학은 ‘무력에의 호소’를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사회관계의 변화도 요구하지 않는다.

라이프니츠는 다른 많은 철학자들처럼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장 고마운 청중이 되어 준 귀족 부인들과 환담을 나누며 즐겁게 자기 사상들을 피력했다. 예를 들면 그는 프로이센의 왕후인 소피 샤를로테에게 이 세상은 “가능한 세상들 중 가장 나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필경 왕후의 농노農奴들에게서는 비난을 샀을 만한 주장이다.

하지만 그의 이 같은 낙관적인 인식들은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라이프니츠가 살던 시대는 적어도 궁전에서만큼은 오늘날 우리가 ‘위선’이니 ‘과장된 정중함’이니 하고 비꼬는 풍속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던, 이른바 ‘정중한’ 로코코 시대(galante Zeit)였다. 당시 사람들은 “가면을 썼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의례적이고 친절한 태도 뒤에 감추었던 것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가 태어난 1646년 6월 21일은 결코 정중한 시대가 아니었다. 유럽을 분열시키고 황폐하게 만든 30년전쟁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고, 전쟁에 희생된 독일 민중의 수는 그 때까지만 해도 전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실정이었다. 당시의 참상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전염병과 기아의 재앙이 전 유럽을 휩쓸고, 작센 지방에서는 이리떼들이 군인들이 약탈하다 남겨 둔 것들을 먹어치우며 유혈로 얼룩진 마을을 헤집고 다녔다. 그의 고향인, 인구 1만4천명의 라이프치히 역시 상황은 별반 나을게 없다.

세 번의 결혼 경력이 있는 라이프니츠의 아버지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윤리학을 가르치던 교수였다. 1648년 여동생 안나 카타리나가 태어나던 해 라이프니츠는 책상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다.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른 아버지와 그 자리에 함께 있던 고모는 아이가 다친 데 없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자, 이웃 사람을 서둘러 교회로 보내 신자들이 예배 후 감사의 기도를 올려 주도록 부탁한다. 아버지는 이 사건을 하느님이 아들 고트프리트에게 커다란 은총을 갖고 있다는 징표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교수는 훗날 자신의 아들이 철학자로, 또 외교관으로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55세 때 관절통으로 사망한 것이다. 그때 꼭 6살이던 라이프니츠는 아버지의 죽음이 가져온 충격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한다. 이제 자신이 의지할 곳을 잃어버렸다고 느낀 그는 그때부터 훗날 하노버 공 요한 프리드리히에게서 발견했던 것과 같은, 아버지를 대신할 권위의 대상을 찾기 시작한다.

아버지를 잃은 후 성격이 내성적으로 변한 소년은 독서에만 열중하였다. 그는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 책을 읽었다. 예를 들어 로마의 역사가인 리비우스가 저술한 책을 읽으면서, 책 속의 삽화와 글의 내용을 비교함으로써 라틴어를 터득하였다. 그는 곧 스파이처럼 글자들을 풀이해내고 결국엔 그 의미들을 파악해내었다.

중등학교 시절, 그의 학업 성적은 매우 뛰어난 편이었다. 급우들과 잘 어울려 노는 편은 아니었지만 친구들은 모든 지식을 별 어려움 없이 쉽게 익히고, 게다가 그것들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는 그의 재능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14살의 라이프니츠는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아직 어떤 경외감도 느끼지 못했다. 이 희랍 사상가의 논리학(삼단논법)에 몰두한 후, 그는 그것의 완전성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다.

삼단논법이란 추론 방식에 관한 이론이다. 삼단논법은 두개의 명제들로부터 논리적으로 정당한 세 번째의 명제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모든 생물은 죽는다(대전제).

라이프니츠는 하나의 생물이다(소전제).

그러므로 라이프니츠는 죽는다(추론, 결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같은 추론의 세 가지 근본형태(논리적 도식)들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비단 아리스토텔레스뿐만이 아니라 중세의 스콜라 철학자들 역시 이 추론 방식을 엄밀하게 지켜간다면, 논증들에서 일체의 오류들을 배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릇된 추론의 배제란 실제로는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논리적 도식들에는 쉽사리 잘못된 추론들이 끼어들 소지가 다분히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논증이 성립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거위 엠마는 죽는다.

따라서 거위 엠마는 인간이다.

하지만 어린 라이프니츠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그보다는 대전제에서 아직 입증되지 않은 주장이 다뤄지고 있고, 그 때문에 결론이 의문스런 전제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이의제기가 얼마만큼 타당한지는 ‘라이프니츠 역시 죽는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 앞서의 삼단논법을 잠깐 생각해봐도 충분하다. 그 논리적 도식의 대전제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생물은 죽는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의 생물들이 죽는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엄격하게 말하면, 그 명제는 확증된 지식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추정일 따름이다. 단지 논리적 비판에서만 참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간의 경험적인 탐구 역시 그 명제의 타당성에 의심을 제기하고 있다.

