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 그들의 깊은 사유와 ‘웃픈’ 삶 14 헤겔(1)

변증법적 논리학을 창안한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 “그의 철학은 황제와도 같다”

다음의 주장은 게오르크 빌헬름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이 한 말이다. 한 위대한 인간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든다. 이 명제의 가장 좋은 증거는 바로 그 자신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오직 한 사람만이 나를 이해했다. 그러나 그 또한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한탄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그는 이해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약 150년이 훌쩍 지나도록 헤겔 연구가들은 이 독일 사상가의 진기하고 다의적인 저술들에 담긴 의미의 깊이를 헤아리며, “소외”, “매개”, “화해” 등과 같은 그의 개념들에 간직된 뜻을 캐내는데 고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칸트보다는 헤겔을 두고서 더 격렬하게 논쟁을 벌인다. 나아가 많은 학자들이 칸트보다는 헤겔을 더 중요한 철학자로 여긴다.

정치적 영향력을 놓고 본다면, 확실히 헤겔이 더 중요한 사상가임에 틀림없다. 헤겔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시조로 평가되고 있으며, 역설적이게도 파시즘에도 또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는 “변증법”이란 매혹적인 이름으로 유명해진 논리학을 발전시켰다. 그의 위대한 업적으로부터 가장 큰 성과를 거둔 이들은 무엇보다도 다음 세 사람들이었다.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 이들은 슈투트가르트의 관리 아들[헤겔]의 “변증법”을 혁명적 사고의 추진력으로 삼아 낡은 세계 질서를 뒤집었다.

그러나 헤겔의 역사적 영향은 그보다 훨씬 더 크다. 논리학 말고도 그의 다른 철학, 특히 역사와 법에 대한 이론을 담고 있는 철학은 또한 아돌프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자들과 같은 사람들의 기본 사상에 부합됐던 것이다.

“제3제국”이 시작되기 100년 전에 그는 이미 이렇게 선언했다: “독일 정신은 새로운 세계의 정신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의 목적은 절대 진리의 실현이다.”

나아가 그는 또한 – 책상에 앉아 – “국민들의 도덕적 건강성”을 진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평화의 안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써 비판했다: “세계사는 행복의 무대가 아니다. 행복의 시기들은 세계사의 여백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때는 조화의 시기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헤겔이 나치즘의 사상적 지주로 끌어올려졌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철학에서 극단적인 국가 숭배를 꾀했다는 점이다.

그 사상가가 보기에 국가는 신의 의지를 구현하고 있으며, 또한 그 때문에 개인들에 대해 절대적인 지배권한을 갖는다. 곧 헤겔에 따르면 국가는 “시민들을 위해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민은 국가를 “세속화된 신성”으로 숭배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국가 덕분에 인간인 바 그 모든 것일 수 있으며”, 또 “오직 국가를 통해서만 인간은” 그가 지닌 “모든 가치를 갖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국가는 어떤 “불평이나 질책”, 또한 어떤 비판에 대해서도 벗어나 있으며 자신에 대한 반발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있다. 달리 나치 정부와 관련지어 말하면, 이런 말이다. 히틀러 정권의 정치를 자신의 양심에 부합시킬 수 없는 독일인에게는 반항할 어떤 권리도 없다. 신적 이념을 표현하고 있는 국가는 어떤 개인적 도덕보다도 월등하게 우월하기 때문이다.

1945년 이후 헤겔은 독일에서 즉각 사상적 전범으로 분류됐다. 평화주의적 성향의 지식인들은 헤겔을 “독일 붕괴의 선도자”(Alfred von Martin), “윤리학의 교살”을 통해 스스로를 “완전한 부도덕자”로 입증했던, “명성 높은 오욕의 인간”(Kurt Hiller)이라고 비난했다. “헤겔과 그 추종자들”은 전후 지식인들의 가장 주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들 사상가들은 헤겔 비판가들 중 맨 끝줄에 선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전에도 이미 국가 철학자를 안중에 두지 않던 경쟁자들이 늘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셉 셸링(Friedrich Joseph Schelling, 1775~1860)이 청년시절 친구인 헤겔의 사상체계를 단도직입적으로 “지루한 성과”라고 불렀다. 또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헤겔을 두고 “보기 드문 천박함과 우둔함, 무감각으로 어쭙잖은 글을 썼던 평범하고 재능 없는 사기꾼”이라고 주장했다.

