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의 길을 추구한 신라의 천재 최치원

 

태모 고수부님은 증산도 교단을 처음 세우신 분이다. 증산 상제님이 어천 한 2년 뒤인 1911년의 일이었다. 성도들이 태모님에게 교 이름을 무엇으로 정할지 여쭈었다. 고수부님은 “천하를 통일하는 도인데 아직 때가 이르니 ‘선도仙道’라고 하라. 후일에 진법이 나오면 알게 되리라.”고 하였다. (《증산도도전》 11:29) 선도라는 것은 신선을 추구하는 길이 아닌가? 또 태모님은 “내가 하는 일은 다 신선이 하는 일이니 우리 도는 선도니라”고도 하면서 “너희들은 앞으로 신선을 직접 볼 것이요, 잘 닦으면 너희가 모두 신선이 되느니라.”고 증산도가 신선되는 것을 추구하는 도임을 분명히 하였다.

신선이란 어떤 존재인가?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몸과 마음을 닦아 신과 같은 존재가 된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옛 한국에는 이러한 신선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중국의 도교도 이러한 한국의 신선문화에서 영양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중기에 기록된 《태백일사》에 의하면 중국 도교의 시조라고 일컬어지는 황제 헌원에게 도를 전해준 사람이 배달국의 자부 선생이었다. 자부 선생은 헌원에게 《삼황내문경》이라는 책을 전해주어 헌원으로 하여금 마음을 닦아 의로운 정신으로 돌아가게 하였다고 한다.

한국의 신선 사상은 신라의 화랑도에서 볼 수 있듯이 삼국시대에도 그 명맥이 살아 있었지만 고려에 들어서는 크게 쇠퇴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에 와서는 조선 단학파로 이어져 많은 선인들을 배출하였다.

고운 최치원(857-?)은 이러한 한국의 선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뛰어난 학자로도 유명한데 고려 이전까지 가장 많은 글을 남겨놓은 사람이다. 중국에서 쓴 글들로 이루어진 《계원필경桂苑筆耕》, 신라에 돌아와 왕명으로 편찬한 네 선사들의 전기를 기록한 《사산비명四山碑銘》, 그리고 기타 다양한 여러 글들을 모은 《고운문집孤雲文集》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학자이자 관료, 정치가로서의 그의 생애는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명성은 중국 사서인 《신당서》 예문지藝文志에 그의 저서가 소개되어 있을 정도이다. 그에 의하면 《사륙집四六集》 1권과 《계원필경》 20권이 있다고 하였다. 《사륙집》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학자로서의 고운은 유교는 말할 것도 없고 불교와 도교에 대해서도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당나라 과거시험에 합격하였으니 유교경전을 통달했던 것은 물론이고 불교에 대해서도 무척 해박하였는데 《四山碑銘》을 비롯하여 그가 쓴 여러 고승들의 전기에서 잘 드러난다. 중국의 도교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가 상관으로 모시고 있던 회남절도사 고변高騈을 위해 쓴 여러 재사齋詞들이 남아 있다. 고변은 도교를 무척 좋아하여 주변에 도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가 몰락한 것도 도교에 탐닉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16년을 살다가 28세의 나이로 귀국하였다. 그는 신라에 온 후 우리나라에도 도교와 비슷한 사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옛적부터 있었고 이를 풍류風流라 한다면서 유불선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선사仙史》라는 책이 있었는데 거기에 풍류의 원천에 대한 서술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선사》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아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풍류의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풍류가 백성을 교화하는 도로서 충효와 겸손, 선행을 가르쳤던 것은 분명하니 풍류는 결코 현실도피적인 사상은 아니었다. 신라가 풍류를 화랑도의 조직이념으로 삼은 것은 풍류의 그러한 현세적 성격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최치원이 말한 것과는 달리 한국의 선도가 중국 도교에서 연원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17세기 초 한무외라는 사람이 지은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이 그러한 주장을 담고 있는데 19세기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도 이러한 주장이 그대로 소개되어 있다. 이러한 주장에 의하면 신라 말의 김가기, 최승우, 그리고 승려 자혜가 중국도교 8대선인 가운데 으뜸가는 인물이었던 종리권鍾離權으로부터 도를 배웠으며 그 가운데 최승우는 그 도를 최치원에게 전했고 이 도는 조선 중기의 한무외, 남궁두 등에게까지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치원 자신은 중국의 도교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나 이러한 도의 전수에 대한 언급은 최치원의 저술들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해동전도록》의 전반적인 서술이 객관적인 서술이라고 보기는 힘든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그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망설여진다. 이 책은 후대의 조선 단학파들이 자신들의 연원을 중국 도교와 연관을 짓기 위해 만든 문헌이라 하기 때문이다.

