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 그들의 깊은 사유와 ‘웃픈’ 삶 20 마르크스 (3)

3. 노동과 그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인간

 

그는 국가 개념에서 출발한다. 헤겔에서 법을 지닌 국가는 신적 이성의 구현으로 간주됐고 그 때문에 또한 현실 그 자체이기도 했다. 이에 비해 시민사회란 형태에서 등장하는 민중은, 철학자(헤겔)에 따르면, 애매하고 천박한 뒤섞인 표상들과 사유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표상과 사유들은 국가가 (이성적인 입법을 통해) 민중들을 장악하고 이들을 국민으로 만들어 갈수록 점차 사라지게 된다.

그렇지만 카를 마르크스는 다르게 생각한다. 그의 착상의 결정적인 점은 헤겔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고, 그리하여 국가와 민중 사이의 현실적 관계를 정립한다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국가가 신적 이성의 구현이라는 생각을 거부하고 신적 이성의 자리에 인간을 대치시킨다. 그는 “국가는 추상물”이라고 기술한다. 오로지 민중만이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헤겔의 경우처럼 민중이 국가화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민중화돼야 한다.

이같은 인식에 이른 후, 곧바로 그에겐 지상地上의 형세를 바꾸어 놓게 될 생각이 떠오른다. 이때 그는 다음의 확신에서 출발하고 있다. 역사적 과정은 원칙적으로 상태의 개선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주장은 여러 가지로 논란의 대상이 된다.

경제에 대한 그의 지식은 처음엔 보잘 것 없는 수준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는 “사적 소유” (예를 들어 공장)를 인정하는 시민-자본가 사회는 그들과 “모순관계”에 있는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Proletarier: 임금노동자, 무산자)를 “창출한다.”고 본다. 그는 ‘프롤레타리아’를 노동을 하지만, 생산수단의 소유로부터 분리된 압도적 다수의 임금노동자로 이해한다. 이들은 비참하게 살며 자신들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아야 한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들은 생산과정에서, 마치 하나의 기계처럼 통제되며 자신이 생산한 것에 대해 어떤 능동적 또는 창조적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자기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오히려 생산 과정이 그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지시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기 노동과 노동 생산물의 주인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말하듯) 그것들로부터 소외돼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노동의 소외는 인간을 비로소 인간이게 하는 인간의 창조적 능력을 위축시킨다. 이를 통해 인간은 그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인간은 비창조적인 비인간으로 살며(이 점을 뚜렷하게 깨닫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런 상태로 역시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다른 이웃 인간들과 대립한다. 이를 철학적 개념을 통해서 다시 표현하면, 인간의 본질과 실존은 분리되고 상호 모순 속에 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자 대중이 자본가 계급을 상대로 봉기하고, 나중에 그가 표현한 것처럼, 계급 없는 사회, 다시 말해 생산 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가 폐지되고 모든 인간의 본질과 실존이 일치하는 사회를 이룩한다면, 노동과 생산 수단의 소유 사이 모순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질과 실존 사이 모순 또한 극복될 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마르크스가 자기 사상을 과학적 이론으로 완성하기 이전에 이미 혁명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또한, 잃을 것은 오직 자기의 사슬뿐인 인간들의 봉기가 어디서 일어나야 될지 알고 있다. 그곳은 서유럽 중 가장 정체된 나라, 독일이다. 그곳에서부터 혁명의 불꽃이 일어나 모든 민족들에게 옮겨 붙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착취 받는 대중들에겐 그들을 도와서 폭력적으로 “모든 관계를 뒤집어 놓을” 이론이 필요하다.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가 이 정신적 무기를 그들에게 제공하려고 한다. 이제껏 초연하고 탈속적인 철학으로 하여금 마침내 노동자 계급과 굳게 연대하게 만들고, 이론과 실천이 하나로 일치되게 한다는 것이다. 또는 마르크스의 멋진 비유를 가지고 말하면, “해방의 머리는 철학이고 그 가슴은 프롤레타리아이다. 철학은 프롤레타리아의 지양止揚 없이는 자신을 실현할 수 없으며 또한 프롤레타리아는 철학의 실현 없이는 지양될 수 없다.” 이때 마르크스는 우선 프롤레타리아로는 독일 노동자를, 철학으로는 자신의 철학을 생각하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비록 그의 사상이 아직 성숙한 것이 아님에도, 자신이 진리, 당연히 유일한 진리를 좇고 있다고 곧장 확신하였다. 이런 단정의 결과로 그는 하루가 다르게 점점 권위적으로 변하고 남들과 불화를 일으키게 된다. 그는 정치적 동지들의 어떤 의심이나 이의제기도 거세게 공박해버린다. 그래서 그 같은 점만 아니라면 그의 헌신적인 숭배자가 되었을 모제스 헤쓰 같은 이는 나중에 이렇게 개탄한다. “우리의 운동 속에서 가장 천재적인 사람의 자부심이 인정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 인격적인 굴복마저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깊고 평생에 걸쳐 이어지는 끈끈한 우정이 마르크스에게 생겨난다. 1844년 여름, 파리의 한 카페에서 그는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와 가까워진다.