20세기의 탁월한 사상가인 버트런드 러셀은 철저한 연구 끝에 “(헤겔의) 거의 모든 이론이 오류”라는 확신에 이르렀다. 그리고 위대한 인식이론가 중 한 사람인 오스트리아의 사상가 칼 포퍼는 헤겔에 대해 “이성을 깎아내린” 사람이며, 그에겐 철학적 저술의 “재능이 전혀 없었다.”라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공박들은 수적으로 보면 상대에 비해 훨씬 많은 헤겔의 후예들을 조금도 동요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이들은 비판들을 슈바벤인[헤겔]의 적들이 얼마만큼 빈곤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여기면서, 사상가의 평판에 구애받음이 없이 세부적인 연구를 계속해간다.

이를테면 영국의 헤겔 전문가인 허치슨 스털링(Hutchinson Sterling)은 경외에 찬 마음으로 다음가 같이 기술했다. 독일 교수[헤겔]의 사상은 그것을 이해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리만큼 “심오하다.” 또 모든 뛰어난 것들의 숭배자인 스페인의 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e Ortega y Gasset)는 헤겔에 대해 이런 기념비적인 표현을 했다. “그의 철학은 황제와도 같다. 그것은 시저와도 같고 칭기즈 칸과도 같다.” 또 마르크스주의자인 에른스트 블로흐는 “앞으로 그 어느 때에도 헤겔이 거부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가톨릭 좌파이고 빈 대학의 교수인 프리드리히 헤어(Friedrich Heer)는 심지어 이렇게 공포했다. 헤겔은 “제7일의 철학자”이다.

또 사유의 거장 자신도 스스로를 그와 비슷하게 여겼다. 그는 대담하게도 자신의 작품이 “신의 사유”를 담고 있으며 “신의 자기 서술”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헤겔 이후의 어떤 다른 철학자도 더 이상 철학적인 저술을 쓸 수 없다. 그의 작품 안에서 신은 이미 전체의 진리, 절대적 진리를 전달했기 때문이다. 훗날 헤겔 연구가들이 표현했듯이 그의 철학은 “있을 수 있는 모든 철학들 중 가장 종국의 철학”(Arnold Ruge)이고 “세계 전체에 전적으로 타당한” 것이며, 헤겔은 “반박될 수 없는 세계 철학자”(Karl Ludwig Michelet)란 것이다.

칸트보다는 헤겔이 더 일반 사람들이 마음속에 그리는 독일 교수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폭넓은 지식과 실로 무한한 사유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또한 전문가들조차도 완전하게 소화해 낼 수 없는 문체를 통해 철학을 보통 사람들로서는 접근할 수 없는 지나치게 신비스런 학문으로 만드는데 일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놀라울 정도의 비굴함(Untertanengeist)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그의 이론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목숨을 담보로, 목숨을 바쳐 부패하고 전제적으로 보이는 사회질서를 전복하도록 부추기는 사이, 자신은 바로 그 이론을 이용하여 당시 반동적인 서구 국가들에서 명성을 쌓았으며 또한 자신을 “프로이센의 국가 철학자”로 떠받들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그가 “독일 관념론”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란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독일 관념론은 물질보다 정신적인 것(신, 이념, 개념)에 우위성을 두는, 나아가 물질이란 단지 어떤 비물질적인 것이 나타나는 한 방식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이다. 이 철학은 오늘날까지도 모든 문명 세계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분명 헤겔은 그가 받은 교육의 산물이다. 헤겔은 1770년 8월 27일, 슈투트가르트 재무관청에 근무하는 한 회계관리의 아들로 태어난다. 헤겔은 세 형제 중 맏이이다. 남동생은 어려서 죽었지만 여동생 크리스티아네는 헤겔보다 더 오래 산다. 그녀는 신경질환으로 고통을 받다가 1832년 자살한다.

