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고인이 된 조철수 박사는 수메르와 히브리 신화에 정통한 학자였다. 저번에 소개한 《메소포타미아와 히브리 신화》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와 히브리 신화의 관계를 다루었다면 이번에 소개할 책은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한국 신화의 관계를 다룬 것이다. 저자는 환웅과 단군 및 주몽과 김수로의 건국 신화 및 고려의 창건자 왕건의 조상들에 관한 신화 등에서 모두 외부에서 들어온 신화의 요소들 — 학자들은 ‘신화소神話素’라 부른다 — 이 있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말해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들이 중앙아시아나 인도,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와 한국의 신화들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저자의 이러한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 힘들겠지만 신화를 연구한 학자의 주장이니 한번 경청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새겨진 한국신화의 비밀》은 저자가 여러 잡지에 기고한 13개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글에서는 울산 천전리 암각화를 다룬다. 울산의 이 암각화는 1970년에 동국대학교 불교유적 탐사단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어 현재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선사시대 암각화이다. 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변의 암벽에 새겨진 이 암각화는 언제 새겨진 것인지 알 수 없다. 저자는 신석기 시대로부터 청동기 시대에 걸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한다. 겹물결무늬, 겹마름모 무늬, 동심원 무늬 등 추상적인 문양 뿐 아니라 사슴과 개, 용, 사람의 형상도 그려져 있다. 바위 하단부에 신라시대의 사람들이 새긴 한자로 된 명문이 있는데 당시에는 이곳이 사람들이 유흥을 위해 즐겨 찾던 명승지였던 모양이다.
조철수 박사는 이 암각화에서 먼저 용의 그림을 주목한다. 그는 상상의 동물 용은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하였다고 본다. 메소포타미아의 유명한 창조신화 「에누마 엘리쉬」에서 용이 나오기 때문일까? 이 신화는 바빌론의 주신인 마르둑이 바다의 여주인 티야마트를 물리치고 승리한 마르둑 찬가이다. 티야마트 여신은 사자, 사나운 개, 전갈, 큰 물고기, 황소 및 털 많은 용사들 그리고 바다의 뱀들을 낳아서 마르둑과 싸우게 하였다. 바다의 괴물인 바다의 뱀들에게 피 대신 독을 채우고 눈이 부신 광채를 입혔다. 이 바다의 뱀들이 용이었다. 동양에서는 용이 군주를 상징하는 짐승으로 신성시되었지만 〈에누마 엘리쉬〉에서는 티야마트 여신이 낳은 괴물로 그려진다. 이러한 용의 모습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원통형 인장들에서 더러 발견되며 또 바빌론의 이슈타르 성문의 벽화에도 나타나 있다.
저자는 메소포타미아의 용이 인도와 인도네시아, 중국의 해안 지역을 거쳐 전파되어 종국에는 한반도 남쪽의 울산 천전리 암각화에도 등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저자는 그 외에도 천전리 암각화에 등장하는 동심원, 연꽃무늬 등이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물론 태양을 상징하는 동심원 무늬는 여러 문화의 유적들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인데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좌우간 조철수 박사는 고대 근동의 신화소들이 한국의 고대 신화와 암각화 등에 등장하게 된 것은 고대 중동 문화가 초원길과 해양을 통해 동쪽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으로 본다. 특히 페르시아 만과 인도 및 중국 남해안을 연결하는 해상무역로가 중요한 전달경로였다고 생각한다. 이는 아유타 국의 공주 허황옥과 혼인한 김수로 왕의 신화는 말할 것도 없고 더 나아가 무속인들 사이에 전해지는 무가巫歌 바리공주 신화에서도 입증된다고 한다.