영국 바름의 한 방직공장 주인의 아들로 성장한 엥겔스는 맨체스터 지방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궁핍을 정확하게 연구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대중의 비참한 현실은 극복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극복은 자본가들 편에서의 관대한 양보(임금 인상, 미성년자의 고용 제한)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적 소유의 사회화를 목적으로 한 혁명적 행위를 통해서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엥겔스는 철학은 노동자 계급과 결속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생각에 금세 매료된다. 그는 친구를 재촉해, 두 사람이 다 같이 무너뜨리고자 한 경제 체제, 곧 자본주의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확보하도록 한다.

이렇게 해서 마르크스는 경제 연구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는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법칙들을 분석하고 또 면도날처럼 예리한 오성을 가지고서 자본, 이윤, 임금, 노동 등과 같은 개념들의 배후에 숨어 있는 것을 들춰낸다. 이와 함께 그는 또한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기도 한다. 사회주의적 봉기에 대해 갖고 있는 막연한 수준의 생각들을 하나의 과학적 토대위에 세우고 싶었던 까닭이다. 예를 들어, 그는 하나의 혁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떤 역사적 조건들이 갖춰져야 하는지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경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지식이 늘어나는 만큼, 그의 가족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빠져 든다. 아내 예니는 첫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남편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 “저는 우리의 장래를 생각하면 자주 심한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녀는 고정적인 수입을 바라지만 마르크스가 그녀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최소한의 생계비가 고작이다. 『독불연감』은 독자 부족으로 파산하였다. 엥겔스는 돈을 송금해주는 것으로 마르크스 가족들을 돕기 시작하였다. 그는 마르크스가 세게 혁명의 철학을 저술할 수 있도록 수년간을 자기 신념에 상반되게도 비굴한 상업에 종사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두 편의 반反프로이센적인 글을 발표하였는데 베를린 정부가 이를 빌미로 그를 프랑스에서 추방시키고자 기도하면서 경제적 궁핍은 더욱 악화된다. 1845년 초 마르크스는 프랑스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궁지에 몰린다. 하지만 독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곳에서는 반역죄에 대한 재판이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제는 망명객으로서, 부득이 브뤼셀로 이주한다. 그는 알리앙스街에 거처를 정한다. 그리고 다른 나라 국적을 취득하지도 않은 채 독일 국적을 포기한다. 그때 이후 그는 계속 무국적자로 남는다.

그는 파리에서처럼 망명지 벨기에에서도 파리에서처럼 사회주의를 공상空想의 저급한 수준에서 벗어나 과학적 틀을 갖추도록 하는 데 전념한다. 훗날 『초기 저작』 이라고 불리는 논문들이 그의 이같은 노력을 증언해주고 있다. (대부분 소실됐던 그의 초기저작들은 1930년 무렵과 그 이후부터 발견됐고 출간됐다. 그런 이유로 예컨대 레닌의 경우는 그 저술들을 읽지 못했다.)

초기 논문들에서 그는 주로 착취적인 자본가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혁명은 그때까지 역사의 논리적인 귀결이란 점을, 곧 사회주의 혁명은 역사과정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그는 변증법적 인식 방법의 도움으로 그에 대한 근거를 제시한다. 여기서 그는 헤겔과 마찬가지로, 역사는 모순의 법칙에 따라 발전한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렇지만 슈투트가르트 출신의 철학자[헤겔]가 완성을 향해 자신을 관철시키는 정신을 유혈로 얼룩진 역사 과정의 제작자(주인)로 설명한 반면, 마르크스는 그 반대의 주장을 편다. 그는 인간을 역사와 모순들의 생산자로 끌어 올린다.

이같은 새로운 해석의 결과는 얼른 보기엔 단순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그 해석은 세계사를 파악하는 전혀 새로운 하나의 가능성이란 것이 밝혀진다. 그리고 이 해석이 어떻게 이해되어져야 하는 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그들의 독창적인 투쟁선언문 「공산당선언」에서 분명히 밝혀 놓고 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자유인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길드 조합원과 도제, 간단히 말해 압박자와 피압박자는 서로 지속적인 대립관계에 있었고, 때로는 잠재해 있고 때로는 노골화되는 끊임없는 투쟁을 수반했다. 이 투쟁은 그때마다 사회 전체의 혁명적 변혁 혹은 투쟁 계급 쌍방의 몰락과 함께 종결됐다.”