어떤 생물학자는 그 같은 형태의 명제를 거부할 게 틀림없다. 그는 박테리아는 분열을 통해 증가한다는 (언제나 여전히 타당한) 관찰을 들어 자신의 반론을 입증하려 할 것이다. 곧 다음과 같은 논증을 제시할 것이다. 죽음에는 사체死體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박테리아란 미생물에는 사체란 것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생물은 죽는다.’란 명제는 그것이 주장하는 만큼 의심의 여지없는 타당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소전제 또한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라이프니츠는 하나의 생물이다.’는 명제는 형식논리로 보자면 ‘괴테의 파우스트는 하나의 생물이다.’는 주장과 동일한 형태로 돼 있다.

그런데 우리는 라이프니츠는 실제로 생존했던 인물인 반면, 파우스트는 괴테가 상상으로 만든, 한 희곡의 작중 인물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이 같은 정보가 없다면 우리는 아마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 경우 두 인물 모두, 다시 말해 라이프니츠뿐만 아니라 파우스트 역시 실재했다고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회의적인 입장에 서서 둘 다 실재하지 않았다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곧 두 가지 주장이 타당한지 여부를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증명된 것처럼 보이는 결론은 의심스런 두 전제, 대전제와 소전제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천년 동안 철학자들은 논리학의 발전이란 더 이상 불필요하다고 여길 만큼 삼단논법에 대해 탄복해왔다. 라이프니츠가 비로소 처음으로 논리학의 진전이란 과제에 착수했던 것이다. 그는 새로운 형태의 증명방식, 무엇보다도 한 명제의 내용을 검증해줄 수 있는 증명방식을 발견하고자 했다. 그가 이 같은 시도를 하는 동안 수리논리학의 기초가 정립되었다.

그렇지만 라이프니츠가 이처럼 논리학의 위대한 창안자로 성장한 것은 아직 훗날의 일이다. 조숙했고 비상하게 머리가 뛰어났던 소년은 라이프치히에서 먼저 1661년에 14세의 나이로 대학에 입학함으로써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20세에 박사 학위를 받은 라이프니츠는 교수 사회에 진출하는 대신 비밀결사인 장미십자회薔薇十字會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는 무엇보다도 근대 과학이 태동돼 나오는 연금술 연구를 위해 조직된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실험실에 파묻혀 연금술 연구에 몰두하고, 나아가 회장 비서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한다. 하지만 몇 주 후 그는 그 직을 내놓고서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행은 마인츠에서 중단되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4년을 체류하였다. 마인츠의 한 여관에서 전직 장관인 요한 크리스찬 폰 보이네부르크와 친교를 맺게 된 것이다. 높은 교양과 많은 재산 그리고 여전히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전직 장관은 라이프니츠를 자신의 개인 자문관으로 채용하였다. 그는 라이프니츠에게 궁전을 출입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는 한편, 그를 부추겨 광범한 분야에 걸친 법률 개혁 작업에 관여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법률 체계의 개혁이라는 라이프니츠의 과감한 시도는 다른 부수적 활동 때문에 자주 지체되었다. 그의 후견인이자 외교관인 보이네부르크가 그를 정치 세계로 끌어들인 것이다. 물론 평민 출신인 라이프니츠는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정치분야에서는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실력자의 자문관 역할을 기꺼이 수행하였다.

그는 아주 이상적인 자문관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나름의 정치적 원칙들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주인의 정견政見을 그대로 수용하여, 논리학의 도움으로 보다 정교하게 다듬는 일이란 그에겐 매우 손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무사안일한 관리라든가 단순한 낙관주의자는 아니다. 다만 존재하는 것은 모든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 같이 질서 안에 있다는 그의 낙관적 믿음이, 훗날 마르크스가 보여준 바와 같은 사회관계에 대한 공격은 물론이려니와 그에게서 비판적 의식이 싹트는 것마저 가로 막은 것이었다.

그는 곧 자신의 주인을 위해 정치 상황에 대한 일련의 저술들을 기초해주고, 특히 유럽의 권력 관계를 분석해주었다. 이때 그는 프랑스가 머지않아 네덜란드와 독일을 공격할 것이란 어두운 전망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개인적으로는 전혀 이 같은 프랑스의 적의를 느끼지 못하였다. 오히려 사정은 그와 정반대였다. 프랑스 학술원으로부터 회원 가입을 제안받았던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저술한 몇 권의 수학, 논리학 저술들을 읽은 바 있는 이 유명한 학회의 학자들은 그가 마인츠에서 제작했던 계산기에도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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