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가락국과 대가야국의 기원에 관해 고려 초에 편찬한 《사기》와 <유사> 류를 비롯하여 그 뒤 조선 시대에 기록한 여러 사서들 중 《기언》의 상기 부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석이정전釋利貞傳〉에 이르기를, “대가야는 초기에 신녀神女가 있었는데, 이비가夷毗訶에게 감응하여 뇌질주일腦窒朱日과 뇌질청예腦窒靑裔를 낳으니, 이들은 하늘과 땅의 기운으로 탄생한 것이다. 주일은 대가야의 군왕 이진아치伊珍阿致이고, 청예는 [*그의 형인] 가락의 시조 김수로이다.” 하였는데,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신녀神女는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9권 〈경상도 고령현〉 편에는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로 나온다. 이로 볼 때 뇌질청예腦窒靑裔와 그 아우인 뇌질주일腦窒朱日은 각각 김수로와 그 아우 이진아치伊珍阿致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이들의 성명을 자세히 보면 거기에는 놀랍게도 순수한 우리 말 성씨가 보인다. 두 사람의 이름은 둘 다 ‘뇌질腦窒’로 시작하므로 이는 성씨이고 ‘청예靑裔’와 주일朱日은 이들의 이름이다.
‘뇌질腦窒’의 옛 지나식 한자소리를 수록한 유명하고도 권위 있는 인터넷 한자사전 《한전漢典》이 밝히듯이, ‘니–모 호–부泥母 豪部’, 곧 ㄴ+ㅗ=노’ 와 ‘찬–모 쇼–부端母 屑部’, 곧 ‘ㅊ+ㅛ=쵸’라는 소리를 가졌다. 이 두 소리를 합치면 바로 ‘노쇼/노쵸’라는 소리이다. 이는 우리말 ‘놋쇠’와 같은 소리다. 그런데 ‘놋쇠’는 ‘노랑 쇠’로 한문으로는 ‘황금黃金’이고, 이는 간단히 말해 오늘날의 ‘금金’과 같다.
그런데 오늘날 흉노匈奴족 출신이라고 알려진 신라의 김씨 왕가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성과 이름에서 ‘알지’의 옛 소리를 보자. 같은 《한전》에 보면, ‘閼알’은 ‘영–모 월–부影母 月部’, 즉 ‘ㅇ+ㅗㄹ=올/알’ 소리이고 ‘智지’는 ‘단–모 제–부端母 齊部’, 즉 ‘ㅌ+ㅣ’=’티’이므로 둘 다 합치면 ‘올티’ 또는 ‘알티’이다. 그런데 이 한자 ‘알지’의 옛 소리 ‘알티’는 투르크–몽골어에서 바로 ‘금金’이라는 말이다. 곧 ‘김–알지金–閼智’라는 성과 이름은 고대 한국어이기보다는 사실은 투르크–몽골어로 ‘금–금金–金’이라는 이름이며, 따라서 그는 투르크–몽골어의 선조어인 흉노어를 쓴 인물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1980년대 강상운 교수는 《언어를 통해서 본 한국사》에서 이 언어적 사실을 제기한 바 있다. 그는 또 문무왕 비 등 신라 왕가의 석비에 이 가문이 흉노 휴도왕의 후손이라고 적힌 사실도 들었다. 또 투르크突厥와 몽골인의 선조 중 하나인 선비인들의 일부는 《주서周書》 등 일부 사서에 따르면 명백히 흉노의 후손 지파이다. 그러므로 경주 김씨 시조인 김알지가 흉노 휴도왕의 후손이라는 비문을 두고서라도 그의 성과 이름만 풀어 보아도 그의 가문은 흉노(선비족–투르크–몽골족)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가락국과 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 왕의 성과 이름인 뇌질청예腦窒靑裔와 그의 아우 이진아치의 성과 이름인 뇌질주일腦窒朱日에서 성씨에 해당하는 ‘뇌질腦窒’은 ‘노씨’라는 소리로 이는 분명히 우리말로 ‘놋쇠’이고 황금’을 말하는 ‘금金’이다. 이 두 역사적 인물의 성씨는 흉노어의 후손인 돌궐어나 선비인의 몽골어로는 전혀 풀리지가 않는다. 이에 반해, 우리말로는 정확히 “김金” 씨라는 풀이가 된다.