여동생의 한 편지에는 헤겔이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특히 경건하고 교양을 갖췄던 그의 어머니는 하느님이 자기에게 신동을 보내주셨다고 믿는다. 그녀는 아들에게 큰 기대를 갖고서 학문적 재능을 키운다. 헤겔이 3살이 되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찌감치 학교에 입학시킨다. 게다가 그녀는 헤겔이 입학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개인교사들을 매일 집으로 불러 헤겔로 하여금 측량술과 같은 특수한 학문들을 배우게 한다.

헤겔은 부모들이 자신에게 걸고 있는 과중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모든 학과목의 수업을 손쉽게 따라가고, 나중에 김나지움 시절에는 8년 동안 학급 최우수의 자리를 지킨다.

그 결과로 헤겔은 급속도로 방구석에 박혀 사는 사람으로 바뀌어 간다. 동료들과 잘 어울려 놀지도 않지만, 그가 장난을 치는 일이란 더욱이 찾아보기 힘들다.

철학자 쿠노 피셰(Kuno Fisher)같은 우호적인 헤겔 전기 작가조차도 어린 헤겔의 성격에는 “편협하고 노인다운 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15세의 헤겔이 이성에 대한 동료들의 관심에 대해 보인 격렬한 반응이 그것인데, 그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어 놓고 있다. “남학생들이 여학생들과 소풍을 가서는 그곳에서 천박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낸다.”

1788년 헤겔은 김나지움을 졸업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학생으로 입학이 결정된 튀빙겐 대학으로 향한다. 그 사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바람대로 개신교 신학자가 되려고 하였다. 그는 5년 동안 “튀빙겐 신학교”에서 생활한다. 예전에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원이었던 이곳은 그 후 곧 전설들이 얽히게 된다.

250년 된 낡은 대학 건물에서 헤겔은 두 명의 대학생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들 중 한 사람은 나중에 중요한 철학자가 되고 다른 한 사람은 유명한 시인이 된다. 바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셉 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Schelling)과 프리드리히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이다.

세 명의 학생들 사이에서 우정이 싹텄다. 우정의 덕을 가장 크게 본 사람은 헤겔이다. 특히 이미 재능을 나타내고 있던 셸링은 신입생에게 청년다운 활기를 불어넣어 주려고 애쓴다. 그때 잠자고 있던 도시 튀빙겐을 흥분시키기도 한 하나의 사건이 셸링을 도와준다.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제3신분”인 민중이 귀족과 성직자들을 상대로 봉기한 것이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은 튀빙겐의 삼인조를 열광 속에 몰아넣었다. 심지어 헤겔마저도 자신을 잊고 도취되었다. “자유, 평등, 박애”란 혁명의 구호는 그의 정신을 한껏 고무시킨다. 그는 열렬한 심정으로 사회질서 변혁을 위한 학내 정치 클럽에 가입하기도 하며, 파리 봉기로부터 유럽의 도덕적 거듭남을 열망한다.

그러나 헤겔이 프랑스 혁명을 통해 얻은 것은 무엇보다도, 나중에 그의 철학의 주도적 사상을 형성하기도 한 다음과 같은 깨달음이다. 그는 인류의 역사란 직선적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동태적 원리, “변증법”을 따른다고 파악한 것이다. 역사는 사건들의 추이 속에서 영원한 변화와 변동, 모든 모순들을 지닌 채 끊임없이 지속되는 부침만을 꾀할 뿐이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시민들은 자유의 이념을 관철하기 위해 왕을 타도하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도리어 새로운 형태의 공포정치이다.

이제 혁명에 대한 헤겔의 감격은 이같은 인식 앞에서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그는 다시 지배권력을 상대로 한 모든 저항에 냉담한, 예전의 실용주의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그는 전 유럽에서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선구자로 추앙받는, 제네바 출신의 사회철학자이자 교육학자인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작품들에 여전히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헤겔은 또 “프로이센의 국가철학자”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특이하게 해마다 한 병의 포도주와 함께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을 기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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