이제 화해될 수 없는 당면한 두 대립 계급은 부르주아지(시민)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부르주아지 계급 또한 근본에 있어서는 혁명적 계급이었다. 이들은 왕과 영주, 성직자들이 지배한 봉건제와 대립(모순) 관계에 있었다. 이들은 봉건적 지배 형태에 대항한 투쟁 속에서 엄청난 생산력을 풀어 놓았다. 산업과 무역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이것들은 봉건제를 (광범하게) 극복하고 해체시켰던 시민사회를 새로운 권력 계급으로 부상시켰다.

그러나 “봉건사회의 소멸로부터 생겨난 근대 시민사회는 계급투쟁을 종식시키지 못했다. 이들은 단지 낡은 것들의 자리에 새로운 계급, 새로운 압제의 조건, 새로운 투쟁 형태를 대체하였을 뿐이다.” 시민사회는 “적나라한 이해관계, 무감각하고 단순한 거래 이외의 다른 어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유대도 남겨놓지 않았다.” 그리고 의회와 경찰, 군대를 지닌 국가가 이를 변화시켜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전적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대규모의 산업과 세계 시장이 형성된 이후” 자본가 계급은 “근대적 대의국가에서 독점적인 정치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의 국가 권력이란 단지 자본가 계급의 공통적 관심사를 처리하는 하나의 위원회일 따름인 것이다.”

그렇지만 자본가 계급은 프롤레타리아를 만들어냄으로써(그들은 노동자 없이는 살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들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고 있다. 자본가들의 소멸과 노동자들의 승리는 똑같이 불가피한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란 유명한 구호 그리고 그만큼이나 전설적인, “지금 유럽에는 하나의 망령-공산주의란 망령이 떠돌고 있다.”란 첫 문장이 들어 있는 투쟁 선포문이자 강령인 「공산당선언」은 훗날 모든 공산당의 모체가 되는 ‘공산주의자 동맹’으로부터 위임받아 작성된 것이다. 원고를 위촉한 동맹의 구성원들은 원고 작성이 지체되는 이유를 의아하게 여겼다.

하지만 마르크스에게 그 일은 힘겨운 것이었다. 대중을 상대로 한 글을 쓴다는 것은 그에겐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동맹이 징계 조치를 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엥겔스의 도움을 얻어, 문학적으로 보더라도 독보적인 초안을 작성한다.

그 이전에도 또한 그 이후에도, 그처럼 인상적인 방식으로 타오르는 적개심과 가슴을 격앙시키는 투쟁 정신이 분출돼 있는 문건은 작성된 적이 없다. 또한 그만큼이나 명백한 사실은 그 선언문이 없었다면 카를 마르크스는 결코 대중적인 명성을 얻지 못했으리라는 점이다. 그의 초기저작들이라고 하는 것들은, 더욱이 그의 『자본론』은 대개는 관련분야 전공자들에게만 흥미를 주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선언문은 출간 시점이 바랄나위 없이 유리한 시기임에도 처음엔 단지 1천부만이 인쇄돼 나왔다. 선언문이 출간되던 1848년은 거의 유럽 전역에서 혁명이 발발하던 해였다. 도처에서 이미 강력한 힘을 갖춘 민중들이 봉건 지배체제를 완전히 종식시키려고 하였다.

기아와 실직, 노동자들의 착취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부패 권력에 대한 봉기는 무엇보다도 자유 시민 계급의 혁명이고, 노동자들은 단지 이에 가담할 뿐이다. 여기서는 노동자의 자유가 아니라 시민 계급의 자유가 관심사였다.