또 한문으로 쓴 김수로의 이름 ‘청예靑裔’의 뜻은 한자의 뜻에 우리말을 대입하여 읽는 향찰로 풀면, 즉 일본어식으로 말하여 훈독訓讀하여 풀면 ‘푸른 아해/아이’이고 그의 아우인 ‘주일朱日’은 ‘붉은 해’라는 뜻이다. 즉 두 형제의 이름은 ‘푸른 아이’와 ‘붉은 해(아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김수로와 그의 아우는 고대 한국어를 쓴 한민족의 일원이 명백하다. 최치원과 역대 사서들은 김수로 형제의 어머니 이름 ‘정견모주正見母主’와 아버지 이름 ‘이비가夷毗訶’를 기록했는데, 이 이름들도 ‘놋쇠腦窒’처럼 우리말 향찰로 풀 수 있다. 그러면 어머니는 ‘바로正 볼見 어머母 님主’이라는 말이고, 이는 겹말뜻, 곧 중어법으로는 ‘부려(正바로, 부여) 칸(Khan, 見) 어머님母主’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그들의 아버지 ‘이비가夷毗訶’ 이름은 ‘이夷 바이毗 가訶’로 나뉘어지는 이름인데, 이는 ‘오랑케夷 부여毗 카訶=加’라는 부족장 칭호로 풀이된다. 이 칭호 역시 부여의 민족인 예맥穢貃인들의 칭호인 마가馬加, 우가牛加, 구가狗加 등 부여계 족장 칭호가 붙어있다. 《진서晉書》 사이전四夷傳에서는 “부여국夫餘國은… 그 왕의 도장글이其王印文이 있어 ‘예왕의 도장穢王之印’이라 하는데, 나라 안國中에 옛 예성古穢城이 있다. 애초本에 예맥의 성穢貃之城이다.” 고 한 바 있다. 결국 ‘이비가夷毗訶’라는 이름도 부여계 예맥인의 이름과 칭호이다. 그러므로 이 부부는 애초에 부여계 여인과 부여계 씨족장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한편 《삼국유사》와 최치원 등이 기록한 이 김수로 가문의 설화를 종합해 보면 부여–고구려계 가문과 속민들이 오늘날의 경남 지방으로 남하하여 김해와 고령지방으로 와서 여섯 아들을 낳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그들의 아들들이 자기들이 도래하기 전에 이미 이 곳에 정착하여 살던 ‘9간九干’의 세력을 꺾고 이 지방의 새로운 통치자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9간九干’이라는 말에서 ‘9九’도 고구려–발해–금–원 등 고구려 계 민족들의 국가가 숭배하는 숫자이다. 단, ‘간干’은 《삼국사기》가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고구려 풍속에는 … 영성靈星 및 해日, 기자가한箕子可汗 등의 신에게 제사 지낸다.”고 기록한 바와 같이, ‘기자가한箕子可汗’처럼 ‘가한’을 사용한 고구려계 칭호와는 달리, 신라 김씨가 왕이 된 이후의 칭호이다. 경주 김씨인 나물奈勿 이사금尼師今이 김씨로서는 처음으로 우선 ‘잇금’이 된 뒤, 그의 아들 눌지訥祇가 눌지마립간訥祇麻立干으로 오르면서 ‘잇금’ 칭호는 떼어 버리고 ‘간’이라는 칭호를 왕호로 썼다. 따라서 ‘9간九干’의 세력은 고구려계 라기보다는 칭호로 보아 신라계 세력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세력을 꿇게 하고 부여계가 가락국 등 육가야연맹을 세운 것이다.
