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신고三一神誥」의 수행(4)
귀환歸還의 상향도–성명쌍수性命雙修 (2)
수행의 2단계는 오염된 몸의 정화淨化 및 정단精丹을 만드는 과정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몸을 구성하는 근본根本을 닦는 것인데, ‘신의 마음’이 시공時空 안으로 들어와 전환된 진실한 세 가지, 즉 ‘성性ㆍ명命ㆍ정精[삼진三眞]’이다. 그런데 ‘삼진’에서 ‘성’과 ‘명’을 닦으면 ‘정’이 스스로 닦이는 것으로 간주看做된다. 왜냐하면 ‘정’은 ‘성’과 ‘명’의 중도적인 융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진’을 닦는다는 것은 곧 전통적인 수행문화에서 말하는 ‘성과 명을 짝으로(함께) 닦는다[성명쌍수性命雙修]’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명쌍수’는 참된 수행의 법도法道이다. 여기에서 ‘닦는다[수修]’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사전적인 의미에서 ‘다스리다’, ‘고치다’는 뜻이지만, ‘성’과 ‘명’의 본질을 발전적으로 깨달아 고쳐서 높은 경지에까지 올려놓음을 함축한다. 그래서 ‘성명쌍수’는 몸 안에 내재된 ‘성’과 ‘명’이 어떤 방식으로 성립하는가의 존재방식存在方式과 그 본질을 깨닫는 것, 즉 ‘성’과 ‘명’의 존재근원을 철저하게 통찰하여 즉자적卽自的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전진도全眞道의 창시자인 왕중양王重陽은 “인간이 성명에 달통하는 것, 이것이 곧 참된 수행의 법도이다.(人了達性命者 便是眞修行之法也)”(『重陽眞人今闕玉訣』 『中華道藏』 제26책 284쪽)라고 했다.
그럼 먼저 ‘성性’을 닦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몸 안에 내재된 ‘진성眞性’의 존재방식과 그 본질을 달통達通하는 것인데, ‘진성’의 존재방식은 조화신造化神이 내려와 머리 부분의 상단전上丹田 안착해 있는 것이다. 그 본질은 바로 ‘선한 마음[性善]’이다. 여기에서 ‘선한 마음’이란 인간의 감성의식에서 비롯하는 윤리적인 의미의 ‘착하다’, ‘선하다’의 뜻을 넘어서 ‘신의 마음’이 시공時空 안으로 들어와 전환된 자연 그대로의 본성本性을 말한다. 이는 동양철학의 전통에서 말하는 본연지성本然之性, 즉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단四端에 비견比肩될 수 있을 것이다.
‘성’에 대한 깨달음의 과정은 감성의식에서 튀어나오는 유동적인 모든 잡념을 비우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무의식[無意識]에 쌓여 있던 관념들마저도 모조리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내어 말끔히 털어내는 것이다. 이는 마음을 감성적인 어떠한 환경이나 조건에서도 깨끗하고 고요함[淸靜]으로 지속되는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적정寂靜한 경계로 올려놓기 위해서다. 전통적인 수련방식에서 볼 때, 이는 좌선坐禪 혹은 명상수련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해서 「삼일신고三一神誥」는 요동치는 감성의식을 완전히 멈추게 하는 ‘지감止感’의 수련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감성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연의식自然意識에로의 입경入境한 마음이 그것이다.
그러나 ‘지감’만으로는 ‘진성’에 대한 자각自覺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몸이 감각을 통해 외물外物을 접하게 되면, 인간의 마음은 단박에 요동치는 감성의식으로 매몰埋沒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성’을 온전하게 자각하기 위해서는 자연의식에 입경入境한 마음은 질적인 도약跳躍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집중적인 수련을 통해 닫혀있던 ‘신령한 마음’, 즉 영대靈臺를 여는 것이다. 닫혀있던 영대를 여는 중요한 열쇠는 수행 가운데 태을주太乙呪와 시천주侍天主 주문수행呪文修行이 으뜸이다. 왜냐하면 ‘태을주’와 ‘시천주’는 근원의 진리를 여는 뿌리주문이기 때문이다. ‘영대’가 열려야 영적인 의식[영식靈識]이 발현發顯하게 되고, 이로부터 ‘진성’이 온전하게 자각되는 것이다.
영대가 열림으로써 자각된 ‘진성’은 생멸하는 모든 감성의식이 끊어진 부동의 항심恒心에 머물게 되고, 진실로 생사生死에 흔들림이 없는 ‘고정된 마음[정심定心]’을 항상 유질할 수 있다. 그러한 ‘진성’의 정체성正體性은 곧 ‘신의 마음’과 같은 경계에 머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단군세기』 서문은 ‘진성’을 “천신天神과 더불어 그 기원을 같이하는[與天神同其源]” 것으로 표현한다. ‘천신’과 기원을 같이하는 ‘진성’이야말로 ‘신의 마음’이 들어와 ‘삼진’으로 전환되기 직전의 신, 즉 몸에 잠들어 있는 ‘원신元神’을 깨울 수 있다.