마르크스는 봉기에 가담한다. 그의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시민 봉기는 최종의 혁명,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역사 과정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철학은 단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나 이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게 문제”란 핵심 사상에 따라, 그는 자유화 운동을 가속화시킬 목적으로 쾰른으로 향한다. 그는 ‘신新 라인 신문(Neue Rheinische Zeitung)’을 창간하고 모든 시민들에게 혁명에 참여할 것을 호소한다. 자본가들은 전 민중이 그들을 후원할 때만 봉건계급과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소국가들로 분열된 독일에는 다수의 임금 노동자들, 압박받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있지만, 이 피착취자들이 계급으로서 실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천박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전혀 조직적이지 못하고, 게다가 마르크스가 “허위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갖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자본가와 대립된 고유한 이해를 가진 독자적인 세력으로 여기지 않으며, 또한 이 때문에 자신들의 특수한 비참함과 시민 봉기 사이의 올바른 연관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마르크스의 혁명 이론을 이해하는 공산주의 동맹의 조직원들조차도 시민 봉기를 지지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지 못한다. 그 사이 동맹 내 상당한 영향력을 구축하게 된 마르크스는 그에 격분하여 동맹을 해체해버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민 혁명은 이미 패배의 조짐을 보이고, 일부 시민 계급은 봉건 권력과 타협을 시작한다. 마르크스는 신문 논설을 통해 이러한 타협적 자세에 대항한다. 다른 때엔 그렇게도 영민한 그의 두뇌는 완전히 착각 속에 빠져 있다. 그는 권력과 대항세력 사이 역학관계의 실상을 잘못 판단한다. 한 예로 그는 파리의 공산주의자들이 자기 기반을 확보하고, 혁명은 다시 시작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일종의 “세계전쟁”을 기대하면서 반동적인 러시아와 그에 예속된 슬라브 국가들에 대항하는 민족전쟁을 호소하고, 결국 “반란 선동”의 죄로 기소되기에 이른다.

이무렵 마르크스는, 그후 자신이 곧 유럽 통신원으로 일하게 되는 ‘뉴욕 데일리 트리뷴(New York Daily Tribune)’지紙에 소속된 두 미국 기자의 방문을 받는다. 기자들은 그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숱이 많은 검은 머리와 총명한 눈을 가진, 땅딸막하고 단단한 체격의 30대 남자였다. 그의 얼굴은 강인한 힘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의 절제된 신중함 뒤에 숨어 있는 대담한 영혼의 열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혁명을 다시 소생시켜 보려는 그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귀족, 군대, 경찰 등 반혁명세력이 다시 권력을 확고하게 장악하자, 무국적자인 마르크스는 부득이 독일을 떠나야 하였다.

그는 자신의 입국을 달가워하지 않는 프랑스를 거쳐 마지막 정착지가 될 런던으로 망명한다. 그는 이곳에서 ‘신新라인 신문’의 후속지紙인 ‘정치-경제 평론(Politisch-oekonomische Revue)’을 창간한다. 그러나 주로 독일에서 판매돼야 하는 이 신문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850년 새롭게 결성된 공산주의자 동맹은 불과 몇 주 만에 다시 분열되고 1852년 완전히 해체되기에 이른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오랫동안 격리된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이들은 “공산주의자, 심지어 공산당 무리들조차도 우리를 결코 좋아하지 않을 것”(엥겔스)이란 사실을 비통한 마음으로 깨닫게 된다.

‘국제노동자연합(Internationale Arbeiter-Assoziation)’(1차 인터내셔날; Erste Internationale)이 1864년 9월 28일 결성되고서야 비로소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눈에 띠는 영향력을 회복하였다. 노동자연합은 상이한 정치적 견해들과 강령들의 일치를 그 목적으로 삼았다. 이를테면 당시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창시자인 페르디난트 라살레(Ferdinand Lassale)는 자본가들 스스로의 개혁 의지를 기대하면서 노동자들과 국가의 화해를 촉구했다. 이에 반해 러시아인 미하일 바쿠닌(Michail Bakunin)은 모든 형태의 국가적, 정치적 질서를 거부하고 투쟁과 무정부를 주창했다.

이러한 이론들에 맞서 마르크스는, 훗날 ‘과학적 사회주의’라 불린 그의 이론을 내세운다. 그는 ‘인터내셔날’의 주도적인 사상가로 평가받지만,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구축하지는 못한다.

무엇보다도 시베리아 유형으로부터 모험적인 탈옥 사실로 인해 영웅으로 추앙받고, 게다가 비상한 대중연설 재능마저 가지고 있는 바쿠닌이 카를 마르크스와 대립하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바쿠닌은 국가는 혁명을 통해서 분쇄돼야 한다는, 선동적인 효과가 있는 명제를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이러한 입장을 근본적으로 오류라고 간주한다. 그의 철학은 국가는 혁명 이후에 계급 없는 사회가 실현되는 정도에 따라 소멸된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마치 “인터내셔널의 존폐라도 달려 있는 양”, 바쿠닌과의 대결을 지속한다. 그런 사태는 실제로 일어났다. 그는 자신이 이 싸움의 확고한 승자가 되지 않으리란 사실을 깨닫자 인터내셔널의 본부를 뉴욕으로 옮겨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