또 두 형제가 채택한 나라 이름 ‘가락駕洛’ 또는 ‘가야迦耶’도 모두 <일본서기>를 비롯한 여러 일본 사서들이 우리나라를 그렇게 부르듯이, ‘카라Kara, 韓’와 그 소리가 같다. 그러므로 이 가야 연맹의 백성들은 애초에 부여–고구려 계 백성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놋쇠청예’ 김수로 왕과 보주태후普州太后 황옥부인皇玉夫人과의 혼인, 그리고 황후의 출신 문제
《기언》의 가락국에 관한 같은 기사는 김수로의 아내에 관해서도 언급한다.
“수로가 즉위한 지 7년 만에 아유타국阿隃陀國 군왕의 딸을 얻어 비로 삼으니, 이 사람이 황옥부인皇玉夫人이다. 또는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도 한다. 성은 허씨許氏이다. 혹은 남천축국南天竺國 군왕의 딸이라고도 하고, 혹은 서역西域의 허국許國 군왕의 딸이라고도 하는데, 허국은 또한 허황국許黃國이라고도 한다. 지誌의 기록에, “보주태후의 선군先君이 명하기를 ‘동방에 가락이라는 나라의 원군元君이 있으니, 너를 얻어 배필로 삼을 것이다.’ 하여, 바다를 건너 이르렀다.” 하였다.”
이와 관련 일부학자들은 그녀가 인도의 아유티아Ayuthia 지방 출신이라거나, 지나 서북의 한 지방 보주普州에서 살던 허씨 여인이라는 주장을 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주장들의 신빙성 관련, 아직 좀 더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 주장은 ‘아유티아’가 허황후의 고향인 ‘아유타’라는 나라 이름 소리가 같다는 것 외에는 다른 증거가 아무 것도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 둘째 주장은 ‘보주’라는 지방명이 같고, 거기에는 허씨 여인 석비가 있다는 것이 근거인데, ‘보주’라는 지명이 있는 것을 사실이지만, 거기에 살던 그 ‘허씨’ 여인이 ‘공주’ 허황후였다는 기록은 없고, 비석에도 단지 ‘허씨’라고만 되어 있다. 허씨는 지나와 만주, 한반도에서 많은 인구를 가진 성씨인데, 그 중 한 여인의 비석 하나에 의존한다는 데도 문제가 있다. 또 그 허씨 여인 석비에는 그녀가 동국으로 갔다는 기록도 없다. 그러므로 오히려 현지에서 태어나 거기서 사망한 한 여인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허국許國’이라는 나라와 관련하여 볼 때 멀리 가지 않고 바로 우리 역사 속에서 보더라도 같은 나라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기록된 시기는 나중의 일이나, 고구려가 망한 뒤 고구려 왕가의 지파인 걸乞씨 가문의 두 인물인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는 각각 진국왕震國王과 허국왕許國王의 칭호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허국許國은 고구려 영토의 어느 한 일부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고 그렇다면 허황옥 공주는 이 지방에서 온 여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세력 확장
《기언》의 같은 기사는 김수로 왕의 치적도 다음과 같이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수로가 다스릴 적에 백성들이 태평하고 편안하여 사방에서 와서 그를 본받았다. 음즙벌音汁伐(*경주시 안강읍)과 실직곡悉直谷(*삼척시 주변)이 땅을 다투어 서로 공격하다가, 두 나라가 다투어 신라에 와서 질정해 주기를 청하였다. 신라는 수로가 신명神明으로 다스린다고 여기고 불러서 물었는데, 수로가 이르러 다투던 땅을 음즙벌에 소속시키니, 두 나라의 어려움이 해결되었다. 신라의 임금 파사婆娑가 6부의 대인大人에게 명하여 수로를 대접하게 하였다. 여러 부에서는 수로를 두려워하여 모두 이찬으로 하여금 접대하게 하였는데, 유독 한지부漢祗部만이 접대를 귀인貴人에게 시키지 않았다. 수로가 예를 소홀히 하고 공경하지 않는다고 여겨 한지부의 대인 보제保齊를 격살하였다. 가락에 죄를 얻고 도망한 자가 음즙벌에 의탁하였다. 수로가 사신을 보내 그를 요구하였으나 음즙벌이 내주지 않았다. 이에 수로가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니, 음즙벌이 항복하였다. 후에 신라의 지마祗摩가 즉위하여 가락을 정벌하였으나 황산하黃山河에서 패하였다. 이에 나라가 더욱 강성해져서 국토가 동쪽으로 황산하에 이르고 북쪽으로 대량주大良州에 이르렀으며, 서남쪽으로는 바다와 접하고 서북쪽으로는 거타주居陁州(*지금의 진주晉州)에 이르렀으니, 이곳은 백제와의 경계이다.”
