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역사는 신이 자신을 인식하는 행보
그러나 헤겔의 야심은 그 자신조차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사태를 독자에게 명확하게 밝혀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을 이끄는 근본이념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를 주관하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신을 기술하는 기독교 성경과는 대조적으로, 헤겔은 신을 아직 완료되지 않은 세계이성, 생성의 과정에 있는 세계정신으로 파악한다. 신은 처음에는 둔감한 상태에 있었다. 이미 이성을 갖고 있지만(“즉자적으로” 갖고 있지만), 그러나 아직 이성을 자각하고 있지는 않은(아직 “대자적으로는” 이성을 갖고 있지 않은) 태아의 상태에 상응하였다.
이제 헤겔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세계정신, 곧 생성하는 신 또는 이성의 점진적인 의식 생성은 모든 정신적, 물질적 존재들이 참여하는 하나의 보편적 과정 속에서 진행된다. 복잡한 과정의 궁극 목적은 전체 진리, 절대적 진리의 계발이다. 이는 곧 진리와 이성과 동일한 신의 전개를 말한다. 그래서 이제 하늘과 땅의 모든 일어남은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다. 진리(신, 이성)는 세계와 세계안의 모든 일어남들을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데 사용한다.
진리(신)는 인류의 역사 안에서 가장 확연하게 전개된다. 인류가 우매하던 태고에 신은 인류를 점점 더 높은 분별과 명료한 의식의 단계로 끌어 올린다. 이와 함께 인류의 자유도 점차 증대된다.
헤겔은 이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특별히 다른 곳에서 상세하게 설명한다. 초기 고대의 동양인들에 있어서 신, 세계정신은 자기 자신을 조금밖에 의식하지 못한다. 즉 동양 민족들은 인간은 그 자체로 자유롭다는 의식은 아직 갖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단지 한사람의 자유로운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즉 전제군주만이 유일하게 자유롭다.
이에 반해 희랍인과 로마인들에게는 신적 진리가 이미 상당한 발전 단계에 있다. 물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인간은 그 자체로 자유롭다는 것을 아직 알고 있지 못하다. 그렇지만 어쨌든 희랍과 로마에서는 노예가 다수를 이루는 한편 소수의 사람들은 이미 자유롭다.
세계 이성은 기독교로 개종한 게르만인들에게 있어서 비로소 최고의 의식 단계에 이른다. 게르만인들은 인간은 그 자체로(또는 모든 인간은) 자유롭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신적 진리 전체를 소유한다.
이렇게 볼 때 헤겔에게 세계 역사는 우연히 일어나고 단지 겉보기에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예컨대 전쟁들, 조약 체결들, 왕의 살해)의 연속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역사 과정의 의미란 그 흐름 안에서 절대적 진리, 신적 진리 또는 이성이 한 걸음 한 걸음씩 자신을 드러내고 또 이와 함께 인간의 자유가 실현되는데 있다고 보는 것이다.
헤겔의 이론은 의심할 나위 없이 독창적이지만, 그러나 사변적인 철학이다. 즉 그 이론의 창안자는 칸트가 그어 놓은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다. 그는 세계정신에 대해 말하지만, 그같은 존재의 실재를 뒷받침해 줄 어떤 확고한 증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버트런드 러셀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처럼, 그러한 철학을 궁극적으로 참으로 여길 만한 어떤 논리적 근거도 없다.
헤겔의 역사 해석은 훗날 칼 마르크스에게 결정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마르크스는 역사란 의미와 목적을 갖고 있다는 사상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신이 세계 발전의 원동력이란 헤겔의 이념은 거부한다. 그는 헤겔의 철학을 거꾸로 세우고 신의 자리에 노동하는 존재, 인간, 특별히 생산관계를 놓는다.
헤겔에 따르면 세계 이성은 자기의 진리를 발견하는데 곧잘 “영웅들”을 이용한다. 이들은 세계 역사 그리고 그와 함께 이성과 자유의 전개가 가장 빠른 속도로 실현되도록 앞당겨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영웅 중의 한사람인 나폴레옹이 1806년 10월 24일 예나를 정복한다. 짧은 순간이지만, 당시 황제의 모습을 직접 보게 된 헤겔은 격한 흥분 속에 이렇게 말한다. “여기 온 힘을 하나로 모으며 말 위에 올라 앉아 세계를 간섭하고 지배하는 그런 한 개인을 바라본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경험입니다. … 목요일에서 월요일로 이어지는 그같은 진군은 (세계사에 있어서) 도무지 탄복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예외적인 인간에게서만 가능한 일입이다.”
그러나 사상가는 뒤이어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서는 조금도 감탄하지 않는다. 나폴레옹 군대는 그의 집을 약탈하고 그의 “원고들을 마치 복권들을 헤집어 놓듯 흐트려 놓았다.” 그는 그동안 완성된 원고를 호주머니에 급히 쑤셔넣고 한 친구 교수 집으로 도피한다. 훗날 역사가들은 『정신현상학』의 완성과 예나 전투가 동시에 발생한 우연을 두고 신비스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즈음 또 다른 근심이 헤겔을 괴롭혔다. 가진 돈은 바닥이 나고 교수 급료는 형편없이 적다. 그래서 친구들조차도 그가 어떻게 생계를 잇고 있는지 모를 정도이다. 게다가 집주인의 부인이 그의 아이를 낳았다. 그녀의 남편이 갑자기 죽게 되자, 헤겔은 처음엔 그녀에게 결혼을 약속하지만 그 후 그 약속을 깨고 달아난다. 헤겔은 루드비히라고 불리는 그녀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에 대해 평생 동안 반감을 갖는다. 나중에 헤겔은 마지못해서 그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인다. 무엇보다도 그가 학교에 다니는 동안 돈을 유용한 때문이다. 아마도 루드비히를 떼어 낼 생각으로 헤겔은 결국 자신의 돈으로 그에게 네덜란드 장교 임명장을 마련해주었다. 루드비히는 네덜란드 식민지에서 군 생활을 하다 1831년 자카르타에서 사망하였다.