《해동전도록》과 비슷한 시기인 조선 중기에 편찬된 도가서 《청학집》에는 그와는 달리 우리나라의 선도는 환인으로부터 내려온 것으로 환웅과 단군을 거쳐 후대에 전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 선도는 후일 여러 파로 갈라졌는데 이러한 선파의 하나가 물계자勿稽子 파였다. 물계자는 3세기 초의 인물로 신라가 포상팔국과 치른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람이었지만 전공을 인정받지 못해 불만을 가졌던지 산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삼국사기》 물계자전) 《청학집》에 의하면 진평왕 때의 선인인 대세와 구칠, 그리고 후대의 불교승려 도선과 원효 모두 물계자의 유파였다고 한다. 그리고 최치원 역시 이 유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조선의 선도가 한국 고유의 사상이었다는 것은 고려 시대의 기록들에서도 확인된다. 고려 중기의 시인 이규보는 우리나라의 선풍仙風은 중국의 주나라나 한나라, 그리고 가까이는 당나라와 송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 고유의 것이라 하였다.

최치원은 귀국해서는 신라 조정의 명을 받들어 여러 가지 문한을 작성하는 일을 하였다. 894년에는 진성여왕에게 신라의 정치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10조의 개혁안을 올렸지만 정적들의 견제로 실현되지 못하여 그는 지방 태수직으로 밀려났다. 여러 군의 태수를 역임하던 그는 수년 뒤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가솔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책과 자연을 벗하고 살았는데 민간에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그는 그곳에서 신선이 되어 승천하였다고 한다.

고운은 신선이 되기 위해 수련을 하였는데 어떠한 수련을 하였을까? 도교문헌을 연구한 조선시대 학자 이규경에 의하면 최치원은 중국에서 수련법을 배워왔으나 귀국해서는 잊어버려 그의 외삼촌인 현준으로부터 새로운 수련법을 배웠다고 한다.(《五洲衍文長箋散稿》 2권 경사편, 도장류) 그 수련법을 ‘가야보인법伽倻步引法’이라 하였는데 정확히 어떠한 수련법인지는 모르나 그 이름으로 짐작하건대 가야산 일대에서 도를 닦던 사람들 사이에서 내려오던 고유한 수련법이 아닌가 싶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들어가 중국의 유교와 불교, 도교를 배웠지만 신라에 돌아와서는 우리 고유의 선도를 접하고 그 수련법을 배웠던 것이다.

뜻과는 달리 흘러가는 신라의 정치에 관여하기를 포기하고 그는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선 같은 삶을 살았다. 당시 신라는 중앙의 권력이 붕괴되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정치적 혼란이 극심한 상태였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에 그는 전국의 명승지를 떠돌며 자연을 벗삼아 시를 짓고 신선과 같은 삶을 살았다. 지금도 가야산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곳곳에 그의 행각에 대한 전설이 많이 남아 있다. 가야산 해인사 입구의 홍류동 계곡 바위에 그가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가야산 독서당에 부침(題伽倻山讀書堂)

바위 사이로 우르르 콸콸 온 산을 포효하니 지척의 사람 말도 못 알아듣겠네. 이러쿵저러쿵 시비 따지는 소리 들릴까 봐서 일부러 물소리로 산을 둘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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