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프로이센에 내려앉은 세계이성
헤겔 변증법은 존재-무-생성이란 근본 개념들에 상응하여 3단계의 틀로 이뤄져 있다. 이 세 근본 개념들로부터 그밖의 다른 모든 개념들이 발전돼 나온다. 그뿐만이 아니라 세 개념들은 동시에, 별들의 운행에서부터 인류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세계 과정을 지배하는 총체적 원리를 형성한다.
헤겔은 한 예를 통해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설명해준다. 모든 꽃봉오리에는 그 꽃봉오리의 변화를 야기시키는, 다시 말해 꽃봉오리를 존재 속에 머물게 하지 않는 하나의 힘이 간직돼 있다. 꽃봉오리는 오히려 무로 떨어진다. 그렇지만 꽃봉오리 대신, 헤겔이 “더 우월한 성질”이라고 표현한 꽃이 생겨난다. 그러나 꽃에도 이미 “부정(否定)”이 숨어 있다. 부정의 힘이 꽃에서 열매가 생기도록 함으로써 꽃을 사라지게 한다. 이때 열매는 다시금 더 우월한 단계를 뜻한다.
변증법적 과정에서 내모는 힘(부정)은 자기 자신을 의식하려고 하는, 자신을 전개하는 정신(신)이다. 정신은 자연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자신으로부터 외화外化되어 있다. 그렇지만 정신은 생명 없는 질료 안에서 소멸되는 게 아니라 식물, 동물, 인간으로 이뤄진 세 단계를 거치면서 자신을 끌어올려 다시금 자연을 넘어선다.
이제 생성하는 신은 인간의 의식에서 인식하는 정신(또는 인식하는 이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3단계의 변증법적 보행步行이 새롭게 시작된다.
이렇게 볼 때, 헤겔의 체계는 3가지 주요 부분으로 나뉜다. 즉자적卽自的이고 대자적對自的인 이념에 대한 학문, 말하자면 세계 창조에 앞선 신의 생각을 사유하는 논리학, 타자적他者的 존재(달리 있음)로 있는, 즉 외화되어 있는 이념에 대한 학문인 자연철학, 그리고 마지막으로 외화로부터 그 자신으로, 즉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 이념에 대한 학문인 정신철학.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인 정신철학의 가장 낮은 단계는 개별 인간에 상응한다. 개별 인간에게 있어 생성하는 신은 아직 “주관적인 정신”이다. 이에 반해 가족, 사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기초를 이루는 생성하는 신은 “객관적” 형태를 갖는다. 이때 국가는, 헤겔 변증법의 틀에 따르면, 개별 인간보다 “더 우월한 성질”을 의미한다. 국가는 주관적인 도덕과 자신의 특수한 욕구를 가진 개인과는 대조적으로 객관적인 법의 구현이기 때문이다.
생성하는 신은 예술과 종교, 철학 안에서 발전의 최종 단계에 이른다. 이 영역들에서 생성하는 신은 자기의 이성을 “절대적으로” 실현한다. 그래서 헤겔은 최종 단계의 신을 또한 “절대적 정신”이라고 부른다.
정신이 예술과 종교, 철학에서 궁극의 단계에 이르는 것은 이 영역들이, 특히 철학이 모든 학문들보다 우월하게 세계의 대립들을 화해시키고 이들을 조화로운 전체로 변화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곧 예술 등 세 영역들의 목적은 전체 진리와 이성 그리고 그와 함께 자유의 전개라는, 생성하는 신의 목적에 상응한다.
『정신현상학』과『논리학』이란 두 작품은 헤겔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1816년이 돼서야 비로소 헤겔은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로 임용된다. 헤겔의 교수 임용이 이렇게 늦은 것은 애매하고 이해하기 힘든 그의 문체 탓이다. 대학의 총장들은 그가 학생들에게 무리한 이해력을 요구하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다. 헤겔은 8년간 김나지움의 교사로 강의한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비로소 그같은 의구심들을 지울 수 있게 된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있는 동안 헤겔은 『엔치클로페디(Enzyklopädie der philosohischen Wissenschaften)』를 출간한다. 철학적 관점 아래에서 당대의 총체적인 지식을 기술하고 정리한 책이다. 헤겔은 자신의 생활에 만족한다. 네카어강변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삶”을 그는 흡족하게 여긴다. 한 일화에 따르면, 그는 몇 시간 동안을 산책하면서 구두 한쪽을 잃어버리고도 전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자신의 사유에 골몰한다.
그렇지만 하이델베르크 생활은 그의 삶에서 ‘막간극’일 따름이다. 1818년 드디어 그는 베를린 대학으로부터 교수 초빙을 받고, 철학자 요한 고트리프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의 후임 교수가 된다.
이때 그의 나이 48세이다. 그제야 그는 비로소 고액의 연봉(2,000 탈러의 연봉)을 받게 된다. 그는 처음에는 가족과 함께 라이프치히가街로 이사하고, 나중에 다시 학교에서 4천2백보 떨어진 쿠퍼그라벤에 있는 집으로 옮긴다.