다음으로 저자가 주장하는 신화는 별자리와 관련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찍이 천문학이 발전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도 서양에서 점성술에 사용되는 황도십이궁 — 영어로는 ‘조디악zodiac’이라고 하는데 이는 작은 짐승을 뜻하는 그리스어 ‘조디온’에서 온 말이다 — 은 바빌론으로부터 그리스인들이 배워온 것이다. 태양이 운행하는 경로에 위치한 12개 별자리인 황도십이궁 가운데 황소자리(타우루스)와 처녀자리(비르고)가 있다. 수메르 신화의 인안나와 두무지 신화에서 반년씩 떨어져 지내야 하는 두 남녀를 이 두 별자리가 상징한다. 이는 동양의 견우와 직녀의 전설과 마찬가지이다.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춘분에 떠오르는 황소자리가 추분까지 밤하늘에 떠 있다가 사라지는 천문현상을 이러한 신화로 설명했다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천문 신화가 동양에 전해져 견우직녀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저자는 황도대가 오늘날과 같은 열두 별자리로 확립된 것은 BCE 15세기경 고대 바빌론 시대 말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러한 황도12궁이 한국에도 유입되어 십이지신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흥미롭기는 하지만 십이지신이 황도12궁과는 달리 달을 나타내기보다는 하루의 시간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 것으로 보아 저자의 주장은 좀 더 검토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음으로 저자는 《삼국유사》에 실린 소위 단군신화를 논한다. 저자는 단군신화를 배달국과 고조선의 건국이라는 사건이 반영된 건국사화라는 관점보다는 단군을 조선의 수호신으로 믿는 종교적 의도에서 서술된 태초 역사로 본다.(99쪽) 단군신화를 세상에 질서를 가져오기 위해 노력하는 환웅 이야기와 환웅의 아들 단군이 산신이 되는 저승 신화가 결합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환웅은 인간 세상에 질서를 가져다준 문화영웅이었으며 단군은 왕의 자리에서 내려온 후 산신이 되어 민족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된 인물이라 하였다. 물론 민간에서는 오래전부터 단군을 신격화시켜 숭배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건국의 영웅을 신격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터인데 저자는 단군이 산신이 되어 조선 민족을 지키는 저승신의 역할을 했음을 강조한다. 수메르 신화의 전문가인 저자가 보기에 단군은 대홍수로부터 인류의 멸종을 막은 수메르의 지혜의 신 엔키와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저자는 한국의 용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동쪽으로 전파되어 들어온 신화소라 본다.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하여 서양에서는 용이 괴물로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와 중국 등 동양에서는 군주의 상징이 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긍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러한 상반된 이미지를 갖게 된 것에 대해서 필자는 어떠한 설명도 본서에서는 찾아보지 못했다.
》삼국유사》에는 처용이 용왕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처용은 역신을 물리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려 태조 왕건의 할머니도 용왕의 딸이었다고 한다. 이는 《고려사》의 맨 앞부분에 나오는 왕건 조상들의 이야기를 담은 〈고려세계高麗世系〉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당나라로 배를 타고 가다가 바다에 뛰어들어야 하는 처지에 빠지게 되었는데 용왕을 만나 그의 부탁을 들어주고 그 대가로 그 딸을 얻었다는 것이다. 남편 작제건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용녀는 다시 용이 되어 바다로 돌아갔다. 그러나 작제건과의 사이에 네 아들을 낳았는데 그 장남이 용건龍建이다. 용건은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대사와 알게 되었는데 도선대사가 지시하는 대로 집을 지어 성자聖子 왕건을 낳게 되었다. 용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들어진 상상의 동물이므로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고려 왕가의 탄생 신화도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영향을 받은 셈이다.
저자는 병에 걸린 아버지 오구대왕을 치유할 약을 구하러 서역을 넘어 저승까지 내려간 바리 공주 이야기도 수메르의 길가메쉬 서사시의 내용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본다. 우루크의 왕 길가메쉬는 영생을 가능하게 하는 불로초를 얻기 위해 저승까지 내려갔다 돌아온 인물로 죽어서는 저승의 신이 되었다고 한다.(299쪽) 그러나 〈길가메수와 엔키두의 저승여행〉이라는 서사시에서는 길가메쉬가 저승에 갇힌 친구 엔키두를 구하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가려 했지만 엔키가 엔키두의 혼을 저승에서 불러오게 만들어 길가메쉬와 만나게 하는 것으로 저승여행을 대신하게 만든 것으로 나온다. 좌우간 바리 공주 이야기가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는 데에는 저승여행이라는 모티브가 작용하였던 것 같다.