‘원신’은, 인간의 개별적인 생명이 잉태될 때, 그 몸에 들어와 머리 부분의 상단전上丹田에 안착해 있는데, 몸의 생장과 더불어 감성의식이 싹이 트면서 그 활동이 점차 침잠沈潛하여 잠들게 된다. 만일 몸에 잠들어 있는 ‘원신’이 집중적인 수행을 통해 깨어나게 된다면, 자각된 ‘진성’은 곧 ‘신의 마음’과 소통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자각된 ‘진성’은 곧 천신天神의 마음이고, 대자연의 마음이요 우주의 마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인간은 모든 감성의식을 초탈하여 삶과 죽음의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명’을 닦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몸 안에 내재된 ‘명’의 존재방식과 그 본질을 스스로 깨우치는 것인데, ‘명’의 존재방식은 교화신敎化神이 내려와 가슴부분의 중단전中丹田에 안착해 있는 것이다. 그 본질은 곧 ‘맑은 기운[淸氣]’이다. ‘맑은 기운’은 통속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깨끗한 기운’ 혹은 ‘탁하지 않은 기운’이란 뜻을 넘어서 ‘신의 마음’이 시공 안으로 들어와 전환된 자연 그대로의 ‘본명本命’이다. 이는 동양철학의 전통에서 말하는 천명天命, 즉 진리의 사명使命이나 수명壽命에 비견比肩될 수 있을 것이다.
‘명’에 대한 깨달음의 과정은 호흡呼吸을 통해 ‘본명’을 깨닫는 수련이다. 여기에서 호흡은 자연의식, 즉 자연스런 마음[自+心=息]에서 쉬는 숨이다. 자연의식에서 인간은 호흡을 통해 몸에 있는 탁한 기운[氣]을 정화하고 맑은 기운을 활성화하여 생명을 유지한다. 즉 호흡은 기본적으로 기혈氣血의 순환을 원활하게 하여 생명활동으로 인해 쌓인 노폐물(이산화탄소)을 배출하여 생명의 기운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삼일신고」는 자연의식에서 균형 잡힌 숨결을 통해 심신의 안정을 유지하면서 ‘기혈’이 조화롭게 운용될 수 있도록 하는 ‘조식調息’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조식’만으로 ‘진명’이 온전하게 자각된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명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외물外物에 접촉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로부터 감성의식이 발동하여 마음의 안정이 엉클어지고, 숨결이 거칠어지면서 몸의 생명기운이 쉽게 탁해짐으로써 ‘본명’이 흩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명’의 맑은 생명기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진명’을 온전하게 닦아야 한다. 이는 집중적인 수련을 통해 호흡법의 전환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진식호흡眞息呼吸이라고 하는데, 들숨보다는 날숨을 가늘고 길게 하여 음양의 천지기운과 교구交媾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선가仙家에서는 이것을 단전호흡丹田呼吸 혹은 태식호흡胎息呼吸이라고 말한다.
자연의식에서 진식호흡을 집중적으로 하게 되면, ‘진명’이 자각된다. ‘진명’을 자각하게 되면, 인간은 ‘진명’이 곧 천명天命에 따를 ‘본명’이고, 대자연의 약동하는 ‘청기淸氣’로 의기義氣이고, 곧 우주적인 생명의 기운과 더불어 그 기원을 같이함을 깨닫게 된다. 이에 대해 『단군세기』 서문에서는 ‘진명’을 “산천山川과 더불어 그 기운과 같이하는 것[與山川同其氣]”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진명’을 자각하게 되면, 인간은 태어나기 이전의 천지기운과 소통하여 ‘원기元氣’를 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이는 ‘시천주’와 ‘태을주’ 주문수행이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태을주’와 ‘시천주’ 주문은 가장 강력한 영적인 힘으로 천지기운을 받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원기’는 인간이 타고날 때 몸으로 들어와 가슴부분의 중단전中丹田에 안착해 있다. 그런데 인간은 태어나면서 흉식호흡胸式呼吸을 하기 때문에 ‘원기’가 점차 소모되거나 쇠퇴하여 흩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인간은 ‘원기’의 부족으로 인해 쉽게 병들고 점차 빠르게 늙어감으로써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자연의식에서 들숨과 날숨을 통해 진식호흡을 집중적으로 수련하게 되면, 인간은 ‘진명’과 기원을 같이하는 천지기운과 교구하여 대자연의 투명한 빛과 같은 ‘원기’를 끌어 모을 수 있고, 이를 하단전下丹田으로 밀어 넣어 점차 정단을 쌓아 놓을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정’을 닦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몸 안에 내재된 ‘진정眞精’의 존재방식과 그 본질을 스스로 깨치는[自覺] 것인데, ‘진정’의 존재방식은 치화신治化神이 내려와 몸의 배꼽 아래 부분인 하단전下丹田에 안착해 있는 것이다. 그 본질은 곧 ‘성’과 ‘명’으로 융합된 몸과 마음의 ‘정기精氣’, 즉 수명受命을 결정하는 원천적인 생명줄이다. 그것의 정체성은 우리가 먹고 사는 물질대사의 차원에서 말하는 심신心身의 활동력으로 표출表出는 정력精力을 넘어서 ‘신의 마음’이 시공 안으로 들어와 전환된 생명활동의 동력원動力源인 것이다.
