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 그들의 깊은 사유와 ‘웃픈’ 삶 7 라이프니츠 (3)
라이프니츠, 컴퓨터 기술을 가능하게 만들다
3. 라이프니츠가 독신으로 산 이유
정치에 뛰어든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정세가 점점 긴박해지면서 기막힌 착상을 하게 되었다. 독일 대신 이집트를 공격하도록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설득하자는 것이다. 보이네부르크(마인츠 주교령의 수상 – 역자)뿐만 아니라 마인츠의 영주 역시 이 계획에 들뜬다. 세 사람은 마치 말장수들처럼, 루이 14세의 생각을 바꾸려는 자신들의 계획을 십자군 전쟁이란 그럴 듯한 이름으로 포장하기로 한다. 이집트와의 전쟁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과 서구 문화를 아프리카로 확장시하는 데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루이 14세를 설득하려는 것이었다.
사태가 더욱 긴박해짐에 따라 라이프니츠는 서둘러 자기 구상의 세부적인 작업을 하였다. 군사적 모험이 치러야 할 비용과 이집트를 차지했을 경우 왕이 차지하게 될 경제적 이익을 계산한다.
1672년 3월 그의 계획안은 절반 정도가 완성된다. 그것만으로도 왕을 현혹하기엔 충분할 정도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난관에 부딪치는데, 루이 14세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베르사유에 도착한 라이프니츠가 알현을 요청하자, 왕(“짐이 곧 국가이다.”)이 이를 수락하지 않는 것이다. 왕은 철학자에게 십자군 전쟁은 이제 유행에 뒤진 낡은 것이며 더욱이 자신은 당장 네덜란드에 선전포고를 할 계획이라고 통지한다.
이로써 라이프니츠의 “이집트 구상”은 마치 비눗방울처럼 무산되고 말지만, 그러나 그는 그 후로도 수 년 동안 파리에 체류하게 된다. 그는 처음 한동안은 베르사유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마인츠 궁의 이익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보이네부르크가 죽은 뒤부터는 그와 대성당의 도시[마인츠]와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진다.
라이프니츠는 재정적 어려움에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파리 학술원 가입마저 모종의 모함으로 좌절된다. 궁핍과 실망의 나날들이 계속된다.
그렇지만 그는 대체로는 자신의 처지를 만족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는 파리를 “사람들(학자들)이 자신을 특별하게 부각시키기가 쉽지 않은”, 유럽의 정신적 중심지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유럽 각지로부터 학자들이 이 대도시에 모여들었다. 프랑스의 상인들이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이용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믿고 있던 것이 그 이유였다. 상인들은 학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화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을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연구 자체를 위한 연구를 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학자들을 경제적 효용이란 관점아래 몰아세웠다. 이것은 오늘날에는 일반화된 원리이다.
라이프니츠는 주로 하숙집에 파묻혀, 오늘날 근대 철학의 창시자로 꼽히는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1596-1650)의 저서들을 탐독하는데 시간을 보낸다.
이 프랑스 출신의 철학자는 특이하게도 바이에른 군대에서 자원장교로 복무한 바 있으며 삶의 대부분을 네덜란드에서 철저한 은둔 속에 보냈다. “착하게 자신을 숨겼던 사람을 착하게 살았다.”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 또한 라이프니츠처럼 철학자이자 수학자이며 동시에 과학자였다. 또한 해석기하학이란 학문분야를 최초로 정립한 사람이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가 사물에 대한 관심을 자아에게로 돌렸다는 점이다.
단순하게 얘기하면, 데카르트는 회의를 방법으로, 인식의 도구로 철학 안에 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는 사유의 “흔들릴 수 없는 기초를” 구하면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물들에 대한 모든 견해들을 의심해볼 수 있다. 그 의견들은 거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지각들을 의심할 수 있다. 지각들 역시 꿈이거나 착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논리적 추론들에 대해서마저 의심할 수 있다. 그것들 역시 그릇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의심함으로써, 곧 사유함으로써 나는 다음의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 그것은 내가 의심하는 자 그리고 사유하는 자로서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사유의 흔들릴 수 없는 기초가 구해진다. “나는 사유한다(혹은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 같은 실재 증명은 철학자에게는 어떠한 이의제기로부터도 벗어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가 저 구석에 있는 의자에 대해서보다도 더 확실한 확신을 갖고서 자신의 실재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란 명제는 다만 내가 실재하는 동안에 있어서만 타당하다. 사유하기를 멈추는 순간, 자신의 실재에 대해서 더 이상 어떤 확실성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자아의 실재성을 이렇게 확인한 후, 데카르트는 이제 사물들(물질들) 또한 존재하며, 그래서 사물들에 관해서도 꿈이나 착각을 문제 삼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을 얻고자 했다. 그는 신을 끌어들여 사물의 존재 증명을 시도한다. 비단 데카르트만이 제시한 것이 아닌 이 증명 방식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내가 사유함으로써 실재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런데 사유하는 나는 내 안에 가장 완전한 존재(신)에 대한 관념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관념은 또한 타당하게(참으로) 사유된 것이다. 나는 그 관념을 명석하고 판명하게 사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 자신은 결코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에 완전성의 관념은 당연히 나의 사유하는 실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없다. 오히려 사유하는 실재가 완전한 존재로부터 주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내가 신을 명석하고 판명하게 사유할 수 있기 때문에, 신은 이 사유를 부여한 자로서 실재해야 한다.