베를린에서의 생활은 헤겔에게 행복감을 안겨주었다. 도시에는 약 18만 명의 주민이 거주한다. 당시 한 사람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240분이면 이 수도를 다 둘러볼 수 있다”. 쿠퍼그라벤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은 도시의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이다. 슈프레 강의 한 지류에는 배들이 미끄러지듯 떠다니고, 큼직한 분수가 있는 공원은 산책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비록 그의 강의는 갈수록 더 어려워지고 있지만 헤겔은 이제 수강생의 숫자가 적은 것에 대해 더 이상 불평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주당 약 10시간씩 강의한다.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소령들, 대령들, 추밀고문관들”이 그의 강의를 들었다. 그의 명성은 높아가고 당대의 지도적 인사들이 그를 방문한다. 베를린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철학의 독재자”라고 부른다. 헤겔은 어떤 이의제기들이나 의심도 용납하지 않을 만큼 자기 이론의 참됨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무렵 헤겔의 주요한 관심분야는 법과 역사이다. 이 연구의 결과는 『법철학 강요(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와 『역사철학강의(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란 저술 안에 정리된다. 그는 여기서 오늘날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명제를 선언한다.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다.”
이때 그는 이성 개념을 개별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다시금 생성하는 신으로 이해하고 있다. 생성하는 신은 진리와 오류가 맞서 투쟁을 벌이는 세계사의 피로 얼룩진 법정을 자신의 이성을 관철시키는데 이용한다. 그렇기에 “세계사의 주된 내용은 이성적이며 또 이성적이어야 한다.”
이 철학자는 세계사에서는 또한 비이성적인 힘들이 승리하기도 한다는 반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의 기교를 부려 물리친다. 그는 이성이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곧잘 이용하는 “이성의 간계”에 대해 말한다. 이런 뜻이다. 역사에서 천인공노할 불의가 득세하는 시대는 생성하는 신이 자기실현으로 가는 길에 거치는, 말하자면 단지 우회로일 뿐이란 것이다. 따라서 승리하고 성공하는 것은 언제나 또한 이성적이다란 말은 원칙적으로는 타당하다. 그것은 절대 이성의 진로에서 한 걸음의 전진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관이 헤겔로 하여금 세계 이성을 항상 권력이 승리를 구가하는 곳에 옮겨 놓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는 나폴레옹이 세계정신의 육화肉化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다가, 그가 패배하자 이번에는 세계이성이 방향을 바꿔 프로이센 국가로 내려앉은 것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헤겔은 대뜸 프로이센을 신적 이성의 최종 단계로 간주한다. 그는 세계정신이 프로이센에서 자신의 목적, 즉 절대 진리의 전개를 달성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철학자는 또한 국가를 찬양하는 한편 시민들에게 주관적 바람과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란 아주 사소한 존재라는 점을 주지시키는 일에 진력한다. 오직 “국가의 시민”이란 자격으로만 시민에게 의미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헤겔은 또한 1819년 3월 23일 칼 루드비히 잔트(Karl Ludwig Sand)란 대학생이 작가인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August von Kotzebue)를 살해한 이후에도 프로이센 국가에 대한 숭배를 거두지 않았다.
이 사건은 독일 역사에서 비극적인 한 획을 그은 사건이다. 가까스로 지속되던 자유화가 이를 계기로 완전히 좌절되고 말았던 것이다. 정부는 칼스바트에서 언론의 자유를 폐지하고 정치적으로 의심스러운 교수들을 해직시키기로 결정한다(칼스바트 결의). 독일 동맹에서 비판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다.
헤겔은 정부 편에 선다. 한 동료 교수가 정치범 잔트의 어머니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는 이유로 해직 여부가 당국의 결정에 맡겨지게 되자, 헤겔은 이를 지지한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그는 자신의 학문적인 적대자를 제거할 목적으로 정부와의 관계를 이용하기조차 하였다. 프리드리히 에두아르트 베네케(Friedrich Eduard Beneke)란 강사는 헤겔의 이론을 전혀 대단한 것으로 보지 않는 것 때문에 강사 자격을 잃게 되었다.
슈바벤인人[헤겔]은 13년간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는 총장이 되고, 그리고 곧 사람들은 그를 “프로이센의 국가 철학자”라고 불렀다. 그의 영향력은 독일의 다른 대학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생성하는 신, 세계 정신에 대한 자신의 이론이 거의 모든 철학과의 수업계획에 포함되도록 만들었다.
전혀 예기치 못하게 그는 1831년 11월 14일 죽었다. 그의 사인은 콜레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죽음은 자고 있는 그를 엄습하였던 것이다. 그의 시신은 전염의 위험 때문에 “콜레라 묘지”에 묻히게 되어 있었지만, 영향력 있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는 오라니엔부르크 성문城門 앞에 있는 도로텐 시립묘지에서 마지막 안식을 얻었다.
서구 철학에서 그는 한편으로는 그때까지 사유의 전 역사를 자신의 체계 안에 담고 한 시기를 종결시킨 아마도 가장 포괄적인 사상가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뒤이은 거의 모든 위대한 사상가들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친 출발점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