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 그들의 깊은 사유와 ‘웃픈’ 삶 19 마르크스 (2)

2. 종교와 정치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할 24살의 젊은이

 

1835년 17세가 된 그는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처음엔 본으로 간다. 그러나 1년 후 그는 법학을 공부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다시 베를린으로 갔다.

하지만 법학 공부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다른 재미있는 유흥거리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밤새워 술을 마시고 빚을 지기도 한다. 일종의 학생서클에 가입하고, 불법 무기를 소지한 죄로 고발당하기도 하며 음주 때문에 구류처분을 받기도 한다.

아들에 거는 기대가 큰 만큼, 이를 매우 근심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 “나는 내가 너처럼 자비로운 보호 아래 태어났더라면 어쩌면 내게서 성취되었을 것을 너에게서 보고 싶다.”

아버지는 자식의 광폭함과 (“마치 우리가 부자라도 되는 양”) 과도한 지출을 꾸짖으며 거친 젊은이에서 절도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새롭고 더 나은 욕망을 가져보라고 간곡히 당부한다.

무엇보다도 부모의 역정을 살만한 일을 많이 하면서도 부모가 기뻐할 만한 일은 거의 않거나 아예 안하고 있다는 책망이 마르크스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는 베를린에서 참회가 담긴 고백의 편지를 써 보낸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다.

그는 대학의 실상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 사이 법률가가 되겠다는 계획을 포기했고, 그래서 국법과 형법에 관한 지루한 강의를 계속 들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었다.

대신에 시인이 되고자 하여 시를 썼다. 대개는 감상적인 시들이다. 그 중 읽을 만한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하는 시를 들 수 있다. “결코 나는 평온한 가운데 실행할 수 없네. / 내 영혼이 강렬하게 붙잡은 것을. / 결코 나는 차분하고 평화롭게 있을 수 없네. / 난 쉼 없이 성나 날뛰네.”

그는 자기가 쓴 시의 대부분을 ‘트리어의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 예니 폰 베스트팔렌(Jenny von Westphalen)에게 보낸다. 마르크스보다 네 살 위인 그녀는 명망 있는 관리 집안 출신이다. 그녀의 오빠는 프로이센의 내무 장관 지위에까지 오른다.

카를 마르크스는 1836년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소중하고 영원히 사랑하는 예니와 약혼을 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약혼에 대해 회의적이다. 변호사는 자기 아들이 진정한 인간적, 가정적 행복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그래서 아들에게 철저한 자기 검증 끝에 그래도 네가 정말로 (결혼을) 원하는 것이라면 너는 당장 한 사람의 남자가 돼야 할 것이라고 당부한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자기 마음을 신중하게 따져보는 그런 유형의 사람도 아닐 뿐더러 더욱이 그럴 시간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 사이 무엇보다도 철학과 씨름하려는 내부의 충동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에 대한 그의 열정이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은 그가 박사클럽에 가입하면서부터이다. 박사클럽은 베를린의 젠다르멘마르크트(Gendarmenmarkt)에 있는 슈테헬리(Sethely)란 카페에서 격렬한 토론을 주도하던 자유주의적인 대학생들의 모임이다. 이 모임은 전적으로 5년 전에 죽은 철학자 헤겔의 영향 안에 있었다. 이들의 반항 정신은 헤겔의 위력적인 사유 체계에서 불붙은 것이다.

프로이센의 지도적 사상가였던 헤겔은 가공할 경찰 체계를 가지고 있고, 체제에 반하는 사상가를 탄압하는 공권력의 국가를 진리의 최종 단계라 여겼던 것이다. 헤겔에게 강력한 권력 국가는 마치 그 자체로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해 이성적인 것과 같은 어떤 것이었다.

헤겔은 자신의 철학적 출발점에 기초하여 이같은 기이한 느낌을 주는 판단에 이르렀던 게 분명하다. 말하자면 그는 인류의 역사는 동시에, 성경의 신과는 대조적으로, 여전히 실현의 과정에 있는 신의 역사이기도 하다란 입장을 갖고 있었다. 곧 생성하는 신(세계정신)은 점점 더 높은 이성의 형태에로 자기를 관철시키기 위해 인류의 역사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세계정신, 곧 신적 이성은 수천 년 전에는 아직 거의 발전되지 못한 채로 있었다. 세계의 초기 정치 체제들은 이에 상응하였다. 무리를 지워 살았던 당시 사람들은 이성적 법률도 알지 못했고, 뚜렷한 윤리나 도덕도 갖고 있지 못했다.