따라서 개념상 완전하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선한 존재인 신은 실재한다. 그런데 인간을 기만하여 있지도 않은 사물을 마치 있는 양 믿게 하는 야비한 쾌락이란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만일 그처럼 인간을 속이는데서 기쁨을 느끼는 신이라면, 그 신은 위조된 신일 것이며 교활한 사기꾼일 터이기 때문이다. 가장 선한 존재인 신은 결코 그와 같을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눈앞에 있는 사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렇게 확신하는 것은 지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신이 실재한다는 것 그리고 신이 우리를 속이지 않을 것이라는 의심의 여지없는 통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물질(육체)과 정신을 초월적으로 구별한 철학자였다. 그는 정신적 영역과 물질적 영역이란 예를 들면 어떤 연관도 없는, 그래서 서로에게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는 상이한 두 세계와 같은 것이라고 믿었다.
데카르트의 이 같은 주장을 우리가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보통 정신과 사유, 의지가 육체를 지배하고 있고 또 거꾸로 육체가 자신의 상태에 관한 정보를 정신에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정신은 두 다리에게 걸으라고 지시하는 한편, 두 다리는 고통이 있으면 이를 정신에게 알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과 육체의 상호작용을 반박하는 데카르트는 그 대신 한 가지 이론을 제시한다. 그의 이론은 유명한 시계 비유를 통해서 가장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다.
두 개의 시계가 시간은 물론이고 또한 초까지 언제나 정확히 꼭 같다고 하자. 이는 다음 두 가지 이유 중 하나 때문이다. 두 번째 시계가 첫 번째 시계에 연결돼 있거나 아니면 시계 제작자가 애초부터 두 시계를 똑같이 움직이도록 조작해 놓았다. 후자의 경우에는 두 시계는 겉으로는 서로 연관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관하다. 이제 데카르트는 여기에 다음과 같은 적절한 설명을 덧붙인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무한한 정밀성을 가지고서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애초에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것들이 서로 연관된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단지 외관상 그럴 뿐이다.
어쨌든 이 논증은 배경이 이해될 때,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게 된다. 데카르트는 정신(사유)과 육체(연장)의 분리라는 문제를 통해서 철학의 중심적인, 동시에 오랜 주제를 건드렸던 것이다. 그것은 실체에 대한 물음이다.
실체 개념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변화하는 현상들, 말하자면 자연에서 보는 바와 같은 현상들이란, 그 자신은 결코 변화하지 않으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진행들을 무시간적으로 견뎌내고 있은 담지자(실체)의 속성들이다. 실체들이 이와 같을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독립적으로, 다시 말해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함이 없이 실재하기 때문이다.
이 프랑스인은 신을 도외시 한다면, 오직 물질(연장)과 정신(사유)만이 실체라고 규정했다. 그가 보기에 정신이 실체인 것은 다수의 물질들로 이뤄진 복합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정신에게 어떤 것도 덧붙일 수 없고 그리고 또, 마치 비료가 밭의 속성에 변화를 주듯이, 무언가를 덧붙임으로써 정신의 속성에 변경을 가할 수도 없다. 물론 정신 안에서의 표상들은 변화한다. 그러나 정신 자체는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신은 다른 사물들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 자신에 의해 실존하는 것이다.
정신과 육체의 분리로부터 데카르트는 역시 이해하기 쉽지 않은 또 한 가지 결론을 이끌어낸다. (물리학자로서) 그는 신이 영원 이래 우주와 지구의 운동의 총량을 미리 확정해놓았고,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동일하게 남아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의지를 통해 세계의 운동량에 어떤 영향도 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신이 애초에 확정해놓은 것보다 한 걸음을 더 걸음으로써 운동의 총량을 함부로 늘이거나 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통념과는 상치되는 것이다. 그리고 데카르트 또한 그의 명제를 입증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에 빠졌고, 그래서 결국 우리의 정신은 운동이 아니더라도 어쨌든 운동의 방향만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따라서 이제 최소한 앞으로 갈 것이냐 혹은 뒤로 갈 것이냐의 결정은 우리의 재량에 속하는 문제가 된다.
라이프니츠는 재정상의 이유로 4년 동안 머물던 파리를 떠난다. 요한 프리드리히 선제후選帝侯가 그에게 상당한 보수가 딸린 자문관과 사서司書 자리를 제시했던 것이다. 이때 라이프니츠의 나이 30세. 그는 수학자로서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카톨릭교와 개신교 사이의 화해를 위한 그의 제안은 로마에서까지도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이 같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금전적인 궁핍함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물론 그는 사교에도 능숙하고 또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도록 하는 요령도 있지만, 돈을 받는 대가로 연구 성과를 제공하는 일을 쑥스러워하는 소심함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외모가 또한 그로 하여금 스스럼없이 대가를 요구하는 식의 태도를 취하기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다. 무슨 말을 할 때나 그가 버리지 못한 작센 지방의 억양은 그에게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게다가 발음상의 한 가지 결함이 그를 낭패스럽게 만들었는데, ‘CH’와 ‘K’를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바람에 그는 본의는 아니지만, 강의를 듣는 청중들을 즐겁게 하였다.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외모를 불만스럽게 여겼다. 마르고 중간 정도의 키지만 목과 발이 몸에 비해 눈에 띄게 가늘고 긴 편이다. 긴 머리칼의 가발로 대머리를 감췄다.