그런데 ‘정’에 대한 깨달음의 과정은 몸과 마음의 ‘정기’를 굳건하게 하는 것이다. 그 수련과정은 ‘정기’에서 표출되는 정력精力이 고갈되거나 훼손되는 것을 방지防止하기 위한 수단으로 방탕放蕩한 생활을 금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즉 인간이 몸에 좋은 음식을 섭취하여 정력을 증강시키고, 적당한 운동으로 몸의 기능이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온갖 종류의 병病으로부터의 저항력을 높이고, 천명으로부터 부여된 고귀한 생명력과 의기를 온전하게 보존하면서 무병장수無病長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삼일신고」는 심신의 ‘정기’를 최대한으로 보존하도록 하는 ‘금촉禁觸’을 말한다.
그러나 ‘금촉’만으로 ‘진정’이 온전하게 자각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명체는 생명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동안에는 정력을 지속적으로 소모할 수밖에 없고, 또한 외부와의 접촉으로부터 생명력이 위협당하는 오는 온갖 종류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막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을 자각하여 몸에 무너지지 않는 생명의 보고寶庫, 즉 하단전에 정단을 만들어 ‘정기’를 굳건하게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것은 ‘성’과 ‘명’을 짝으로 닦아 ‘진성’에서 비롯되는 정신精神과 ‘진명’에서 비롯되는 영기靈氣가 융합된 ‘정혼精魂’을 하단전에 굳건히 뭉치게 하여 정단을 만드는 것이다.
‘진정’에 대한 자각은 인간이 어떻게 ‘정혼’을 굳건하게 뭉쳐서 하단전에 ‘정단’을 만들어 보존할 수 있는가를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태을주’와 ‘시천주’ 주문수행은 ‘성’과 ‘명’을 짝으로 닦아 ‘진정’을 자각하여 ‘정단’을 만드는 첩경捷徑이다. 왜냐하면 두 주문은 양陽의 의미에서 ‘신’과 음陰의 의미에서 ‘기’가 교구하는 ‘정혼’을 뭉치는 데에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에 대한 자각은 ‘원신’의 혼魂과 ‘원기’의 정精을 하단전으로 끌어들여 정혼精魂으로 다져진 정단을 굳건하게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정혼’은 바로 영생永生에 대한 잠재적인 생명의 동력원을 함축한다. 현실적으로 인간의 생명체는 하단전에 ‘정혼’이 굳게 뭉쳐있어야만 무병장수無病長壽하여 천수天壽를 누릴 수 있고, 육체적인 죽음 후에도 영생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의 주재자 증산상제님은 “도(道)를 잘 닦는 자는 그 정혼(精魂)이 굳게 뭉쳐서 죽어서 천상에 올라가 영원히 흩어지지 아니하나 도를 닦지 않는 자는 정혼이 흩어져서 연기와 같이 사라지느니라.”(『도전』9:76:1)고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된 수행의 제2단계를 요약해 보자. 그것은 몸의 근원적인 정화과정을 넘어서 ‘삼진’을 철저하게 ‘깨우치는 것[自覺]’이다. 이는 ‘성과 명을 함께 닦음[性命雙修]’으로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단순히 마음만[性]을 잘 닦아 명경지수와 같이 되었다고 해서 ‘진성’이 온전하게 닦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명’에 대한 인식이 자각되면 자각될수록 ‘진성’은 그만큼 크게 닦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진명’에 대한 인식이 천둥벽력처럼 크게 깨질 때, ‘진성’은 온전하게 닦여서 그만큼 크게 열리고, 나아가 ‘진정’은 ‘진성’과 ‘진명’의 융합이기 때문에 동시에 닦이는 것이다. ‘진정’이 온전하게 닦이면, 이는 몸의 하단전에 ‘정혼’이 뭉쳐서 굳건한 정단이 형성된다. 따라서 전통적인 선가仙家에서 말하는 ‘성’과 ‘명’을 함께 닦음[性命雙修]’은 태을주와 시천주 주문수행을 통해 몸에 ‘정혼’을 굳게 뭉쳐 하단전에 굳건한 ‘정단’을 형성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