헤겔은 의당 원시적 형태의 공동생활에 비하면 국가는 더 높은 이성의 단계로 보인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철학자는 헌법을 갖춘 국가를 세계정신이 나타나는 최고의 형태라고 생각했다. 국가보다 더 높거나 더 이성적인 정치 형태를 그는 생각할 수 없다.

박사클럽의 지적 반항아들은 역사란 한 역동적 원리를 따른다는 헤겔의 생각에는 매료되었지만, 하필 자유롭지 못한 프로이센에서 정신이 그 현존에서 완전히 실현된다는 헤겔 사상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들은 밤을 새는 토론들을 거치면서, 헤겔의 이론을 시대에 부합되게 하고, 또한 이성은 프로이센과 같은 군주제 국가 형태까지도 넘어설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이론을 정치적 다이너마이트로 바꿔 버린다. 이들은 스스로를 청년 헤겔학파라고 칭함으로써, 거장의 철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표방한다.

물론 클럽 내에서 마르크스는 19세로 가장 나이가 어리지만, 날카로움이나 논쟁의 열정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모임의 구성원들은 감탄 속에서 그가 “발상들의 황소 머리”이며 “사유의 잡지”란 점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공산주의라든지 또는 국가의 종식 같은 개념들은 아직 그 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에게 모자라는 것은 박식함, 다시 말해 학위를 받은 그의 친구들이라면 능히 가지고 있을 법한 지식이다. 그래서 그는 철학에 달려들어 왕성한 지식욕으로 희랍 사상가들, 특히 데모크리토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의 작품들을 공부한다. 이어 라이프니츠, 칸트, 피히테, 셸링 등 독일 철학자들의 작품들을 그리고는 다시 자신에겐 마치 기괴한 바위의 울림처럼 들리는 헤겔의 작품들을 읽어 나간다.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모습을 감춘다. 지적 욕구로 왕성한 그의 정신이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대학 수업을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약혼녀 예니와 이들의 은밀한 약혼을 이미 오래전에 눈치 채고 있던 그녀의 부모들이 그를 다그쳐 마침내 졸업 시험에 통과하도록 만든다. 11학기를 보낸 후인 1841년 그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 철학의 차이”란 제목의 박사 학위 논문을 작성한다. (기원전 460년에서 370년까지 살았던 데모크리토스는 유물론과 원자론의 창시자로 꼽힌다.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이론으로부터 고유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페르시아의 왕이 되기보다 인과율을 발견하는 쪽을 택하겠다는 말은 데모크리토스에게서, 또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위안을 주는 말은 에피쿠로스에게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살아있다면 죽음은 없고 죽음이 있다면 더 이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교수들 사이에서의 나쁜 평판 때문에, 논문 제출자가 출석하지 않고서도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예나 대학에 4월 6일 논문을 제출한다. 10일 후 마르크스는 자신을 박사라고 칭할 수 있게 된다. 반면 베를린 대학의 졸업증서는 전혀 기뻐할 만한 게 못된다. 거기엔 그의 품행에 대한 비우호적인 소견들이 적혀 있다. 예를 들어 그가 빚 때문에 수차 고소당한 바 있다는 사실이 적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교수가 되고 싶어 한다. 본 대학 교수직에 뜻을 두지만 이뤄지지 않는다. 박사클럽 시절부터 그를 알고 있고, 그를 위해 그 자리를 주선해줄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가 그때 마침 교수직을 잃었다. 바우어의 해직 이유는 그가 성경의 복음서들을 지나치게 비판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학문의 최고 지위에 대한 불운한 시도는 마르크스의 지적 명성을 감소시키지 못한다. 친구들은 그가 그의 길을 가리란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를테면 모제스 헤쓰(Moses Hess)란 기자는 한 친구에게 흥분을 감추지 않은 채 이렇게 편지를 쓴다. “당신은 조만간 전 독일의 시선을 한 몸에 집중시킬, 아마도 현존하는 철학자 중 유일하게 진정한 철학자일 한 사람을 만나게 될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우상은 마르크스 박사라 불립니다. 그는 기껏해야 24살 정도의 아직 새파란 젊은이지만, 그는 중세의 종교와 정치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깊은 철학적 진정성과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날카로운 기지를 갖추고 있습니다. 루소, 볼테르, 홀바흐, 레싱, 하이네, 헤겔이 단지 뒤범벅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합치된 한 인간을 상상해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바로 마르크스 박사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헤쓰는 또한 직업이 없는 자기 우상에게 1842년 쾰른의 진보적 신문인 ‘라인 신문’(Rheinischen Zeitung)의 기자직을 주선해준다. 마르크스의 운명적인 전환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민중들이 겪고 있는 비참한 현실은 그에게 특별한 느낌을 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언론인이 되어서 처음으로 “이른바 물질적 이해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확산되는 삼림 도벌을 둘러 싼 라인 지방의회의 논쟁도 그러한 사유의 충격들 중 하나이다. 마르크스는 이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이 범법 행위에 대한 책임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있다는 대담한 입장을 전개한다. 국가가 시민들을 범법자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단죄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우구스부르크 알게마이네 신문’(Augsburger Allgemeine Zeitung)이 쾰른의 경쟁지에게 공산주의에 은밀하게 동조하고 있다라는 혐의를 둘러씌운다. 당시 공산주의는 채 발효되지 않은 사유 소재이다. 엄격한 검열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한 동조란 혐의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교묘한 논리로 자신이 속한 신문을 위험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그는 조리 있는 논리로 공산주의적 사상은 국가에게 본질적인 위험이 됐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상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쓴다.