그는 적당할 만큼 술을 즐기고 아침 5시면 어김없이 기상한다. 여자에 대해서는 기피하는 태도를 보였다.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성격이 아니기에 그가 과연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언젠가 그는 친구들에게 자기는 여자로부터 거절당하지 않을 확신이 설 때에만 사랑의 고백을 할 것이라고 내비친 적이 있다. 물론 이 같은 구애 방법은 여자의 사랑을 얻기에 바람직한 시작이 아님에 틀림없다. 그래서 결국 그는 데카르트나 칸트 또는 다른 철학자들처럼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다.
1676년 가을 라이프니츠는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하노버로 향한다. 하노버로 가는 도중 그는 영국과 네덜란드를 방문하였다. 런던은 1673년에 처음 방문해 그곳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가입했던 곳이다. 다시 이곳을 찾은 그는 영국인 경쟁자들, 특히 뉴턴의 논문들을 탐독한다. 그러나 고등 수학의 분야에서 영국인들이 이룩한 업적에 대한 그의 감탄은 몇 년 후 뉴턴의 후계자들이 그가 뉴턴의 미적분을 표절했다고 세상에 발표했을 때 크게 훼손된다. 그 후 미적분을 둘러싼 추악한 싸움이 벌어진다. 물론 여기서 승리한 사람은 독일인[라이프니츠]이지만, 그러나 그가 직접 이를 누리지는 못한다. 라이프니츠 사후 몇 년 후에야 비로소 미적분의 기초자란 영예가-또한 영국인들의 동의 속에서-그에게 돌아간 것이다.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라이프니츠는 한 철학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당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면서도 안경알을 세공하는 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으며, 형이상학과 성서 비평, 윤리학과 정치학의 분야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이룬 스피노자이다. 정신적으로 서로 강한 유대감을 느낀 두 사람은 끝없이 대화-무엇보다도 신의 실재를 증명하는 것이 가능한가와 증명가능하다면 그 방법은 무엇인가를 놓고-를 이어간다.
네덜란드인[스피노자]은 흔히 무신론자라고 불리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다. 그는 신을 자연과 동일시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연장延長이 신의 속성이라고 한다. 마치 육신이 인간에게 속하듯, 연장이 신에 속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세 종류의 실체를 얘기하는 데카르트와는 다르게 스피노자에겐 오직 하나의 실체, 신만이 있을 뿐이다. 신은 전체이자 자연이며 사유이다.
두 사람 사이 대화의 중심주제는 이른바 존재론적 신 증명이다. 가장 탁월한 존재의 실재를 증명하는 이 신 증명은 철학자 안셀무스(1033-1109)에게서 유래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가 이러한 방식의 증명을 사용했다. 특히 여기에 매료됐던 독일인[라이프니츠]은 더욱 탄탄한 형태의 논증으로 다듬는다. 세세한 점들을 무시한다면,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이란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라이프니츠는 신이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로서 사유돼야 한다는 점을 전제한다. 이 전제란 신은 전능하고 전지하며 지선하다고 하는 기독교의 신관神觀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어 그는 완전한 어떤 것은 실제로 실재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달리 말하면, 절대적으로 완전한 신은 우리 머릿속에 관념으로서 현존할 뿐만 아니라 또한 구체적인 실재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완전성”이란 개념 자체가 이미 “실재한다”란 속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실재’란 술어는 ‘완전한 존재’란 주어의 정의로부터 이끌어져 나오는 것이다.
원圓은 둥글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둥글다. 둥글지 않다면 그것은 원이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존재는 실재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실재한다. 완전한 존재가 단지 가능성으로서만 실재한다면, 그래서 실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면, 그것은 결코 완전한 존재가 아닐 것이다.
이제 여기서 “완전한 존재”란 개념에서 실재란 단어가 이끌어져 나온다는 것을 라이프니츠는 어떻게 해서 확신하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완전한 존재에게는 실재하지 않는 것보다 실재하는 것이 완전성에 부합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실재하지 않는 경우라면, 완전성은 하나의 결핍-실재하지 않는다-을 갖게 될 것이고, 이는 완전성의 개념과 상치된다. “완전한 존재인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란 명제는 그 자체 모순인 것이다. 결핍을 가진 완전성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이 완전한 존재인 한, 실재해야만 한다. 그리고 신은 완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신은 신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헤이그에서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 두 사람은 이 논증에 허술한 구석은 없는지 꼼꼼히 살핀다. 두 사람은 어떤 약점도 찾아내지 못했다. 신의 실재를 주장하는 이 증명은 이들에겐 반론의 여지가 없고 필연적인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