헤겔은 친구 임마누엘 니트함머(Immanuel Niethammer)의 소개로 마침내 ‘밤베르크 신문’의 주필主筆로 취직하게 되었다. 이번 직장 역시 보수는 낮은 편이다. 게다가 그는 전혀 저널리즘의 재능을 갖고 있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그에겐 간결한 문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돼 있었다.
처음부터 신문 제작은 헤겔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철학자는 여러 편지들에서 자신이 들춰내야 하는 추잡한 일들에 관해 불평하였다. 도처에서 일어나는 범죄와 음란한 사건들에 혐오감을 갖고 있던 헤겔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크게 후회하게 된다. 그는 “신문의 갤리선船(중세 지중해에서 쓰인 노와 돛이 많고, 주로 노예나 죄인이 노를 저은 군함)”, “신문의 멍에”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마침내 헤겔이 니트함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자 니트하머는 다시금 그를 돕는다. “신문사에서 생활하는 매순간이 헛되고 타락한 삶입니다.” 1808년 헤겔은 그의 도움으로 뉘른베르크에 있는 아기디언(Agidien) 김나지움의 교장으로 부임한다.
그는 8년 동안 이곳에서 김나지움 교사로 재직하지만, 그의 재정상 형편은 다시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다. 당국이 자주 월급 지불을 몇 달씩 연체하였던 것이다.
헤겔은 주로 희랍어와 라틴어를 강의하지만 철학도 함께 가르쳤다. 그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은 훗날 그를 “깊은 진지함”과 “객관적인 엄숙함”을 가진 사람, “흡연이란 수치스런 습관”에 대해 질책하던 사람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헤겔의 나이 40세. 그는 자기가 남편으로서 적합한 사람인지, 근본적인 의미를 숙고하길 좋아하는 자신이 과연 한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인지 자문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은 뉘른베르크 시의원의 딸인 20세의 마리 폰 투허(Marie von Tucher)를 만나게 되면서 말끔히 사라진다. 사랑에 빠진 그는 ‘사랑스런, 사랑스런 아름다운 아가씨’란 시를 쓴다. “당신은 나의 것! 내 열렬한 마음을 그렇게 불러 봅니다. / 당신의 눈에서 / 사랑하는 사람은 응답의 눈길을 봅니다. / 오 이 기쁨, 가슴 벅찬 행복감이여!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난 이제 말할 수 있습니다. / 내 억눌린 가슴속에서 / 그토록 오랫동안 당신을 향해 남몰래 고동쳤던 것 / 이제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날카롭게 울리던 욕망이라고!”
1811년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린다. 헤겔과 마리 사이의 큰 나이 차이도 둘의 결속에 장애가 되지 못했다. 부부는 평생 동안 행복한 관계를 유지한다. 마리는 세 아이를 낳았다. 그중 첫째인 딸은 태어나서 얼마 안 돼 죽고, 나머지 두 아들은 각각 85세, 77세까지 산다. 큰아들은 역사학 교수가 되고 둘째 아들은 브란덴부르크주州의 종교국장의 지위에 오른다.
또한 이 무렵 전부 3권으로 된 헤겔의 유명한 작품, 마치 개념의 왕국처럼 정신세계에 우뚝 서있는 『(대大)논리학(Wissenschaft der Logik)』이 출간돼 나온다. 방법적으로 보면 『논리학』과 그의 첫 번째 작품, 『정신현상학』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 밖의 다른 작품들처럼, 두 작품 모두 변증법적 방법에 따라 완성되었다.
헤겔은 변증법이 갖는 탁월함을 확고하게 믿는다. 그에 반해 “형식논리학”에 대해서는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는 형식논리학을 “유골”이라고 부르면서 형식논리학으로는 도무지 현실을 올바로 파악할 수 없다고 단정적으로 주장한다.
두 인식 방법 사이의 메꿀 수 없는 차이는 형식논리학은 “경직된” 반면, 변증법은 “동태적”이란 데 있다.
다르게 설명하면 이렇다. 형식논리학은 일련의 사유 규칙들로 이뤄져 있다. 우리는 이 규칙들의 도움으로 또 다른 명제들, 예컨대 ‘사람인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와 같은 명제를 추론할 수 있다. 이밖에도 형식논리학은 적어도 학문 안에서만큼은 모든 개념들이 하나의 명백한 의미를 가질 것을, 즉 ‘죽는다’ 같은 한 단어가 확정적 의미를 가질 것을 그리고 모든 진술들이 모순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형식논리학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그렇지 않을 경우 도대체 이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은 이에 대해서 현실이란 형식적이고 경직된 논리학을 가지고 파악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모순되고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신문 독자인 우리는 흔히 신문기사만으로는 어떤 한 위험지역에서 아직까지는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지, 아니면 이미 전쟁이 시작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전쟁과 평화란 모순은 결코 따로 떨어진 두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얽혀 있고 부단한 역동적 관계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평화가 전쟁을 몰아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쟁은 평화를 몰아낸다. 따라서 이같은 동적動的인 사건들을 쫓아서 이해하려고 하는 사유는 그와 마찬가지로 역동적, 변증법적이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개념들에서, 또한 사유과정의 전개에서 그렇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