그는 탁월한 문장가였다. 그의 기사는 주목을 끌고 신문의 발행 부수를 늘린다. 나아가 마르크스는 주필로 승진한다. 그러나 자리를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 당국은 곧 이 신문을 ‘라인의 창녀’라고 부르면서 폐간을 거듭 시도한 것이다. 6주후 마르크스는 당면한 검열을 이유로 손을 들고 만다.

그는 크로이츠나흐 온천으로 여행을 떠나 그곳에서, 7년의 약혼기간 끝에 여전히 아름다운 약혼녀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식을 올린다. 그 사이 아버지는 죽고(1838), 어머니와의 사이는 완전히 금이 간 상태였다. 게다가 새 일자리를 구할 수 있으리란 기대도 전혀 가질 수 없다. 그는 아내와 함께 파리로 가서 새로운 삶을 찾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수도를 지배하고 있던 자유주의적 정신은 비단 마르크스만을 끌어들인 것은 아니다. 대개는 지식인들인 약 8만 5천명의 독일인들이 센 강변에 살고 있었다. 하인리히 하이네도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마르크스는 하이네와 교분을 맺는다. 또 “사유私有는 절도다.”란 말을 남긴 프랑스인 프루동(Proudhon) 같은 사회주의자들과도 사귄다.

마르크스는 철학적 야심이 담겨 있었지만 단명에 그치고 만 잡지『독불연감』에 기고하고, 생활비를 줄일 목적으로 이 잡지의 출판인인 아르놀트 루게(Arnold Ruge)와 일종의 실용적 공동체를 유지하며 함께 생활한다. 그러나 둘 사이엔 곧 불화가 발생한다. 자유주의적인 루게로서는 갈수록 자기 동료의 정치적 견해에 동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사이 마르크스에게는 그 중요성이 비단 그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을 전환이 일어났다.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좌파들이 대중의 비참한 현실에서 자극을 받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낳게 될 그의 결정들은 분명 심정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물론 그 역시 파리 노동자 집회에 참석하고 거기서 노동으로 강건해진 육체들에서 인간의 고상함이 빛나고 있다는 강렬한 인상을 받기도 하지만, 말하자면 그의 머릿속에서 폭발한 새로운 사상은 바노가街에 있는 서재에서 떠오른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헤겔의 철학을 거꾸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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