이상의 기록에 이어 《기언》은 가락국 시조 부부의 말년에 관해서도 기록하는데, 다만 이들이 실존인물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수명이 너무도 과장되었다는 느낌이 있다. 즉 “효령제孝靈帝 중평中平 6년(189)에 태후 허씨許氏가 졸하였다. 수壽는 157세이다. 태후는 아들 열을 두었는데, 어머니의 성을 얻은 자가 두 사람이라고 한다. 효헌제孝獻帝 건안建安 4년(199)에 수로가 졸하였다. 수는 158세이다. 납릉納陵에 장례하였다.” 고 하기 때문이다.
가야국 왕자가 또는 공주가 일본으로 가서 일본왕가를 이루었다는 날조된 믿음
과거 재야사학자 문정창과 서동인 등은 가락국 허황후의 딸이 일본으로 가서 일왕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허황된 주장을 펼친 바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어떠한 역사적 기록에도 근거하지 못한 허황되고도 잘못된 주장이고 또 역사적 사실과도 배치되는 주장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왕실의 일부를 이룬 사실은 가야가 아니라 다른 나라의 경우들이다. 우선 신라왕자 천일창이 일본으로 간 일이 있고, 또 그의 6대 후손녀가 일왕 응신천황應神天皇(201/321? ~ 310/430)의 어머니 진구황후神功皇后(170년? ~269년?)가 된 사실이 있다. 《고사기》의 응신천황조는 이를 자세히 계보까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 백제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의 후손녀인 화和씨 신립新笠이 환무천왕桓武天皇의 어머니가 되어 오늘날 일왕의 모계 선조가 된 사실도 《속일본기続日本紀》 권 제40의 기연력 8년 정월조에서 명백히 기록하고 있다.
그 밖에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도 의려국왕依慮國王의 아들 의라依羅가 일본으로 가서 왜왕倭王이 되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진서晉書》 사이전 부여조에는 ‘부여국왕夫餘國王 의려依慮’가 나오는데, 방금 인용한 《태백일사》는 그 부여국왕 의려依慮의 나라인 ‘부여국’을 “의려의 나라依慮國”이라고 조금 말을 바꾸어 기록한 것 뿐이다. 《진서》는 《태백일사》의 ‘의려의 아들 의라’를 ‘부여후왕夫餘後王 의라依羅’라고 했다. 이 기록의 사실성을 입증하기라도 하듯이, 일본에는 그들을 기념하여 모시는 신사도 있다. 카와치쿠니河内国의 의라향依羅郷(현재 마츠하라시松原市 북서부)인데 의라는 지역신으로 섬겨지고도 있다.
가락국 시조 김수로 이후 9세대, 총 10세대의 가락국왕의 계보
《기언》의 같은 기사는 이어서 가락국 총10세대에 걸친 세계를 이야기한다:
“가락국 시조 수로 왕이 세상을 버렸다. 그러자, “아들 거등居登이 즉위하여 칠점산七點山의 선인仙人 참시旵始를 부르고, 초현대招賢臺를 지었다. 그 뒤 마품麻品, 거질미居叱彌, 이시품伊尸品에게 자리가 넘어 간 뒤, 좌지坐知에 이르렀다.
좌지는 용녀傭女를 얻어 그녀를 매우 사랑하였다. 그러자 용녀의 무리가 권세를 부려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이에 신하 원도元道가 간을 하여 시초점을 쳐서 풀 괘解卦를 얻었다. 해괘의 점사占辭가 이르기를, “너의 엄지발가락을 풀어 버리면 벗이 이르러 믿을 것이다.” 하였다. 좌지가 사죄하고 용녀를 하산荷山으로 내쫓으니, 나라가 다스려지고 강성해졌다.