한국의 신화를 다소 무리하게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연관시키려 하는 본서에서 필자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부분은 한글이 히브리 문자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을 펼치는 맨 마지막 장이다. 주지하다시피 세종이 창제한 한글 즉 훈민정음은 옛 전자篆字를 본따서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이는 한글을 해설한 책인 《훈민정음》의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서 ‘옛 전자’〔古篆〕라는 문자가 어떤 글자를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한자의 전서篆書, 산스크리트 문자 혹은 몽골문자 등 여러 주장들이 제기되어 왔다. 필자가 보기에 중국 한자의 한 서체인 전서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한글의 모양이 한자의 전서와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히브리어를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로마제국이 예루살렘을 파괴한 이후 유대인들은 세계 도처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고 하는데 중국에도 그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적어도 당나라 때부터 중국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아랍인 여행자의 기록에 의하면 황소난(879)으로 광저우에서 12만 명의 아랍인과 유대인, 기독교인, 페르시아인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페르시아 만에서부터 중국에 이르는 바닷길이 예전부터 무역활동에 널리 이용되어 왔던 것을 생각해보면 상업활동에 주로 종사한 유대인들이 중국까지 들어오게 된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당나라 때 유대교를 청진교淸眞敎라 했고 그들의 회당을 청진사淸眞寺라 했다. 전성기에는 수만 명에 달했던 유대인들이 살았는데 그들은 히브리 문자를 가르치는 서적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조철수 박사는 그 책의 이름이 《창조서創造書》라고 한다. 이 책은 서기 200-400년경 팔레스타인에서 쓰여졌는데 유대교 신비주의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359쪽) 이 책을 중국 유대인들이 한자로 번역하여 갖고 있었던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조철수 박사는 놀랍게도 《환단고기》에 나오는 가림토 문자가 히브리어 문자를 모방해 만든 것이라 한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는 고조선의 3세 가륵 단군 때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환단고기》 연대에 의하면 BCE 2181년 때의 일이다. 그 때 만든 글자가 가림토加臨土라는 문자이다. 조철수 박사는 《단군세기》가 몽골 지배기에 고려의 민족주의가 고양되던 분위기 속에서 행촌 이암이 쓴 책이라는 것은 받아들이지만 가림토 문자를 가륵 단군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중국 유대인들의 히브리 문자를 참고하여 고려 때 만들어진 문자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가림토 문자를 세종과 그 밑의 집현전 학자들이 참고하여 만든 것이 한글이라는 주장이다. 한글이 가림토 문자와 아주 비슷한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국어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단군세기》가 고려 말의 인물인 행촌 이암이 썼다는 사실부터 의심한다. 그러나 아주 오랜 고대 문자가 아니라 중세나 근세에 만들어진 문자의 발명에서는 일반적으로 기존의 다른 문자들을 참고하여 만든 경우가 많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한글도 예외가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 형태상으로는 한글은 산스크리트 문자나 몽골 문자보다는 히브리 문자에 더 가깝다.
조철수 박사는 히브리어 알파벳이 페니키아 문자처럼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약화체로부터 기원하였다고 본다. 약화체(hieratic)는 상형문자가 너무 그림과 같아 쓰거나 그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쓰기 편하게 고안된 문자이다. 일종의 필기체인 셈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어가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나오고 히브리어를 모방하여 가림토 문자가 나왔으니 한글은 고대 이집트 문자의 증손자쯤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재미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조철수 박사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새겨진 한국신화의 비밀》은 한국의 고대 신화들 그리고 한글의 창제에도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화가 영향을 크게 미쳤다고 본다. 그의 이러한 과감한 주장들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거나 무시해왔다. 그러나 기존의 주장들과 다른 주장을 펼친다고 해서 무조건 거부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특히 문헌으로 확실하게 입증이 어려운 고대사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는 상상력이 동원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때문에 다양한 가설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가설들 없는 고대사는 가능하지 않으며 가설들의 경쟁 속에서 역사학은 발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