그 뒤 취희吹希, 질지銍智에게 전위되었는데, 질지가 국모國母 황옥부인을 제사하였다. 질지가 졸하고 겸지鉗知가 즉위하였으며, 겸지가 졸하고 구형仇衡이 즉위하였다.
구형이 신라 법흥왕 1년(514)에 신라에 항복하니, 왕이 객을 대하는 예로 우대하고, 그 나라를 금관군金官郡으로 삼아 식읍으로 봉해 주었다. 문무왕이 즉위함에 이르러 금관소경金官小京을 두었다.”
가락국은 이리하여 모두 10세에 491년을 이어가다가 나라가 망하였다.”
가락국은 이리하여 신라에 통합되어 없어졌다.
결론
육가야국을 세웠지만 신라에 흡수된 가야 김씨들의 대표는 김해 김씨이다. 이 씨족에는 방금 본 인물들이 배출되어 고대 및 현대 한국사에 귀중한 역할을 하였다. 다만 통계청이 실시한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오늘날 우리 국민 절반이 김·이·박·최씨인 것으로 조사되었고, 성씨 본관 중엔 김해 김씨가 446만 명으로 가장 많다고 한다. 이를 볼 때 스스로 김해김씨와 그 밖의 다른 6가야 출신 김씨들이라고 주장하는 그 인구는 남한 만에도 500만에 가까울 것으로 보이는데, 남한 인구 절반 정도인 북한의 김해김씨계 인구를 약 250만으로 잡는다면 그 수는 엄청나다.
한편 김해김씨임을 주장하는 이들 모두가 김수로 왕과 그 6형제의 직접적 후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다른 왕족 가문들의 경우, 남한만 친다면, 대개 겨우 3만~수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구려 왕가 후손인 황성 고씨, 백제 왕가인 부여 서씨, 그리고 발해 왕가 후손인 영순 태씨와 밀양 대씨, 고려 왕가의 후손인 개성 왕씨와 같은 경우가 모두 각각 3만을 넘지 못한다.
물론 고구려–백제–발해–고려 계 왕가의 후손의 수가 매우 적은 이유는 외부적인 요인도 있다. 우선 고구려–백제 왕가의 경우는 그들 중 상당수가 당나라로 끌려간 탓도 있고, 일부는 나라가 망하자 일본으로 망명했기 때문이다. 개성 왕씨의 경우 조선 개국 이성계의 전주 이씨가 그들을 철저히 살해하였기 때문이다. 살해를 피한 개성 왕씨들도 장차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부계 성 왕씨가 아니라, 자신들의 어머니의 성씨에 따라, 전全씨, 옥씨, 전田씨 등으로 성씨를 바꾸었다.
이와는 달리, 나라가 망했으나 신라왕가의 우대를 받은 김해김씨나 고려왕건에게 투항한 경주김씨는 왕건의 호족 유화정책 아래 오히려 우대를 받은 덕분에 상대적으로 많은 인구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가야김씨와 신라김씨 계 인구가 특별히 다수인 이유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발해의 성씨에 관해 기록한 송나라의 홍호(洪皓)가 1156년에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적은 《송막기문》에 따르면 “발해국 왕은 옛날부터 대씨大氏를 성으로 삼았다. 우성(귀족성씨)은 고高ㆍ장張ㆍ양楊ㆍ두竇ㆍ오烏ㆍ이李 등 몇 종류에 불과하다. 부곡部曲이나 노비 등 성씨가 없는 자는 모두 그 주인(의 성씨)을 따른다.”고 한다. 발해의 경우처럼 김해김씨와 경주김씨와 같은 왕족 가문 성씨를 가진 인구 중에도 왕가를 섬기던 노비들 중 상당수가 그 성씨를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조선시대에 그 가문들의 족보를 얻음에 따라 이 가문 인구수가 엄청나게 불어난 것은 아닐까 한다. 여하튼 그와는 상관없이 그들은 이제 이 씨족의 당당한 한 부분이다.